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안느 페이스풀

 

 

 

영국의 가수 마리안느 페이스풀(Marianne Faithfull). 흘러간  팝송이지만 적어도 80년대에 10대를 보낸 이들이나 혹은 그전 세대라면 한번쯤 라디오에서 들어 봤을 만한 노래가 마리안느의  데뷔곡이자 대표곡 <As tears go by>. <This little bird>를 기억하는 이도 많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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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얼굴에 허스키하면서도 또 인생의 허무를 모두 짊어진 듯한 음성이 나온다는게 믿겨질까. 마리안느는 사실 완벽한 미인이라고 하기에 어딘가 2%가부족하다. 그러나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일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피를 받은 귀족 출신의 명문가 외동딸. 거기다 수도원 부속학교 출신답게 성녀(聖女)의  느낌과 또 어딘가 요염한 창녀의 이미지가 동시에 어우러진다.

 

   

 

 

청순가련하면서도 팜므파탈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그녀. 사진 속의 남자는 그 유명한 롤링스톤즈의 믹재거다. 마리안느는 잠시나마 믹재거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이 제일 행복하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상상해 본다. (부럽진 않다.난 믹재거의 열혈팬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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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스톤즈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그녀는 인생 최고로 높이 올라갔지만 짧은 시간의 영광을 뒤로 하고 처절히,  철저하게 허물어져 갔다. 이혼, 마약중독, 문란한 성생활, 유산, 그리고 수차례 자살시도. 그러나 그리운 것만 기억하자. 아마 내가 마리안느 페이스풀을 좋아하고 기억하는 거의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한다. 그도 이제 어느덧 꼬부랑 할머니.

 

 

   

 

 

 

 

18번까지는 아니지만 가끔씩 노래방에서 기분좋을 때  <Astears go by>를 한곡조 뽑을

때 마다 한때 나의

이상형 스타일인 그녀를 그려보곤 한다. 어느 네이버 블러그에서 본 마리안느의 사진을 굳이 나의 미니홈피에

올려놓는 수고(?)를 한 것은 이제는 잊혀져가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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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젊은이들 장군님 많이 존경하지요?”

"저 평양에서 왔시다"
자년 가을 저는 중국의 국경절 연휴에 고구려 유적지 답사 겸 우리 민족의 혼이 서려있는 뜻깊은 중국 동북 3성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민족의 성지 백두산도 올라보고 중국의 동북 지역도 두루 둘러볼 겸 우선 베이스캠프(?)로 제가 찾은 곳은 베이징에서 알게 된 조선족 동포 친구의 집입니다. 그 친구의 집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의 한 농가였습니다. 장작으로 불을 지펴 가마솥에 밥을 해먹는 전형적인 연변의 가난한 농가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곳에서 뜻하지 않게 그 집안의 먼 친척 뻘 되는 ‘평양에서 온 손님’과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곳도 오랜만에 명절을 맞아 재중동포 친구의 대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 저 역시 살가운 친구인지라 일일히 친척들과 한사람씩 소개를 하며 악수를 나누는데 누군가 갑자기 음습한(?) 목소리로 " 저 평양에서 왔시다"라고 하더군요. ‘똘이장군’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어린 시절을 보낸 저는 북한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에 순간 섬뜩했습니다.

전 잠시 어리둥절 했지만 곧바로 "저는 서울에서 왔시다"라며 북한 억양섞인 목소리 빠르게 응수했습니다. 일순 "와~ " 하고 주위에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조선인(북한인)이 오는데 한국 사람을 만났는데 어쩌냐"며 은근히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북한 동포들은 주로 중국에 거주하는 친인척 조선족들의 초청으로 중국 방문이 이루어지며 당국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출국을 허락해 준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북한과 중국 간의 이산가족 상봉인 셈이죠.

