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로 환생한 임진왜란 의병장

 영천 어서각
 영천 어서각

 
 
‘미라’로 환생한 임진왜란 의병장

 

 
영천 어서각 전삼달 장군, 임금의 친서 세 번 받았다

    
 영천 어서각의 현판이다. 경상좌수사와 황해도 병마사를 역임하면서 광해군과 인조로부터 모두 세 번에 걸쳐 친필을 받은 전삼달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854년에 건립한 집이다. 지금의 집은 1920년에 중수된 것이다.
 영천 어서각의 현판이다. 경상좌수사와 황해도 병마사를 역임하면서 광해군과 인조로부터 모두 세 번에 걸쳐 친필을 받은 전삼달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854년에 건립한 집이다. 지금의 집은 1920년에 중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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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친필 편지나 문서를 받으면 현대인들은 어떻게 할까? 자택이나 사무실 내 어딘가에 소중히 보관하거나, 아니면 좀 더 받들기 위해 액자에 넣어서 걸어둘 것이다. 더러는 접어서 책상 서랍에 그냥 넣어둔 채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마도 그런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이가 훨씬 많을 것이다.


왕조 시대에는 어떠했을까? ‘짐이 곧 국가’인 시절이었기에 임금의 친필이나 문서를 받은 중세인들은 현대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태도를 취했다. 임금(御)의 친서(書)를 받는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어서(御書)를 극진히 모시기 위해 별도의 집(閣)까지 지었다. 그런 집을 어서각이라 한다.

 

 

 

임금의 친서 받으면 ‘가문의 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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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나라 안 곳곳에 조선 시대 어서각이 남아 있다. 시대 순으로 살펴보면, 고려 말기 인물인 강순룡 등에게 내려진 태조, 영조, 정조의 어필이 봉안되어 있는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고정리의 어서각, 안성(?~1421)에게 하사된 태조의 친필이 모셔져 있는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의 어서각, 태종의 어서가 모셔져 있는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하구리 구산서원의 어서각, 성종의 어서가 남아 있는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의 어서각 등은 조선 초기의 임금이 내린 어서가 보관되어 있는 어서각들이다.


그런가 하면,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 오히려 적들을 돕고 있는 백성들을 회유하기 위해 쓴 선조국문유서(宣祖國文諭書)를 보관하고 있던 경상남도 김해시 흥동로의 선조어서각, 최규서(1650~1735)에게 내려진 영조의 어필을 보관하고 있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의 어서각, 권상일(1679~1760)이 받은 영조의 친필을 고이 모시고 있는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의 안동권씨 어서각, 장현경(1730∼1805)이 영조로부터 받은 친필을 보존하기 위해 1799년(정조 23)에 건립된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의 어서각, 신의청(1692~1792)이 받은 정조의 어서를 보관하기 위해 1812년(순조 12)에 세워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청룡리의 어서각은 조선 후기의 문화유산들이다.

 경북 영천시 금호읍 약남리 538번지에 있는 어서각의 전경. 지금 현장을 찾아가면 집 앞 공터에 새로운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탓에 주변이 좀 어수선하다. 황색 기운이 뚜렷한 지붕이 특이하고, 대문 좌우를 장식하고 있는 향나무도 눈길을 끈다.
 경북 영천시 금호읍 약남리 538번지에 있는 어서각의 전경. 지금 현장을 찾아가면 집 앞 공터에 새로운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탓에 주변이 좀 어수선하다. 황색 기운이 뚜렷한 지붕이 특이하고, 대문 좌우를 장식하고 있는 향나무도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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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칠백로 487-29(약남리 538)에도 어서각이 있다. 이 어서각은 전삼달(全三達, 1570~1632)이 창원 별장으로 있을 때(1616년) 임금이 그의 성실함을 격려하면서 상과 함께 편지를 보내온 사실과, 수사와 병마사로 재임 중(1628년) 두 번에 걸쳐 임금이 편지를 보내온 사실을 기려 후손들이 1854년에 건립한 집이다. 그 후 70년 세월이 흐르면서 어서각은 비바람에 자연스레 노후되었고, 그래서 1920년 중수(重修) 과정을 거쳤다.

