실어증 권하는 사회

이번 총선에서 SNS (주로 트위터)가 민심을 측정하는 정확한 바로미터가 아니었음이 여실히 증명됐다. 트위터 세상에서 느껴지는 MB에 대한 적개심과는 전혀 다른 선거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이런저런 분석들이 많다. 그 중 가장 유력한 것은, 트위터는 주로 젊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젊은 사람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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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새누리당을 찍은 사실에 대해, 그저 노인네들이라, 그저 기득권이라, 그저 꼰대라, 혹은 그저 무개념 내지는 무뇌아라, 새누리당을 찍었다고 생각한다면 대선에서도 비슷한 꼴이 펼쳐질 거라는 생각이…물론 노인네라, 기득권이라, 꼰대라, 무개념이라 새누리당 찍은 사람들, 아마 많을 거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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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원, 전직 판사의 미필적 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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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 백만가지다. 그렇지만 도저히 몇자 적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다. 웬만하면 참으려 했다. 당장 주말까지 마감해야할 일들이 산적해 있는데다, 가난한 유학생 형편에 엄청난 돈을 주고 베이비시터를 고용해 가면서 논문을 쓰고 있는 마당에, 딴 짓은 곧 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연히 보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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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기적인 엄마의 항변

모유수유를 한 지 벌써 9개월. 얼마 전부터 모유수유를 끊겠노라고 공언해왔지만, 사실 아직도 끊지 못했다. 몸이 너무 피곤하고 힘들면 끊겠다고 다짐했다가, 아가를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 좀 더 천천히 끊자 했다가, 또 그러다가 왜 나만 이 고생을 해야 하나 화가 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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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벌써 17년 전의 일이다. 고등학교 다닐 적에 키가 작은 국어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대학을 졸업한 지 그리 오래 되어 보이지 않는, 기껏해야 삼십대 초반
정도로 보였던 그 선생님은 점심시간이면 온몸이 땀에 젖도록 학생들과 공 차는
것을 좋아했다. 여름이면 풀어헤친 앞섭 사이로 삐져나온 가슴털이 유난히 수북해,
구르는 낙엽만 봐도 깔깔댄다는 여고생들에게는 은밀한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선생님은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토론식 수업을 진행했었는데, 언젠가 낙태에
대한 논쟁이 붙었던 날의 일이다. 아마도 포르노를 통해 왜곡된 성지식을 습득한
듯한 어느 남학생이 여학생들의 공분을 살만한 몰지각한 발언을 하자 단호한 어조로
그 학생의 잘못된 생각을 조리있게 지적해주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말을 할 때면
유난히 손동작이 커서 장기자랑 시간이면 그 선생님을 흉내내는 것이 큰 웃음을 주는
아이템이기도 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특목고로 모든 학교의 행정과 교과가 대학입시에 올인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열일곱 나이의 마음 여린 학생들에게는 다소 숨막히는 공간이었다.
모두가 "공부가 세상의 전부"라고 가르치던 그 때, 잘은 몰라도 그 선생님의
눈빛과 언행에는 뭐랄까 세상의 부귀와 영달의 노예가 되어가는 학생들에 대한 연민
내지는 안타까움 같은 것들이 느껴졌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그 선생님은 소위 말하는 입시 전문 명강사는 아니었다.
시험에 나오는, 외워야 할 것만 집어주는 ‘밑줄 좍’ 선생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입시의 노예나 다름없었던 우리로서는 시험에 안 나오는 것까지(고로 알 필요 없다고
느껴지는 것 까지), 가르치는 그 선생님의 스타일이 뭐 그닥 반가울 리 없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1년을 함께 보낸 어느날 그 선생님은 학교에 사표를 냈다. 그
뒤로 어렴풋이 선교의 뜻을 품고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랬거나 어쨌거나
학교에는 새로 선생님이 부임하고 우리는 또 다시 입시의 현장에서 맹렬히 공부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동창들과 만난 자리에서 어쩌다 "그래 맞아, 그런 선생님이
있었더랬지" 정도의 존재로 잊혀져 갔다.