제가 만난 북한동포 K씨는 60년대 북한의 경제가 상대적으로 중국보다 우월하던 시절 가족과 함께 먹고 살 길을 찾아 북한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무려 40년만에 중국 땅을 다시 밟는다고 했습니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놓고 ’1민족 3국적인’의 난상토론
왜소하고 깡마른 체격의 K씨의 나이는 올해로 만 45세. 그러니 실제로는 15년 이상은 더 들어보였습니다. K씨는 가족은 평양에 살고 있고 가족 중 당 하급 간부도 있고 자녀들이 평양에서 학교를 다니는 걸로 보아 대체로 북한에서도 중산층 정도 되는 계층인 듯 보였습니다.

중국에서 우연히 보는 대부분의 북한 동포들(외교관이나 음식점 종사자들을 제외한)의 얼굴은 늘 표정이 굳어있고 마른 체격에 얼굴이 앙상한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습니다. K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K씨는 연변에서 TV로 상영되는 한국의 드라마나 뉴스 등을 통한 한국의 실상을 보고 매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대개 연변의 많은 조선족 동포 가정에서는 위성수신기를 설치하여 한국의 TV를 시청합니다)

K씨는 한국인인 저를 보고 이것 저것 물어보며 대단히 반가워 했습니다. "장인어른이 6.25때 의용군으로 끌려왔다. 고향을 너무 그리워한다. 이름 알면 친척들을 찾을 수 있냐"라고 물어보기도 하고 한국인들의 보통 급여수준을 물어보기도 하였습니다. "1가구에 한 2백만원 정도 되지 않나 싶다"라고 생각나는대로 일러주자 중국 돈으로 한참 환산해보더니 연신 "그게 사실이냐?"며 놀란 입을 다물지 않더군요.

K씨와 친구의 온 가족이 저녁식사를 마친 후 차를 들며 이런 저런 한담을 하며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던 우리들은 이내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민감한 6.25를 중심으로 한 한국 현대사를 놓고 설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몇 마디 주고받다가 금방 서로의 입장차를 드러낸 것은 너무 당연한 일. 조선족 동포 대가족의 호기심 어린 눈길에 둘러싸여 중국 조선족 노인, 북한의 K씨, 한국의 젊은이인 저, 이렇게 ’1민족 3국적인’의 보기드문 난상 토론이 벌여졌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신경을 곤두세운 열띤 토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평양에서 온 손님’측이 점차 수세로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요즘 장군님을 많이 존경하지 않느냐"
그 집안의 제일 웃어른인 조선족 노인은 K씨가 존경해 마지않은 ‘어버이 수령’을 ‘김일성’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호칭하는 바람에 K씨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기도 하고 "한국전쟁은 미괴뢰도당이 도발한 전쟁이 아니라 북한이 일으켰다"라는 노인의 주장에 "중국 조선족들이 한국과 교류가 많다보니 영향을 받아 물든것 아니냐"며 상기된 표정으로 맞서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동포들을 비롯 많은 중국인들은 한국전쟁을 미국의 선제공격으로 일으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민해방군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하기도 하고, 그 덕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고 젊은 시절 평양을 자주 방문했으며 대약진, 문화대혁명 등 격동의 중국현대사를 온몸으로 거친 해박한 이 노인의 논리정연함과, 현대사에 관심이 많았던 제가 간간히 던지는 ‘지원사격’ 앞에 K씨의 날선 주장과 목소리는 힘을 잃고 점점 허물어져 갔습니다.

K씨는 중간 중간 저에게 "그렇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이 요즘 장군님을 많이 존경하지 않느냐", "인터넷이 도대체 정확히 뭐냐"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과는 달리 난 노무현 대통령이 싫지는 않다"라는 얘기도 하더군요. -_-;

한국전쟁의 기원, 그리고 그 후의 일련의 굵직굵직한 현대사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다가 끝내 포기한 K씨. 그러나 그는 토론의 말미에 "우리는 가난하다. 그러나 우리는 장군님 중심으로 일치단결한다"는 말과 함께 당당한 표정을 잃지않았습니다.