 

영천의 전삼락(全三樂), 전삼익(全三益), 전삼달, 전삼성(全三省) 네 형제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의병으로 나섰다. 당시 전삼달은 우리 나이로 23세였다. 그는 1592년의 영천성 수복 전투, 경주 수복 전투, 형산강 전투, 1593년의 울산 태화강 전투, 안강 전투, 1596년의 팔공산 회맹, 1597년의 화왕산 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을 무찌르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왜적들을 무찌르기 위해 함께 의병이 된 네 형제

 


그는 1605년 조정으로부터 선무원종3등공신에 녹훈되었다. 이때 그의 맏형 전삼락은 선무원종2등공신과 예조좌랑, 작은형 전삼익은 선무원종3등공신과 봉화현감에 올랐다. 다만 동생 전삼성은 녹훈과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대문을 등진 채 뜰에서 가운데서 정면으로 바라본 어서각. 현판이 지붕 아래 한복판에 자랑스레 걸려 있다.
▲  대문을 등진 채 뜰에서 가운데서 정면으로 바라본 어서각. 현판이 지붕 아래 한복판에 자랑스레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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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달은 의병으로 참전했던 임진왜란이 끝나자 30세가 된 1599년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여 무과에 급제했으며, 1600년에는 중국 심양에 파견되어 북쪽 오랑캐를 진압하기도 했다. 전삼달은 뒷날 경상 좌수사, 황해도 병마사 등을 역임했다. 다음은 그가 황해도 병마사로 부임하면서 소감을 밝혀 쓴 한시 ‘거황해도병마절도사겸황주영목사부임시(去黃海道兵馬節度使兼黃州領牧使赴任時)’이다.


머리 돌려 북쪽 바라보며 대궐 문에 절하니(回頭北望拜君門)
평생 입은 두터운 은혜 스스로가 부끄럽네(自怍平生受厚恩)
임금 향한 붉은 마음에 수염까지 백발 되니(向日丹心鬚欲白)
가슴 가득찬 대의는 누구와 더불어 말하리(胸中大義與誰論)

 

 

인조는 1628년 8월 16일 전삼달에게 편지를 내어 “황해도병마절도사 전삼달에 이르노라. 경은 국방에 맡은 책임이 중하므로 병졸을 잘 다스려 백성을 편히 하고 도적을 막는 데 최선을 다하라. 혹 나와 독대할 일이 있으면 비밀로 하라” 하고 말했다. 그만큼 전삼달은 북방을 지키는 장군으로서 임금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시를 지어 전삼달 장군을 숭앙한 박인로, 그같은 전삼달의 장군으로서의 면모를, 전씨 가문의 네 형제들과 함께 의병이 되어 영천 일원 일본군 척결에 나란히 앞장섰던 ‘조홍시가’와 ‘태평사’의 시인 박인로는 한시를 써서 역사에 증언하였다.

 


충성스런 마음으로 의리 떨치며 나아가니(懷忠奮義啓師行)
오랑캐들 소문 듣고 진작 간담 서늘했네(虜賊聞風膽己驚)
영웅이 가는 곳에 적은 결코 없으리니(英雄所向應無敵)
국경의 티끌을 말끔하게 쓸어버리리라(西土塵埃一掃淸)

 

 영천 어서각
▲  영천 어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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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 좌수사와 황해도 병마사를 역임한 경력으로 볼 때 전삼달은 나라의 중요 장군이었지만, 남이, 김종서, 이순신 등 불세출의 무장들이 선이 굵은 문학 작품을 창작하였듯, 그 또한 앞에 인용한 것처럼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그중 가장 먼저 태어난 작품은 23세인 1593년 경주 안강 전투에 의병으로 참전했을 때 지은 ‘숙안강현음음시(宿安康縣吟飮詩, 안강현에 자며 읊은 시)’이다. 


