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형유산 ‘판소리’ 5대 명창 이야기

신(新) 서편제(西便制)의 개척자, 명창 정정렬
신(新) 서편제(西便制)의 개척자, 명창 정정렬
근대 판소리 5대 명창 중 한 사람인 정정렬(丁貞烈, 1876~1938)은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판소리에 재능이 있어 그의 아버지는 그가 7살이 되자 서편제의 대가인 정창업(丁昌業)에게 판소리를 배우게 한다.
그러나 정정렬이 14세가 되던 해에 불행히도 첫 스승은 세상을 뜨고 만다. 그 후 새로운 스승을 찾아 나섰고 이날치(李捺致) 명창을 만나 다시 소리를 배우게 되지만 그가 16세가 되던 해에 두 번째 스승마저도 타계하고 말았다.
잇따른 스승의 타계로 말미암아 정정렬은 만사를 잊고 익산의 심곡사(深谷寺), 홍산의 무량사(無量寺), 공주의 갑사(甲寺) 등을 떠돌며 독공(獨工)에 들어갔다. 자신과의 싸움이라 그만큼 힘든 독공을 그는 25년간, 즉 40세가 될 때까지 지속했다.
정정렬의 독공기간이 유난히 길었던 이유는 스승과의 짧은 인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의 목이 문제였다. 정정렬의 목소리는 고음을 내지 못하는 탁한 수리성(쉰 목소리처럼 껄껄하게 내는 목소리, 떡목.)으로 소리를 하면 금세 목이 쉬어버렸다. 게다가 성량마저 부족했다. 그는 천재적 음악성은 타고났지만 가장 중요한 목은 타고나지 못했던 것이다. 소리에 미친 그가 이런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그래서 정정렬은 좌절감에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정정렬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오랜 수련을 거쳐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를 개발하게 된다. 40대에 경남 마산에서 소리 선생으로 활동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서 1924년 50대가 되어서야 뒤늦게 서울의 중앙 무대로 진출했다. 1926년에는 다시 금강산에 들어가 3년 정도 김여란에게 판소리를 가르쳤고, 1930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사망할 때까지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판소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명창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해서 판소리의 창극화를 연구하였고, 판소리 창극을 정형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현대 창극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한다.
정정렬은 중고제 소리를 물려받았는데, 그는 자신의 소리에 신식 소리를 도입해서 정정렬제 <춘향가>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춘향가를 만들겠다는 분명한 의지가 담긴 정정렬제 <춘향가>는 당시 “정정렬 나고 <춘향가>가 새로 났다.”란 평가를 받을 정도였으며,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이에 많은 제자가 그에게 <춘향가>를 배우게 되었는데, 김여란, 김연구, 이기권, 조진영, 김소희, 홍정택, 최승희 등 한국을 대표하는 이들 소리꾼들이 모두 정정렬에게 사사했다.
일화로, 1930년 8월에는 조선일보 서부지국이 주최한 ‘조선팔도명창대회’가 있었다. 여기에서 정정렬의 인기는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으며, 그는 <춘향가>의 ‘몽중가’를 불러 커튼콜을 무려 5번이나 받았다는 후문이 있다.
정정렬은 음반 취입도 왕성하게 했는데, 이 중 임방울, 박녹주 등과 함께 낸 <춘향가> 음반은 당대 최고로 꼽혔다. “춘향가는 정정렬이 판을 막아 버렸다.”라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예술성을 인정받은 명반이었다. 또한, 1935년에는 <춘향가>와 <심청전>을 창극으로 편곡해 무대에 올렸는데, 이는 당시 창극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배비장전>, <옹고집전> 등과 같은 전승되지 않은 판소리를 창극화하여 되살렸다.
정정렬제 <춘향가>는 김여란에서 최승희로 이어져 오늘날 전주 지역의 판소리를 형성했으며 익산시에서는 정정렬의 소리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국창 정정렬 추모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가 취입한 음반 중 <춘향가> 의 ‘신년맞이’, ‘어사출두’, ‘광한루 경치’ 대목 등이 걸작으로 꼽힌다.
 