"못 입고 못 먹어도 주체의 한 길로 간다"며 공화국의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K씨가 허물어진 것은 정작 그 다음.

△ 연변의 한 거리

울음바다가 되어버린 연변의 한 농가
제가 가족들의 안부를 묻자 K씨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하더니 곧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님이 고난의 행군 시절에 굶어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한참있다가 “나이드신 삼촌들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힘없이 덧붙였습니다.
"배급이 제때 나오지 않아 로인들은 며칠씩 굶고 그러다보면 날씨 추운날은 그냥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기 일쑤"라며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그 ‘굶어 죽은 사람들’은 다 그 조선족 동포 대가족들과 한 피를 나눈 친척일 터.
듣고 있던 한 아주머니가 훌쩍 거렸습니다. 그러자 가족 중 또 다른 한 사람이 숨죽여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스산한 늦가을 저녁. 마른 땔감으로 불을 지피는 농가의 좁고 낡은 방은 이내 온통 울음바다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일까요.

조선족 노인과 친구, 그의 가족들, 북한동포 K씨 그리고 저까지 그 대목에서 무언가 울컥 복받쳐 모두 목놓아 엉엉 울었습니다. 한참 울고난 K씨는 눈물을 훔치며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야 할텐데.."라며 말을 흐렸습니다.

이 조선족 노인의 집안 역시 한눈에 보아도 참으로 가난했습니다. 다음날 이 시골 농가의 인심많은 주인은 달리 줄것이 없다며 조카뻘되는 K씨에게 창고에서 헌 옷가지를 보따리에 잔뜩챙겨 주었습니다. 번번히 북한에서 친척들이 방문하기 때문에 이미 따로 준비해놓은듯 보였습니다.

털이 달린 헌 옷가지들은 장마당 내놓아 팔 수 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북한에서 온 친척에게 할아버지가 큰 맘먹고 재봉틀과 텔레비젼을 들려보내 할머니와 ‘황혼이혼’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머니 역시 간혹 방문하는 할머니쪽 북한 친척들에게는 더없이 인심히 후합니다.

저도 인민폐 100위안(한화 약 1만3천원)짜리 지폐를 건내려다 그만 주저하고 말았습니다. ‘못살아도 당당한’ K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 싫었던 것이지요.

어느덧 1년이 다 되갑니다. 낙엽지는 중국 동북의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고향으로 돌아가 겨울을 나겠다며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큰 헌옷 보따리를 소중히 짊어지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K씨의 야윈 뒷 모습이 지금도 아픈 기억으로 제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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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수 빨갱이와의 대화 “수령님만 살아계셨다면”

첫번째 이야기

한창 꽃다운 처녀 셋이서 한 겨울에 얇은 치맛자락으로 두만강을 건넜다. 처녀 중 한 명의 삼촌이라는 중국 동포 브로커가 이들을 맞아 약속된 농가로 안내한다. 마침 저녁을 짓던 농가의 아낙은 가마솥 채로 밥을 내왔다. 농가의 대가족이 먹을 많은 양의 밥을 굶주린 처녀 셋이서 솥바닥까지 긁어가며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운다. 10인분이 넘는 많던 밥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모습을 보는 농가의 아낙은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잠시 후 세 처녀는 브로커의 손에 이끌려 뿔뿔이 흩어진다. 이들은 각각 4천위안(약 한화 약 56만원)정도의 몸값으로 중국인들에게 팔려 나간다. 그 중 한 처녀는 시력장애가 있는 전과자 출신의 중국인 남자에게 팔려 강제 혼인을 했다. 그 중국인은 처녀를 돈을 벌어오라며 식당의 찬모로 내보냈다. 처녀가 받는 한달 급여는 500위안 남짓(한화 약 7만원). 북한 처녀들의 손맛은 야무지지만 탈북자라는 이유로 적은 월급도 감수해야 했다.