 

<영화 ‘소명’의 포스터. ‘소명’은 아마존 바나와 인디언과 10년째 함께 생활하고
있는 강명관 선교사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리고 17년이 흐른 어느날, 뜻밖에도 그의 근황을 알려온 것은 대형 스크린이
즐비한 멀티플렉스 극장의 간판에서였다. 그는 정말로 선교사가 되어, 브라질 아마존
속의 바나와 인디언을 섬기고 있었다. 수염이 많이 자랐고 얼굴이 햇볕에 많이 그을렸으며
흰 머리가 늘었지만, 그의 얼굴은 17년 전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분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 평온하고 따뜻해보였다.

 

선교지 중에서도 가장 하드코어라 할 수 있는 아마존 밀림 속에서 벌써 10년째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은, 종교와 무관하게, 그리고 포교 방식에 대한 찬반을 떠나,
개인적으로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는 일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고, 때로는 그 비난이 매우 정당할만큼 기독교인들의 잘못이 크기도
하지만, 그 분의 삶이야 말로 예수님의 사랑에 가장 근접한 크리스찬의 삶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나 역시 기독교인이지만, 아무도 날 보며 기독교인의 향기를 느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 가서 자신있게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는 삶을 살았고, 또
살고 있다. 누군가 하나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싶거든, 입으로 전할 것이
아니라 삶으로 전해야 한다는 반성을 또 한 번 하게 됐다.

 

사실 기독교에 대해 존재하는 온갖 비난에 대해 나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며,
또한 전혀 근거없는 모략이라고 반박할 의사 역시 없다. 오늘날 이른바 ‘개독교’에
대한 비난은 많은 부분 일리가 있고 또 맞는 지적이다. 헌금의 액수로 사람의 신앙을
가늠하는 탐욕, 지혜롭지 못한 방식으로 타종교인에게 기독교를 강요하는 독선, 사랑과
관용의 마음 없이 죄와 벌만을 논하는 오만은 누구라도 기독교를 오해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기독교인들의 잘못이다. 나 또한 이런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부끄러운 신앙인으로써 딱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기독교인의 잘못으로
기독교 자체를 오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기독교의 탐욕과 독선,
오만은 사실, 기독교인의 탐욕과 독선, 오만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죄책감을 덜어 줄 면죄부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용할 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데는
관심이 없거나, 혹은 전한다 할지라도 지혜롭지 못한 무례한 방식으로 전하는
경우가 많다.

 

17년 전 만났던 그 분은 비록 내가 기억하는 한 쪽집게 교사는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내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하나님이 그 분의 삶 속에,
그리고 바나와 인디언의 삶 속이 언제나 함께 하시길 기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내 삶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다짐도 함께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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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데이빗 찾기

평소에 갖고 있는 지론이 있습니다. 인터넷에는 없는 게 없다는 굳은 믿음입니다.
인터넷에 정보가 많은 거야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지만, 저의 경우에는 거의 믿음에
가깝습니다. 저는 제가 찾는 정보의 99%는 이미 인터넷에 존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아주 작은 곳에서 출발했습니다. 어느 곳엔가 제가 기고한 글에
악성 댓글이 달렸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게시판은 실명으로만 댓글을 달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실명이라고는 해도 사실 댓글 작성자의 ip 주소도 없을 뿐더러,
또 설령 ip 주소를 안다 해도 추적할 여력이 없는 저로써는 익명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인터넷의 순기능 (혹은 역기능) 중에 하나는 인간의 추악한 단면을 배설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기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악성 댓글 쯤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는 않지요. 하지만 제가 몹시 불쾌했던 해당 댓글은 저의 주변인물을 운운하면서
마치 자신이 제 주변을 잘 아는 양 비꼬아 말하는 통에 기분이 매우 얹짢았지요.
혹시 진짜 나를 아는 사람은 아닐까 생각도 들고요.

 

푸코가 말하는 원형감옥 이야기를 아시나요. 원형감옥 가운데서 내 쪽으로 강하게
내리쬐는 빛에 피감시자의 신원은 훤히 노출되지만, 반면 강렬한 광원을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 볼 수 없는 피감시자는 감시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아는 척 감시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모르는 듯한
무력감.

 

댓글 하나에 너무 오바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 궁금해졌습니다. 그 인터넷 게시판은 댓글 작성자의 실명과 그가 쓰는 닉네임(즉
아이디)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이름이 김철수이고 아이디가
wind88이라고 합시다. 저는 무작정 그 사람을 찾아나섰습니다. 구글과 네이버의 세상을
통해.