이보형의 음반 이야기
정정렬은 판소리 5명창 가운데 제일 나중에 데뷔했지만,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치밀한 음악성을 구사하여 당당하게 5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좋지 못한 목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여 방울목이라는 특이한 목구성을 구사하였고, 부침새가 정교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춘향가>를 그의 절륜한 목구성과 부침새로 치밀하게 짰는데, ‘어사출도’ 대목의 복잡한 부침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가 다른 바탕에도 능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춘향가> 위주로 전할 뿐이다. 그래서 그가 취입한 대부분의 음반 중 현재 남아 있는 것도 <춘향가> 대목을 담은 것이다.
다만 <적벽가> 앨범과 <심청가> 앨범에 극소수의 그의 소리가 취입 되어 있다. 마침, <적벽가>의 ‘삼고초려’ 대목을 독립하여 취입한 것이 있어 – 게다가, 전승이 끊어진 대목이므로 – 나는 이것을 그의 대표작으로 골랐다. ‘삼고초려’는 적벽가에서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데리고 가서 공명을 포섭하는 장면을 그린 대목이다. 정정렬은 이 대목을 박진감 있게 소화했으며, 진양 우조로 위엄있게 불렀다. ‘삼고초려’ 대목만 들어보더라도 정정렬은 가히 대단한 명창이다.
• 이보형(李輔亨) : 음악인, 민속학자, 한국고음반연구회 및 한국퉁소연구회 회장

 

중고제(中高制)의 전설, 명창 김창룡
중고제(中高制)의 전설, 명창 김창룡
근대 5명창 가운데 한 사람인 김창룡(金昌龍)은 1872(고종 9)년에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장중하고 우아한 ‘진양조장단’을 창시한 김성옥(金成玉)이고, 그의 아버지는 ‘상궁접(삼공제비)장단’을 창시한 중고제(中高制) 대가(大家)인 김정근(金正根)으로, 그는 소위 판소리 명문가 출신이었다.
「조선창극사」의 기록에 의하면 김창룡은 7세부터 그의 아버지인 김정근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해 13세 때 이날치(李捺致)에게 1년간 가르침을 받은 뒤, 14세가 되자 소리가 자리 잡혔다 한다. 이후로는 계속 독공(獨工)을 하다가 32세 때 상경해 연흥사(延興社) 창립에 힘을 썼고, 1933년에는 송만갑, 이동백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소>를 만들어 후진을 양성했다.
중고제의 충실한 계승자인 그는 특히 서울의 양반계층에게 인기가 높았다. 1908년부터 ‘협률사’에서 송만갑과 함께 전국순회공연을 했고 많은 창극 활동에도 참여했다. 김창룡은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했는데, 특히 <적벽가>의 ‘삼고초려’와 <심청가>의 ‘꽃타령’, ‘수정궁(水晶宮) 들어가는데’, ‘화초타령’에 능했다.
김창룡은 그의 가문 소리라 할 수 있는 중고제 소리를 이어왔지만, 김창룡 이후로 전승이 끊어졌고 지금은 그가 취입한 음반만 남아 있는 상태다. 고졸하고 담백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의 소리는 현재 중고제 판소리연구를 하는 데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보형의 음반 이야기
명창 김창룡은 판소리의 전체 텍스트를 고려하여 전략적으로 소리를 구성한다. 그의 대표 음반으로는 <심청가>의 ‘수궁풍류’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음반의 정확한 표제는 ‘수정궁 들어가는데’로 되어 있다. 판소리에서 ‘수궁풍류’라는 대목은 <심청가>와 <수궁가> 두 마당에서 나오는데, 김창룡이 부른 것은 <심청가>의 ‘수궁풍류’이다. 여기서 ‘수궁풍류’는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 후 옥황상제가 있는 수정궁에 들어가는 대목이다.
다른 바디의 ‘수궁풍류’는 풍악을 울리는 잔치 장면이 먼저 나오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김창룡이 부른 ‘수궁풍류’는 “수궁에 들어간다.”라는 사설로 시작해 심청이 수궁에 들어갈 때 신선들이 구경하는 장면이 먼저 나오고 뒤이어 잔치 장면이 나온다. 또한, 김창룡이 부르는 ‘수궁풍류’는 다른 ‘수궁풍류’에 비해 수궁 잔치 장면이 보다 상세하게 묘사되고, 작품의 구성이 방대하다.
조학진이 부른 ‘수궁풍류’가 고제의 특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창룡의 ‘수궁풍류’에 나타난 특성은 고제로 볼 수 있다. ‘수궁풍류’는 어느 음반에서나 엇모리장단으로 되어 있다. 이 음반 역시 엇모리장단으로 되어 있는데 김창룡 특유의 목구성이 선율의 절정에서 적절히 구사되어 음악적 구성력이 뛰어나다. 이 음반은 구제 판소리의 치밀한 면을 볼 수 있는 명작이지만, 세상에서 이를 주목하는 이가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 이보형(李輔亨) : 음악인, 민속학자, 한국고음반연구회 및 한국퉁소연구회 회장