월급 날이 오면 이 남자는 어김없이 식당에 나타나 먼저 월급을 챙겨간다. 그 돈으로 늘 술을 마시고 걸핏하면 처녀를 두들겨 팬다. 결국 이 북한 처녀는 두 번이나 유산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중국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도망갈 수도 없다. 붙들리면 북한으로 강제송환 되기 때문이다. 북한에는 이 처녀만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굶주린 동생들과 부모들이 있다. 이 처녀는 1마오(한화 약 14원)짜리 동전을 꼬박꼬박 모은다. 1마오는 중국인 남편이 굳이 챙겨가지 않기 때문이다. 처녀의 소원이 있다면 이 동전을 모아 언젠가 100위안(한화 약 1만4천원)을 마련해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에게 송금하는 것이다.

 

두번째 이야기

어느 가을 중국 연변의 한 농가. 왜소한 체격의 북한 남자가 부지런히 농가의 창고에 모아둔 헌 옷을 주섬주섬 챙긴다. 중국 동포인 늙은 농가 주인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친척 방문 목적으로 중국으로 나온 이 북한 남자가 헌 옷을 챙기는 이유는 북한으로 돌아간 후 장마당에 내다 팔기 위함이다. 가난한 연변의 농가에서 조차 내다 버리는 헌옷가지도 이 북한 남자에게는 더 없이 값지고 귀하다.

이렇게 중국 동포의 초청으로 중국을 찾은 북한인들은 먼 친척 뻘 되는 동포들의 집을 ”순례”하며 반구걸식으로 물품을 챙긴다. 어느 맘씨 좋은 중국동포들은 딱한 사연을 듣고 텔레비전과 재봉틀을 내주는 경우도 있다. 고난의 행군 시절 굶주림으로 늙은 부모와 삼촌들까지 다 잃었던 왜소한 체격의 북한 남자는 옷 보따리를 등에 진 채 뒤뚱거리며 또 다른 중국동포 친척을 찾아 대문을 나선다. 가난한 농가라 달리 줄 것이 없는 중국 동포 노인은 남자의 마른 손을 잡고 “애들만은 밥 굶기지 말라”고 신신 당부한다. 힘겹게 옷 보따리를 진 남자의 얇은 옷자락 사이로 늦가을 바람이 쓸쓸하게 분다.

 

 

위의 이야기들은 실제 중국 동북지방에서 최근 몇 년간 있었던 실화이다. 리포터는 지난해 말 중국 동북으로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세번째 이야기 속의 종업원인 평양 출신 북한인 김진표(가명, 53)씨를 만나게 되었다.

 

김진표씨는 평양에 거주하며 대학교육을 받은 중산층 이상 수준의 남성으로 친척방문을 위한 정식비자를 발급받고 중국을 방문했다. 김진표씨는 지난 몇 년 동안 북한에서 일해 번 돈을 아껴 여비를 마련해 중국으로 나왔다고 한다. 중국 화폐 100위안(한화 약 1만 4천원)을 환전하기 위해 4만 5천원의 북한 화폐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김진표씨의 월급은 북한 화폐 3천원 수준. 그가 이를 악물고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어 중국으로 나왔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원래 중국에서 살다가 90년대 초반 북한으로 건너갔던 김진표씨는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기에 한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리포터는 김진표씨와 또 다른 중국 동포 셋이서 김진표씨가 일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두서 없이 나눈 대화를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해서 옮겨 본다.

 

그간 북한 내에서 ‘반역자’라고 불리며 북한 정권을 맹비난하는 탈북자들의 인터뷰가 아닌 여전히 북한 정권에 충성을 다짐하는 평앙 거주 ‘골수 공산주의자’와의 흔치 않은 인터뷰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름과 지명, 정확한 시기는 김진표씨의 신변 위험을 고려해 정확히 밝히지 않으며 김진표씨가 북한으로 돌아간, 몇 개월 후인 지금에야 뒤늦게 인터뷰를 내용을 소개한다.

 

“월급 700위안(한화 약 10만원)이면 북한 중산층 7년 연봉”

 

- 방문비자를 받고 중국으로 나오신 분이 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계시나요?