 

웹검색의 전제는 만약 제가 김철수라는 사람이 wind88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것을 다른 곳에서도 발견한다면 그것은 제가 찾는 동일인이라는 것입니다. 즉 김철수라는
무수한 사람들 중에 wind88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사람은 지구상에 한 사람입니다.
만약 동일한 이름을 사용하는 김철수 두 사람이 모두 인터넷에서 wind88을 사용한다면,
제 검색결과는 오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댓글을 단 사람의 이름은 김철수보다는 흔하지 않은 이름이었고 (성씨도
이름도) 아이디도 아무나 생각해낼 수 있을 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한 해석이 안되는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 따라서 이러한 제
전제는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구글과 네이버에서 "김철수"와 "wind88"이라는 검색어를
동시에 검색했습니다. 해당인물이 동일한 이름과 아이디로 몇군데 다른 게시판에서
활동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사람의 관심사는 주로 자동차에 관련된 것이더군요.
일부 자동차 동호회 게시판에 그의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그 게시판들에는
아주 간랸학 회원정보도 공개되어있었습니다.

 

아, 물론 본인이 회원등록을 할 당시 일정부분의 정보를 공개하겠다고 스스로
선택해놓은 것들이었겠지요. 제가 해킹을 하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제가 그럴만한
지식과 능력도 전무하고요. 이를 통해 그가 남자이며 (예상하고 있었던 부분), 나이는 3x세
(197x년생),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의 영어이름을 알게 되었지요. 물론 가명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저는 그것이 그의 본명이라 믿고 다시 검색에 나섰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영어 이름이 david라고 합시다. 미국에서 누군가 david chul-soo kim 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면 그가 맞을 확률은 100%임을 확신합니다 (물론 그의 영어이름은
david보다는 덜 흔한 것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david" "chul-soo" "kim" 의 다양한 조합으로
구글을 검색하던 와중에 드디어 이 모든 조합을 만족시키는 인물이 나타나더군요.
그 조건의 조합이란, 1) 3x세이며 2)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고 3) 미국 이름은
david이며 4) 한국 이름은 김철수이며 5)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이 wind88이며
6)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단 한사람 나오더군요. 1번~6번까지의 조합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단언컨데 지구상에 한 사람 밖에 없다고 자부합니다.

 

찾고보니 그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사회과학 계열을 공부하는 한 학생이었습니다.
해당대학 해당학과 게시판에 나온 그의 소개글을 읽고 저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지요.

그의 주요 연구주제가 온라인 공간에서의 익명성의 문제라고 하더군요. 참 어이가
없기도 하고, 허탈했습니다.

 

웹서치를 마치고 저는 문득 저의 집요함에 좀 놀라기도 하고, 나중에 부업으로
흥신소를 차려도 되겠다는 생각에 웃음마저 났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에는 모든 정보가
다 있다는 저의 믿음은 한층 더 굳어졌지요. 그러면서 한편으로 인터넷 실명제는
필요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인터넷 실명제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앞서 말한 "배설구"의 기능을 운운하지만, 내가 똥 마렵다고
남의 집 앞에다 똥 싸놓을 권리는 없는 것 아닐까요. 제 말은, 배설, 물론 인간은
누구나 배설을 해야 하지만, 남에게 상처를 주는 배설의 권리까지도 우리는 과연
인정해야 할까요?

 

아무튼 잡설이 길었네요.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을 지칭할
때 드는 비유입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 것이 인터넷을 통하면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네요. 미국에서 데이빗 철수 킴을 찾았으니 말입니다. 친구는
절보고 완전히 CSI (미국의 범죄수사드라마)라고 놀리더군요. 아무튼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사족: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 아이디, 등등은 제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데이빗 철수 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시는 분이 우연히 존재한다면 그 분께는 죄송한
노릇. 실제 제가 찾은 인물은 다른 이름과 다른 아이디를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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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현실의 차이 – 파라의 이야기

 