즉흥성의 대가(大家), 명창 이동백
즉흥성의 대가(大家), 명창 이동백
근대 5명창 가운데 한 사람인 이동백(李東伯)은 1876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13세 때부터 중고제 김정근(金正根)과 동편제 김세종(金世宗) 문하에서 판소리를 공부했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이동백이 8, 9세부터 13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으나 독서에는 뜻이 없고 가요에만 취미가 있어 결국 글공부는 그만두고 김정근 문하에 가서 판소리 공부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20세가 될 즈음에는 서천 희리산에서 2년간 독공(獨工)을 하였고 진주 이곡사(里谷寺)에서 3년간 공부하는 등 그는 떠돌이 생활을 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제를 구축해나갔다. 일화로, 그가 독공을 할 때 소나무 앞에서 통성을 내지르면 소나무 뿌리가 뽑힐 정도였다고 한다.
창원부사의 부름으로 <새타령>을 불러 경남 창원에서 이름을 떨치던 그는 46세 때 상경해 김창환, 송만갑 등과 원각사에서 창극 공연을 했고, 1933년에는 송만갑, 정정렬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화를 조직해 판소리 교육에 힘썼다.
이동백은 미성을 타고났고 성량 또한 풍부해 고종의 사랑을 받아 어전에서 소리를 하기도 했다. 고종은 그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함을 주었고, 순종은 그가 원각사에서 소리를 할 때면 전화통을 귀에 대고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근대 5명창 중에서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입은 명창이었다.
그는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고, 특히, < 새타령>으로 많은 인기를 누렸는데, 그의 <새타령>은 이날치(李捺致) 이후 최고로 손꼽힌다. 새소리를 그대로 묘사해내는 그의 <새타령>은 신비로움과 경이로움 그 자체다. 이외에도 <흥보가>, ‘제비 후리려 나가는 대목’, < 심청가>, ‘범피중류(泛彼中流)’ 대목이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보형의 음반 이야기
근대 판소리 5대 명창에 드는 이동백은 일제 강점기에 송만갑과 자웅을 겨룰 정도로 대단한 명창이었다. 비록 송만갑만큼 치밀하지는 못했지만 풍성한 성음과 웅대한 표출력은 당시에 그를 따를 명창이 없었다. 특히, 그는 ‘적성가’, ‘범피중류’와 같은 진양 대목에서 웅혼한 빛을 발하여, 당대 지식인들은 그를 ‘한국의 살랴핀(Chaliapin, Feodor Ivanovich: 러시아 오페라가수)’, ‘한국의 카루소(Enrico Caruso: 이탈리아 성악가)’라 불렀다.
당시 대중들은 이동백의 장기로 <새타령>을 꼽았다. 실제 공연에서 그는 아기자기한 성음으로 특유의 새 울음소리를 기막히게 구사해서 그가 부른 <새타령>의 인기는 천정부지였다. 실제 음반을 들어보면 그의 인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새타령>은 자진중중모리로 “삼월삼짇날 연자 나라들고”로 시작하여 느린중중모리로 “새가 나라든다”로 들어가는 신제(新制)와 곧 바로 자진중중모리로 “새가 나라든다”로 시작하는 구제(舊制)가 있는데 이동백은 이중 구제(舊制)로 <새타령>을 불렀다.
근대 최고의 명창, 송만갑

 

근대 최고의 명창, 송만갑

 

조선 고종 때부터 일제강점기 때까지 활약했던 송만갑(宋萬甲, 1865~1939)은 동편제(東便制) 소리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한 근대 최고의 명창이다.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읍에서 태어난 송만갑은 판소리 명문가 출신답게 판소리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13세 때에는 이미 소년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 어린 나이에 전주대사습(全州大私習)에 나가 성인들을 무색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원각사(圓覺社) 시절에는 고종의 총애를 받아 어전에서 판소리를 불렀고, 원각사 폐쇄 뒤에는 별순검(別巡檢) 직을 몇 개월 수행하기도 했다.

 

어느 날 송만갑은 서편제(西便制) 명창인 정창업(丁昌業)의 소리를 듣고는 그날을 계기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동편제(東便制)에 통속적인 소리를 보태어 부르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그는 집안에서 쫓겨나 객지를 떠돌며 소리를 하게 된다.