 

경제적으로 곤궁합니다. 이렇게라도 나와 일하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살기 힘듭니다.

 

- 지금 식당에서 급여는 얼마나 받습니까?

 

700위안(한화 약 10만원) 받습니다.

 

- 북한에서는 월급은 얼마 받았습니까?

 

국가기관에서 일했으며 한달에 약 3천원의 급여를 받았습니다.

 

- 700위안(한화 약 10만원)을 북한화폐로 환산하면 얼마나 됩니까?

 

100위안을 만들려면 북한돈 4만 5천원을 주고 바꾸어야 합니다.

 

- 그럼 여기서 받는 월급 700위안이면 어림잡아도 7년 연봉은 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와서 일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삽니다.

 

북한이 무상교육 및 의료, 배급제임을 감안해도 놀라운 액수다. 중국으로 나와 몇 달만 벌어도 북한에서는 배 안 굶고 몇 년을 남부럽지 않게 풍족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실제 동료 한 명이 중국으로 나왔다가 친척들에게 받은 돈으로 북한으로 돌아와 ‘부자’가 되어 살고 있다고 한다.

 

김진표씨 표현에 의하면 “중국 방문 후 그 집 가족들은 홀쭉하던 얼굴이 몇 년 동안 토싵토실해져서 기름이 흐를 정도”라고 한다. 김진표씨는 “이래야 살수 있다”는 말을 여러 번 강조했다.

 

- 평양은 살기가 어떤가요?

 

(밝은 표정으로) 평양은 공기 좋고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평양 거리에는 자동차가 많은가요?

 

자동차는 많은데 기름값이 비싸서 잘 안타고 다닙니다.

 

- 혹시 인터넷이라는 것을 아시나요?

 

모르겠습니다.

 

 

 

“체제는 그대로 두고 경제교류를 활성화 시켜야 한다”

 

- 평양에 전화 보급률은 얼마나 되나요?

 

평양에만 전화 보급률이 30~40%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휴대전화 쓰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외국에 전화도 못합니다.

 

- 평양의 주택 가격은 얼마나 하나요? 당간부들은 어디서 사나요?

 

당 간부들은 주로 고급 아파트에 거주합니다. 평양에서 일반 아파트가 3만 달러 정도 합니다.

 

- 남북 통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당연히 통일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체제는 그대로 두고 경제교류를 활성화 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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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제 분들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첫째 딸은 대학 다니다 중퇴시켰습니다.

 

- 북한은 무상교육인데 대학교 다니는데 돈이 많이 듭니까?

 

(난처한 표정으로) 학비는 들지 않으나 먹고 입히고 책값 대기가 벅찼습니다.

 

- 말씀을 들어보니 북한의 내부 사정이 생각보다 아직도 많이 어려운 것 같네요.

 

수령님만 살아계셨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장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문다)

 

 지금은 끼니는 걱정 없었습니까?

 

배급이 부족할 때는 장마당에서 쌀을 사야 합니다. 쌀 1kg에 우리 돈 1500원 정도 가격입니다.- 한달 월급이 3천원인데 쌀 1kg에 1500원이나 합니까?

 

(잠시 뜸 들이며) 물자가 귀해서 그렇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 장군님의 통치가 너무 쇄국 정책 아니냐는 목소리도…”

 

- 외국으로 나와 한국을 보니 어떤가요?

 

여기서 한국 텔레비전을 보고 한국의 실상을 보니 사실 놀랍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남조선은 헐벗고 가난한 나라로 배웠습니다. 근데 한국 정치인은 왜 맨날 싸우는 겁니까?

 

- 그게 민주주의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통치에 대한 평양 젊은이들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 장군님의 통치가 너무 쇄국 정책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이들은 투철한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끄떡없습니다.

 

- 혹시 김정일 위원장의 아들들은 외국에 거주하고 공부하는 것을 아시나요?

 

(당황한 표정으로)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인가요?

