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술 6말과 꿩 10마리를 먹은 임금

 무열왕릉. 여름 햇살이 능을 푸르게 채색하고 있다.
▲  무열왕릉. 여름 햇살이 능을 푸르게 채색하고 있다.

 


하루에 술 6말과 꿩 10마리를 먹은 임금
[신라 천년의 비밀, 경주 고분을 찾아서 ] 무열왕릉

 
    
 무열왕릉임을 알리는 비석.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  무열왕릉임을 알리는 비석.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 경북매일 이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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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고분에 관한 취재를 시작하며 몇몇의 역사·고고학자와 관련 학문을 전공한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학계와 문화계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고분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그리고, 그 주목의 이유도 궁금합니다.”

이에 대해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이재현 조사연구실장은 아래와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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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경우는 황남대총, 원성왕릉과 함께 무열왕릉에 관한 보다 정밀한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능 주위에 비석이 세워져 있어 매장된 사람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고분이니까요.”

대다수 경주의 왕릉 인근에서는 비석을 찾아볼 수 없는 것과 달리 무열왕릉 바로 앞에는 ‘太宗武烈大王之碑(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여덟 글자를 전서체로 새긴 비석이 서 있다. 현재는 귀부(龜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와 이수(螭首·용 모양을 새긴 비석의 머리)만이 남아있고, 비신(碑身·비석의 바탕돌)은 어디론가 사라진 것으로 전해진다.

헌헌장부의 풍채에 덕망도 높았던 김춘추

바로 이 무덤의 주인인 무열왕(김춘추·604∼661)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경주 왕릉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작가 강석경의 산문집 <능으로 가는 길>에는 무열왕의 풍모와 인품에 관한 짤막한 묘사가 등장한다. 다음과 같다.

“사나이에 걸맞은 한 이름이 떠올랐다. 어려서부터 세상을 잘 다스리고자 하는 뜻을 가졌다는 사람. 풍채가 아름답고 빼어나 당나라 황제가 ‘신성한 사람’이라 칭한 이. 진덕여왕 사후에 정사를 돌볼 사람으로 추대된 알천(閼川)이 ‘덕망이 높고 두터운 것이 그만한 이가 없으니 백성을 구제할 영웅호걸’이라며 권좌를 양보한 인물…(후략)”

신라 29대 왕인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다. 모친은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고, 아내는 신라의 명장으로 삼국의 통일을 이끈 김유신의 동생 문희였다. 27대 선덕여왕 시절부터 지략과 용맹을 인정받아 외교사절로 고구려와 당나라 등을 오갔다.

무열왕은 자신의 재임기간 중에 백제를 절멸시켰는데, 그가 백제에 원한을 품었던 이유는 사위와 딸이 백제의 군대에게 목숨을 잃었기 때문. 무열왕에 대해서는 조금은 우스꽝스런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 중 하나는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김춘추는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고,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었는데 하루에 쌀 여섯 말과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

다소 과장된 듯 보이는 이 서술은 그가 ‘보통의 인간’은 아니었음을 부풀린 수사학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것으로 추측된다.

 무열왕릉. 여름 햇살이 능을 푸르게 채색하고 있다.
▲  무열왕릉. 여름 햇살이 능을 푸르게 채색하고 있다.
ⓒ 경북매일 이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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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대 진덕여왕 사후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는 51세. 당시의 의료수준과 평균연령을 감안하자면 노인에 가까웠다. 요즘 어법으로 이야기하면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고, 갖은 풍파를 온몸으로 통과한 준비된 왕”이었던 셈이다.

즉위 이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백제를 치고, 고구려까지 병합하려 동분서주했던 무열왕은 그의 아들인 문무왕, 처남인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을 불러온 삼두마차’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극적인 삶을 살았던 김춘추. 비석에 새겨진 글씨 ‘태종무열대왕지비’ 중 무열은 시호(諡號·왕이 죽은 후 공덕을 칭송해 붙인 이름)다. 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성골이 아닌 진골 출신으로 왕이 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661년. 김춘추는 왕좌에서 내려와 피와 살점이 튀는 전쟁이 없고, 아귀다툼 또한 벌일 필요가 없는 영원한 안식의 공간으로 떠났다. 갑년(61살이 되는 해)을 몇 해 앞두고서였다. 그의 유택이 바로 무열왕릉이다. <삼국유사>는 이 능의 위치를 “애공사(哀公寺) 동쪽”이라고 쓰고 있고, <삼국사기>에는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파란만장한 생애… 거대한 고분 속에 잠든 무열왕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
▲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
ⓒ 경북매일 이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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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20호로 지정된 무열왕릉의 위치를 현대식 주소 표기법으로 적으면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842번지’. 기사의 서두에 등장하는 태종무열왕릉비는 국보 25호다.

무열왕릉을 찾아가던 날은 여름 날씨답지 않게 제법 서늘한 바람이 가끔 불어왔다. 그 바람에 묻어 있는 솔숲의 향기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한 쌍의 연인이 능 주위에 세워진 비석의 한자를 읽으며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 천천히 주위의 고분들까지 꼼꼼히 둘러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젊은이들이 역사에 무관심하다는 건 어쩌면 지독한 선입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기자의 머릿속을 스쳤다.