영화와 현실은
묘하게 닮았고 또 참 많이 다르다. 라이언 오닐의 삶이 그러하다. 요즘 세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라이언 오닐은 영화 ‘러브 스토리(1970년작)’의 남자주인공으로 1960~70년대 인기를 끌던 왕년의 스타다 (그런 측면에서는 나도 요즘 세대다). ‘러브 스토리’가 어떤 영화인가. 이 영화를 모르는 사람들도 배경음악과 함께 남녀 주인공이 눈밭에서 구르는 장면이라던가,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Love means never to say I’m sorry)"라는 명대사 정도는 알고 있을 터.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극적 장치는 오늘날 무수한 영화 및 드라마들이 반복하는 클리셰(cliche: 진부한 표현, 판에 박은 문구)의 원형을 이룬다. 가령 남자주인공을 하버드 법대생으로, 여자 주인공을 백혈병 환자로 설정한 것은 전형적인 신파의 코드다. 극 전개가 밋밋하다 싶으면 여주인공이 어김없이 걸린다는 바로 그 백혈병의 효시가 이 영화되겠다. 영화에서 라이언 오닐은 그 백혈병에 걸린 여자친구를 극진히 간호하는 수재로 등장한다.

 

 

그는 15일
미국 NBC에서 방송한 ‘파라의 이야기(Farrah’s Story)’에서 그는 영화같은 실제를 경험한다. 파라 포셋(Farrah Fawcett)은 2006년 직장암 판정을 받고 현재까지 투병 중에 있으며 그녀의 투병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것이 바로 ‘파라의 이야기’다. 라이언 오닐은 파라 포셋의 오랜 연인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면 파라 포셋은 또 누구냐.

 

 

이 여인 역시 1970-80년대를 주름잡던 왕년의 스타로, TV 시리즈 ‘미녀삼총사(Charlie’s angels)’에 출연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렇다, 영화로 더 잘 알려진 ‘미녀삼총사’의 원조되겠다. 그녀는 ‘육백만불의 사나이’로 유명한 리 메이저스와 10년여간 결혼생활 끝에 이혼했고 지금의 연인 라이언 오닐을 만나 30년 가까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때 미국의 핀업걸(pin-up girl: 도처에 사진과 화보가 붙어있는 젋은 여성 스타, 우리말로는 국민 여동생쯤으로 번역하면 될 듯)이었던 그녀가 직장암 4기로 죽어가고 있다. 수술 이후 완치된 것으로 알았던 암이 2007년 재발해 현재로서는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한다. 그녀는 다큐멘터리에서 항암치료를 받는 고통스러운 모습과 함께 살고자 하는 희망을 역설해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이 다큐멘터리는 미국 전역에서 900만명이 시청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그녀의 곁을 지키는 라이언 오닐의 모습과 그의 인터뷰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주연한 영화 ‘러브 스토리’를 떠올리며 "우린 또 다른 ‘러브 스토리’를 찍고 있다"고 농담하는 모습도 보인다. 40년전 찍었던 영화 속의 상황이 참 절묘하게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순간이다. 그는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제니의 곁을 지켰던 올리버처럼, 직장암으로 죽어가는 파라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보다 혹독하다. 그녀는 백혈병처럼 소위 ‘우아한’ 병이 아닌 (물론 백혈병의 현실 역시 영화 속 사정과는 전혀 다르다), 직장, 쉬운 말로 항문에 암덩어리가 퍼지는 직장암에 걸렸다. 암은 간으로 퍼져 9개나 되는 암 덩어리를 만들었다. 투병기 역시 혹독하다. 각종 시술, 가령 생살 속으로 바늘을 집어넣어 간에 퍼진 암세포를 레이저로 없애는 시술을 받으며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은 보고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파라 포셋과 라이언 오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레드몬드 오닐은 약물중독에 사고뭉치로 어머니가 죽어가는데도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는 듯 하다. 그는 올해 1월 향정신성 약물 소지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형 집행기간 중에도 약물을 교도소로 반입하려다 적발돼 또다시 기소됐다. 그런 아들에게 어머니는 "어느날 네가 아침에 눈을 떠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난 여전히 네 곁에 있겠다"고 고백한다.

 

라이언 오닐이 전처 사이에서 낳은 딸이자 영화배우인 테이텀 오닐은 오랫동안 파라 포셋을 증오해왔으나 최근 그녀가 암으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고 비로소 그녀를 병원으로 찾아와 용서했다고 한다.