 

- (옆에 있던 중국동포가 능글거리며) 그러지 말고 그냥 중국으로 나와서 사세요. 왜 그렇게 고생하고 사시오?

 

민족의 반역자가 되기는 싫습니다. 북한에서는 사상이 투철한 사람만 정식으로 외국으로 내보내는데 얼마 전 북한에서 나온 한 여자가 또 한국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말씀 들어보니 북한은 그렇게 어려운데 체제가 계속 지속될지 궁금합니다.

 

장군님은 북한을 못 지키면 지구를 깨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나마 살게 된 것도 다 장군님덕 입니다.

 

그 말을 듣던 중국 동포가 "아 이 양반아! 당신 속은 거야. 김정일이가 다 그렇게 만든 거야. 우리 조선족들도 그간 모택동 숭배하며 결국 속아 살아온 것 아닌가"라고 소리치자 김씨는 언짢은 표정으로 노려본다. 그는 스스로 "골수 빨갱이"라고 칭했다.

 

- 자주 중국으로 나오실 수는 없습니까?

 

중국으로 나갔다 오면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됩니다. 그리고 친척방문도 3년에 한번씩으로 제한합니다. 저는 3년 후에 나와서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또 몇 년 살아갑니다.

 

김씨는 갑자기 ‘아버지가 남한 출신이다’며 혹시 찾을 수 있냐고 물어왔다.

 

- 아버지께서도 연로하신 분일텐데 과거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시지 않았나요?

 

고난의 행군시절 굶어서 돌아가셨습니다. 노인분들은 그 때 다 돌아가셨습니다.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 신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상이 투철해야 합니다.

 

김씨가 한국에서 아버지의 가족을 찾는 것은 일순 경제적인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김씨는 "남한출신 월북자들은 남한출신이라는 이유로 과거 한국의 임시 행정 기관장으로 임명되어 임명장까지 받았다"고 덧붙였다.

 

- 어떤 임명장 말씀인가요?

우리가 나중에 한국을 점령했을 때 남한출신 월북자들은 한국 사정과 지리에 밝으니 그 지역 기관장으로 임명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예전 이야기입니다.

 

김씨는 “애들을 더 공부시켜야 한다”며 자랑스럽게 두 딸의 사진을 보여줬다. 북한 사람들의 교육열도 대단해 보였다. 사진 속의 앳된 소녀들은 키가 150cm 조금 넘어 보였다.

 

- (중국동포) 딸들이 아주 곱습니다. 중국으로 시집 보내세요.

 

우리는 외국 사람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보내고 싶어도 못 보냅니다.

 

- 어떤 분은 중국으로 나와 헌 옷가지를 많이 챙겨 가시더군요.

 

이제는 옷가지 등 물품을 못 들어오게 합니다. 우리 세관에서 헌 옷은 통과 안시킵니다.

 

- 물자도 부족한데 왜 그런가요? 헌 옷은 안받겠다는 공화국의 자존심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북한에서도 중국 옷보다는 한국 옷을 더 선호합니다.

 

- 한국 옷인지 중국 옷인지 어떻게 압니까?

 

왜 모릅니까. 옷감을 만져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즘 북한의 부유층들도 중국산은 안 쓰고 한국산만 선호합니다.

 

김진표씨는 근무 중이라 시간이 없어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대화는 음식을 시키는 조건으로 가능했고 식당주인에게 잘 보이려는 김진표씨를 위해 연어회, 잡채, 파전, 우거지 갈비탕 및 볶음채를 푸짐하게 시켰다. 셋이서 배 부르게 먹고도 음식이 많이 남았다. 160위안의 계산서(한화 약 2만원)가 나왔다.

 

김씨에 따르면 중국 인민폐 10위안(한화 약 1400원)을 환전하면 북한에의 평범한 중산층 한달 수입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10위안은 중국에서 한끼 식사값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곁에 있던 중국동포의 입에서 “조선은 완전히 부도난 나라구나”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식당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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