선도산 동쪽 능선의 끝머리. 무열왕릉과 마주했다. 거기서 서쪽을 바라보면 또 다른 거대한 고분 4기를 확인할 수 있다. 연인들이 한참을 돌아보던 서악동 고분군이다. 이근직의 저서 <신라왕릉 연구>는 무열왕릉의 외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봉분의 높이는 약 8.7m, 봉분 직경은 36.6m, 봉분의 둘레는 112.2m이며, 봉분 언저리에 약 1m의 괴석으로 된 호석과 이에 기댄 받침석을 돌렸다. 호석에 기댄 받침석은 봉분자락에 10개가 노출돼 있는데, 최소 간격으로 배치된 경우는 80cm 내외다.”

이 책에는 태종무열왕릉비에 관한 설명도 간략하게 덧붙여져 있다. 이런 대목이다.

“비석의 글은 당대의 명필이자 무열왕의 둘째아들인 김인문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양각된 여덟 글자로 인해 무열왕릉은 신라 역대 능묘 중에 피장자(묻혀 있는 사람)가 명확한 능이 됐다. 무열왕릉 귀부와 이수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신라에 발현된 것이나, 조각의 정교함과 화려함에 있어서는 당나라의 것들을 능가하였다.”

많은 이들은 상상한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인 왕으로 살았던 사람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러나 과연 그럴까.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목숨이 걸린 외교담판을 시시때때로 벌였고, 딸이 자신보다 먼저 죽는 참척(慘慽)의 슬픔까지 겪어야 했다. 왕위에 올라서도 자신의 백성을 위해 다른 나라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했던 것은 또 어떤가.

‘신분과 지위가 사람의 행복을 좌우할 수 있을까’라는 존재론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무열왕릉 주변을 한참 동안 서성였다. 그 고민의 공간으로 다시 한 조각 바람이 불어왔고, 푸르게 돋아난 왕릉의 풀들은 무심한 듯 흔들리고 있었다.

 금척리 고분군. 거대한 봉분들 주위로 이름 모를 풀들이 우거졌다.
▲  금척리 고분군. 거대한 봉분들 주위로 이름 모를 풀들이 우거졌다.
ⓒ 경북매일 이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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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풍문’ 속에 존재하는 금척(金尺)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 그 안과 밖을 모두 공개한 유적은 인간의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그러나, 그 옛날 우리가 알 수 없는 내밀한 사건이 일어나던 공간을 바라보며 상상력의 나래를 펼칠 여지는 빼앗아간다. 이것은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의 오래된 딜레마다.

경주시 건천읍에서 경주 시내로 향하는 국도. 그 길을 달리다보면 많은 이들이 깜짝 놀랄 광경이 펼쳐진다. 도로 양편으로 40여 기의 거대한 고분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몇몇 고분은 그 규모가 일반인의 무덤 100배를 넘어서는 크기.

인근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이 지역을 ‘금척리’라 불렀다. 고분 중 하나에 금척(황금으로 만든 자)이 묻혀있다는 전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금척리 고분군(사적 43호)의 봉분은 신라 초기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간에 알려지기 전 이미 허물어져 있던 2개의 고분은 1952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조사됐다. 그 결과 고분의 형식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인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서는 세환식 금귀고리 1쌍, 곱은옥(반달 형태로 옥을 깎아 끈에 꿴 장식품), 철편과 토기 등이 출토됐다.

이 지역 고분과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전설이 떠돈다.

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신라시대. 평민이 우연한 경로를 통해 얻게 된 금척을 왕에게 진상한다. 금으로 만든 이 자에는 신비한 힘이 있어 어떤 병이라도 낫게 했고, 심지어 죽은 사람을 되살리기도 했다고 한다. 당연지사 금척은 신라의 국가적인 보물이 됐다.

풍문으로 이 사실을 전해들은 당나라가 욕심을 부렸다. “사신을 보낼 터이니 금척을 내 놓으라”고 협박한 것이다. 이 요구를 받아들일 수도, 함부로 묵살할 수도 없었던 왕은 궁여지책으로 고분을 급조해 금척을 거기에 숨긴다. 여기에 더해 어느 고분에 금척이 묻힌 것인지 알 수 없도록 주위에 40여 개의 봉분을 더 만들었다.

금척리 고분군은 이러한 약소국의 슬픈 역사 속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지혜를 발휘해 보물을 뺏기지 않은 그 왕이 누구였는지, 금으로 된 자를 왕에게 올린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설과 풍문 속에 존재했던 신라 왕의 금척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역사적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발굴이 완료돼 그 비밀을 속속들이 세상에 내보인 고분 이상의 매력을 가진 금척리 고분들. 마흔 개의 커다란 봉분은 오늘도 한가로운 국도에 변함없이 서서 지나는 이들의 관심과 애정을 기다리고 있다.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이다.

원문보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32279&dable=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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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 문화유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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