 

이처럼 현실은 영화와 닮았으면서도 참 다르다. 현실은 영화만큼이나 드라마틱하지만, 영화는 현실의 슬픈 디테일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 한 남녀가 30년 이상을 사랑하면서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연인을 지켜준다는 이야기는 무척 로맨틱하지만, 그 과정 속에 깃든 슬프고도 힘겨운
디테일은 온전히 현실의 몫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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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냉소적인 영화평 – 레이첼, 결혼하다

 

이번에도 역시나 우연한 기회에 영화 ‘레이첼, 결혼하다’를 보게됐다. 주인공
앤 해서웨이가 당연히 레이첼일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레이첼의 동생 킴(벌리) 역할이었다.
아무런 정보없이 보게 된 탓에 영화를 다 보고난 뒤에야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봤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거의 모든 리뷰가 "가족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 신기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이 영화의 궁극적
메시지는 가족의 소중함이라기보다는,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신화’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사회적 제도로서의 가족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가를 역설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영화사에서 배부한 보도자료에 그렇게 써있었기 때문에 모든 리뷰들이 그렇게
긍정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다소 불순한 의구심마저 들었다.

 

내용은 간단하다. 어렸을 때부터 약물중독자였던 킴은
갱생원(rehab)을 전전하다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잠시 집에 다니러 온다. 결혼식
준비에 들뜬 분위기 속에 서로 호들갑스럽게 반가워 하고, 어린시절을 추억하며 까르르
웃고, 다들 마구 오버하면서 신랑 신부를 축하해주지만, 손님들이 떠나고 가족만
둘러앉은 자리에서 이 가족에게 남은 것은 아픈 과거와 상처뿐이다.

 

영화는 가족이라는 ‘운명’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잘나도 못나도 어쨌거나
가족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기보다, "증오와 분노로 얼룩진
관계조차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려 노력해야만 하는 운명"을 다룬다. 그
운명은 언제나 달콤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운명은 아주 자주 피곤하고 버겁다.
때로는 벗어던지고 싶을만큼.

 

겉으로 보기에 화목한 이 가족의 위태로운 평온을 간신히 지탱하는 것은 아버지(빌
어윈)의 몫이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신화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뻔히 보이는 균열을 보고도 어떻게든 가족의 붕괴를 막아보고자 중재자역할을
자임하며 백방으로 애쓴다. 동생을 용서할 수 없다는 레이첼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그래도 네 동생이잖니."

 

레이첼은 아버지의 말에 더 반박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그 침묵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요? 동생이라면 반드시 용서해야
하나요? 왜 그래야만 하죠?" 사실 생각해보면 딱히 답이 없다. 가족이란 내가
원해서 만난 사람들도 아닌데 경우야 어찌됐든 그들이 내게 어떤 행동을 했든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억지다.

 

그러나 사회, 엄밀히 말해 결혼이라는 제도는, 그런 억지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게끔
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사회가 가족이라는 일차적 단위의 공고한 기틀 위에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안정된 가정생활은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사회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가족에 대한 수많은 신화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아무리 안으로 곪아터진 가족도, 이만하면 화목한 가정이라고 스스로
믿는다.

 

영화는 결혼식이 끝난 뒤 킴이 다시 갱생원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결혼식을 계기로 가족간의 과거의 아픔과
상처가 다시 한 번 폭발하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그저 살짝 뚜껑을
덮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모두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그들은 한참동안을
화목한 가족의 신화 속에 살다가 다시 어떤 계기가 생기면 똑같은 방식으로 폭발할 것이다.

 

감독이 보여주려 했던 건, 가족이란 그저 이렇게 그냥 굴러갈 수밖에 없음을,
그게 가족의 운명이라면 운명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수많은 리뷰들은 무슨 사연이
있든 무슨 과오가 있든 결국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그건 어찌보면 대단히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상처뿐인 엉망진창의
가족이라 하더라도, 당신은 돌아올 수밖에 없으므로.

 

사족: 쓰고보니 이 영화에 대한 세상에서 가장 씨니컬한 리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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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sagu no hana

Ryuichi Sakamoto – Chinsagu no hana

 

얼마전 본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에 삽입된 노래. 영화는 별로였지만 이
노래만은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아 유튜브에서 찾아보았다. 원래는 오키나와 민요라고
한다.