 

조선 말기에는 서울로 다시 올라와 김창환(金昌煥)과 함께 판소리와 창극 공연에 힘을 기울였고,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조직하여 공연과 후학양성에 힘쓰다가
향년 74세로 생을 마감했다.

 

송만갑은 판소리 다섯 마당을 두루 잘하였고, <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를 특히 잘하였다. 그가 취입한 많은 음반 중 <수궁가〉의 ‘고고천변(皐皐天邊)’, 〈춘향가〉의 ‘이별가(離別歌)’, 단가(短歌) ‘진국명산(鎭國名山)’ 등은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보형의 음반 이야기 - 송만갑과 ‘고고천변’

 

“송만갑에 대해”

 

근대 판소리 5대 명창 중 첫 번째 명창을 꼽으라면 나는 항상 송만갑을 내세운다. 송만갑은 성량이 풍부하고, 통성(판소리 창법에서, 배 속에서 바로 위로 뽑아내는 목소리)을 지니고 있으며 최저음에서 최고음까지 음의 높낮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송만갑, 박춘재(서도 소리 명창, 조선 말기 최고 명창), 최순경(서도 소리 명창)은 한국 발성의 전범으로 삼을 수 있는 명창들인데 신기하게도 이들은 공통점이 많다. 먼저 단전호흡을 하며 뒷목을 사용해서 소리를 낸다. 중국의 경극이 앞목을 사용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공명법에 있어서는 비성을 금하고 비강 공명을 하지 않는다. 서양 음악에서 두성과 비성, 그리고 공명을 많이 사용하는 것과 다른 대목이다. 또한, 성대는 활짝 열지 않고 성대끼리 마찰을 시킨다. 그렇게 하다 보면 성대결절이 생기는데 그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더 마찰을 시킨다. 결국, 결절이 떨어지면서 피를 쏟게 되는데 이렇게 된다고 해서 모두 득음을 하는 것이다. 좋은 목이 되기도 하지만 아예 목을 버릴 수도 있다. 특히, 비브라토(vibrato)는 못 쓰는 소리로 분류했다. 즉 목소리를 떨려면 제대로 떨라는 것이 이들의 소리 철학이다.

 

“송만갑과 고고천변”

 

송만갑의 소리 중 최고의 걸작은 <수궁가> 중 ‘고고천변’ 대목이다.

 

<수궁가>에서 ‘고고천변’은 자라가 토끼를 잡으려고 세상(육지)에 나와서 기막힌 세상 경치를 구경하는 대목이다. 송만갑은 ‘고고천변’을 다른 음반에도 취입하였지만 이 빅터(Victor)판 ‘고고천변’이 훨씬 훌륭하다.

 

이 음반은 역대 판소리 음반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다. 그 이유인즉 음반에 판소리를 취입한 명창 가운데 가장 기량이 뛰어난 명창이 송만갑이고, 송만갑이 취입한 수많은 음반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음반이 이 빅터판 ‘고고천변’이니, 이 음반을 지금까지 취입한 판소리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 음반에 담겨 있는 ‘고고천변’은 본디 노랫말도 기가 막히게 잘 지어지고 곡조도 잘 짜인데다가 천하 명창 송만갑이 그의 최고의 기량과 예술적 경륜으로 소리를 짜 혼신의 힘을 기울여 부른 작품이다. 더구나 송만갑은 이 대목을 우조로 불렀다. 평소 이 대목을 김창환이 평조로 부르고, 임방울이 평계면으로 부른 것과 비교해본다면 분명히 송만갑의 성음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송만갑의 ‘고고천변’은 ‘우조(가곡, 시조와 같은 정악의 선율을 판소리에서 사용한 것으로 웅장하고 호탕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남자답고 호기 넘치는 장면에서 주로 사용함)’의 정통과 성악적 기량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역대 명창들 가운데 송만갑처럼 박진감 있게 이 대목을 부른 예는 드물 것이다. 김명환 명 고수도 최고로 꼽은 송만갑의 ‘고고천변’은 유성기 음반의 중 최고의 걸작이며 지금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창(國唱) 김창환
국창(國唱) 김창환
근대 5명창 가운데 한 사람인 김창환(金昌煥)은 1855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명창 이날치(李捺致), 박기홍(朴基洪)과는 이종 간으로 어려서부터 서편제(西便制) 명창인 정창업(丁昌業)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신재효의 지도로 본격적으로 서편제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창환은 특히 발림 구사가 뛰어났는데 이는 신재효에게 음악뿐만 아니라 연극적인 요소까지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재효는 김창환제 판소리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볼 수 있다.
각종 고전에 정통했던 김창환은 조선음률협회의 회장을 맡는 등 판소리창단의 원로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했다. 또한, 각종 대회와 국악방송에 출연하여 자신의 더늠(명창이 자신의 방식으로 다듬어 부르는 대목이자 가장 잘 부르는 대목)을 불렀고, 다수의 음반을 취입하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1902년(고종 즉위 40년)에는 원각사의 주석으로 발탁되어 당대 최고의 국창(國唱)으로 인정받으며, 많은 가객과 창극공연을 하였다. 1909년 11월에 원각사가 폐쇄되자 잠시 귀향했다가 이듬해 전라도 출신의 명창들을 모아 ‘김창환협률사’를 조직해서 지방순회공연을 했다.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자 고향 집 후원에 사당을 지어 고종의 사진을 모시고 후진 양성에 매진하다가 1927년에 74세로 생을 마감했다. 김창환은 이처럼 왕성하게 예술 활동을 함으로써 당대 판소리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김창환은 시원하고 진중한 성음으로 소리를 했으며 발림을 특히 잘 구사하여 관중들을 집중시켰다. 그의 더늠으로는 <흥보가> 중 ‘중타령’, ‘제비노정기’, ‘중 집터 잡아주는데’ 등이 유명하며, 음반으로 남아 있는 그의 소리는 오늘날 서편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인다.