구름 산 천리 너머 임금께서 어찌 아시리(雲山千里聖何知)
북녘 향한 이 내 가슴 밤은 길고 쓸쓸하도다(北望胸懷獨夜遲)
나라 위해 사는 군사들 크게 맹세하니(餉士東爲成一誓)
삶은 가볍고 의리는 무거워 죽음을 기약하네(生輕義重死前期)

 

 

장군은 자신의 시가 뒷날 둘째아들 전내성(全乃性)에 의해 현실이 될 줄은 생전에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전내성은 아버지 타계 3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을 맞아 삭녕(경기도 연천)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부자가 대를 이어 뜨겁게 충성한 것은 나라로서는 응당 훌륭한 귀감이겠지만 한 집안의 구성원으로서는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박인로는 다시 시를 지어 예찬했다.

 


의로운 기개 열 길 무지개처럼 뻗어오르니(義氣崢嶸十丈虹)
높게 치솟은 깃발 가을바람에 나부끼네(高牙飄拂向秋風)
이번 출전으로 응당 기린각에 오르려니(令行應上麒麟閣)
역사에 이름 드리워 영원히 전해지리라(竹帛茁名永不窮)

 

 

박인로는 ‘중국 한나라가 큰 공신들의 초상을 그려 기린각(麒麟閣)에 모셨듯이, 전삼달은 나라의 역사에 빛나는 이름으로 기록되리라’ 하고 웅변했다. 그러나 오늘날, 전삼달을 비롯한 그 형제들과 차남 전내성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영천의 어서각을 아는 사람 또한 별로 많지 않다.

타계 후 400년 가까이 지나 미라로 발견된 장군  

그 점이 안타까워서일까, 400년 가까운 긴 세월이 흐른 2008년 1월 15일, 전삼달 장군이 미라로 환생하였다. 묘소 이장 작업이 진행되는 중에 관이 10cm 가량의 송진으로 두껍게 감싸져 있는 진기한 광경이 확인되었는데, 그 안에 장군이 미라로 발견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전삼달 관련 중요 기사
1627년(인조 5) 2월 29일 : 비국이 “경상 좌수사 전삼달 등의 장계를 보건대, 병사를 뽑아 군량을 운송하는 일 때문에 왜인을 응접하는 물건을 마련하기 어렵다 합니다. 박대근 등으로 하여금 ‘서쪽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하여 조정에 일이 많아 이에 미칠 겨를이 없으니, 약속을 정해 놓고 물러갔다가 일이 결정된 다음 돌아오라.’는 뜻으로 타이르라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1628년(인조 6) 8월 16일 : 상(上, 임금)이 이르기를,
“본도(황해도)는 나라의 중요한 지역인데 장차 어떻게 성을 수비할 것인가?”
하니, 삼달이 대답하기를,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장에서 미리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성지(城池, 성곽과 성을 둘러싸고 있는 물로 된 방어 시설인 해자)와 기계 모두가 매우 여의치 않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충신의 말을 듣건대, 성랑(城廊, 성곽 곳곳에 높게 세운 마루집, 흔히 성루라 함)이 섬돌 위의 행랑과 같아서 적이 쳐들어와 화공을 할 경우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모쪼록 미리 알아서 잘 수선하도록 하라. 그리고 전부터 곤수(閫帥, 평안도와 함경도의 병사와 수사를 뭉쳐서 부른 호칭)의 책임을 맡은 자가 제대로 인화를 이루지 못해 사졸들을 무너져 흩어지게 하였으니, 통탄스러운 일이다. 모름지기 군민(軍民, 군인과 일반인)으로 하여금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위해 죽을 수 있도록 하라. 안주가 나라의 문호라면 그 다음은 황주이니 실로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 곳이다.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하는 때에 지금 그대를 발탁해 임명한 것은 다 목적이 있어서이니, 모쪼록 마음과 힘을 다하라.”
하고, 표피(豹皮, 표범가죽)·궁전(弓箭, 화살)·납약(臘藥, 청심원 등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한 약)·호초(胡椒, 후추) 등 물건을 하사하였다.
원문보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53192&dable=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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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휴일이면 가족과 더불어 각종 문화재와 함께 하여 민족의 숨결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카테고리 : 문화유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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