 

ちんさぐの花 (chinsagu no hana)1.ちんさぐの花や ちんさちにすみてぃ  うやのゆうしぐぅとや ちむにすみれ        (鳳仙花の朱は 爪の先を染めて親の言葉は、心にそめる)2.てんのむりぶしや ゆみばゆまりしが  うやのゆしぐうとや ゆみんならん      (天の星々は、数えられても親の愛とさとしは、数えられない。) 3. よるはらすふにや にるふぁぶしみあて  わんなちぇる うやや わんどみあて(闇夜に航海する船は、星の灯りが頼り老いた親には、私が頼り)봉선화 꽃은 내 손톱을
물들이고부모님 말씀은 내 마음을 물들이지하늘의 별들은 셀 수
있어도부모님 사랑은 셀 수가 없네밤에 항해하는 배는 별빛이
지켜주지늙으신 부모님은 내가 지켜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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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 후에 남겨진 오리엔탈리즘

 

우연한 기회에 영화 한 편을 보게 됐다. "사랑한 후에 남겨진 것들"이라는
독일영화로 원제는 "kirschblueten", 영어로는 "cherry blossom",
일본어로는 "hanami", 우리말로 직역하면 "벚꽃(놀이)"쯤 되겠다.
원래 미국영화보다는 유럽쪽 영화를 좋아하는 데다 네티즌 평점도 나쁘지 않았던
터라(사실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어느정도의 기대를 하고 보긴 했지만, 생각보다
별로라서 굉장히 실망했다.

 

남편이 병에 걸려 오래 못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부인은, 이 사실을 남편에게
숨긴채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행 도중 예기치 않게 부인이 먼저 숨을 거두게
되고 남편은 상실감에 젖는다. 젊었을 적 일본에 건너가 부토(舞蹈) 무용수가 되기를
바랐던 아내를 떠올리며 그는 무작정 일본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한 떠돌이
부토무용수를 알게 되고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 비로소 아내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가 시시했던 까닭은, 인도에 가면 삶을 발견하게 될 것
같은 현대인들의 막연한 기대처럼, 일본에 대해 서양인들이 갖고 있는 막연한 오리엔탈리즘이
느껴져서다. 만약 내가 감독이었다면, 그렇게 뭔가 신비로워 보이던 동양, 혹은 일본도,
알고보면 다 사람사는 동네고, 사람사는 모습은 어디나 다 똑같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 같은데, 영화는 일본문화에 경도된 감독의 시선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게다가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 어찌나 직접적인지, 일본에 온 남편이 아내가
즐겨입던 옷을 오바코트 속에 몰래 입고 나와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 잠깐 잠깐씩
바바리맨처럼 코트깃을 열어보이며 "이게 당신이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벚꽃이야"라고
혼잣말을 뇌까리는 장면은, 눈물이 나기는커녕 "뭐야 저 사람, 변태야 뭐야"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추억하며 지구 반대편을 찾은 노년 남성의
애틋한 마음을 저런 식으로 밖에는 담아내지 못하는 감독의 아마추어적 접근이 안타까웠다.

 

매우 어리고 예쁜 떠돌이 부토 무용수를 우연히 알게 되면서 그녀와의 우정을
통해 아내를 이해하게 되는 대목도, 왜 꼭 하필 서양의 늙은 남성과 동양의 젊은
여성의 우정을 통해 그려졌어야 했나, 하는 찝찝함이 남는다. 그 둘의 우정에서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은 인간 대 인간으로써의 깊은 진심이 느껴지기보다는, 뭐랄까 딱 꼬집어
뭐라 설명하기 힘든 작위적인 인위성 같은 게 너무 진하게 느껴진다. 저런 우정,
저런 인연, 일본에서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한거야? (감독은 어쩐지 "일본이라면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결국 감독은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드러냄과 동시에 서양인들의 눈에나
신기해보이는 일본 문화의 단편들을 죽 열거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가령 기차역마다
파는 기차역 특유의 도시락같은 것) 유럽 관객 입맛에 딱 맞는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마치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그러한 것처럼. 나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것은 유럽관객과 김기덕 감독 사의의 암묵적 ‘공모’가 느껴져서다.
그는 유럽 관객에게 소위 ‘팔리는’ 영화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의도적이든 결과적이든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을 조장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현실의 문제를, 현실에 전혀 뿌리내리지 못한 방식으로 풀어낸
감독의 시선이 못마땅하긴 하지만, 네티즌들이 9.33/10 (네이버 기준)이라는 놀라운
수치의 평점을 부여한 영화를 이렇게까지 냉소하는 나 역시도 평범한 취향의 소유자는
아니라는 생각은 든다. 내가 아는 한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던 ‘아이엠
샘(I am Sam)’을 보고도 "왜 저렇게 신파야"라고 불평했던 걸 생각하면,
어쩌면 변태는 정작 나인지도.

카테고리 : 영화 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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