 

이보형의 음반 이야기. (REGAL C132-AB 흥보가 중타령(上下) 金昌煥

 

김창환은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과 더불어 판소리 5명창으로 꼽히는데 항상 그가 먼저 꼽힌다. 이는 그가 5명창 가운데 연장자로 제일 먼저 활동을 시작했으며 원각사 공연단의 수장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협률사에서 그는 언제나 출중한 용모에 멋들어진 발림으로 관중을 휘어잡았다.

 

김창환이 취입한 음반은 여럿 있는데 이 가운데 <흥보가> ‘중타령’과 ‘제비노정기’가 그의 최고 더늠으로 꼽힌다. <흥보가>의 ‘중타령’ 음반은 제목을 ‘즁타령 상하’라 하였지만 ‘중타령’뿐만 아니라 후면에는 ‘도사 집터 대목’과 ‘제비 날아드는 데’도 담고 있다.

 

‘중타령’은 동편제든 서편제든 곡조는 같다. 그러나 바로 뒤 대목에서 사설과 곡조가 서로 달라진다. 동편제 <흥보가> ‘도사 집터 대목’은 ‘박흥보가 좋아라고’로 되어 있지만 서편제 <홍보가>에서는 “간계룡 간좌곤향”으로 되어 있다. 또한, 동편제 <흥보가> ‘제비 날아드는 데’는 ‘겨울 동자 갈거 자’로 되어 있지만 서편제 흥보가>에서는 ‘유색황금눈’으로 되어 있다.

 

김창환은 이 대목을 우조와 평조로 불렀다. 지금은 평조를 평계면으로 바꾸어 부르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이면에 맞지 않는다.

 

• 이보형(李輔亨) : 음악인, 민속학자, 한국고음반연구회 및 한국퉁소연구회 회장

 

이보형(李輔亨) - 음악인, 민속학자

1935년에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김매기 소리와 세시 농악을 들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때 석암 정경태 선생에게 시조창을 배웠고, 1960년부터 1971년까지는 연세대 나운영 교수에게 서양작곡법을 배웠다. 70년대 중반부터는 김명환 선생에게 판소리 고법을, 정권진 선생에게는 판소리를 직접 배웠다. 음악뿐만 아니라 예술 다방면의 지식을 쌓기 위해 오옥진에게 서각, 여원구에게 서예 및 전각, 김영철에게 문인화까지 배우게 된다. 이후 이혜구 선생의 역저 <한국음악연구>를 접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국악 및 민속악 연구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전국을 누비며 판소리, 굿, 민요, 농악 등 우리의 민속예술자료를 채집하고 수많은 보고서와 논문을 썼으며 문화재 전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고령의 나이임에도 민속예술 연구 및 후학양성에 매진하고 있으며 한국고음반연구회와 한국퉁소연구회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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