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 환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연극 <에쿠우스>와 <신의 아그네스>의 계보를 잇고 있습니다. 에쿠우스가 순수한 사춘기 소년, 신의 아그네스가 순진무구한 처녀의 광기 아래 감춰진 무의식의 세계를 탐험했다면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브라이언 요키 작, 톰 킷 작곡)은 그런 아들과 딸을 둔 중산층 중년여성의 광기 이면에 숨겨진 정신세계를파고듭니다. 세상풍파에 물든 아줌마의 정신세계가 소년 소녀의 정신세계보다 더 녹록하지 않는 법. 이를 연극도 아닌 뮤지컬로 소화해냈다는 것이 ‘평범함의 언저리’라는 제목을 지닌 이 작품의 비범함입니다.
여주인공 다이애나의 가정은 겉보기엔 완벽합니다. 헌신적인 건축설계사 남편 댄((남경주, 이정열)과 잘생기고 유머러스한 열여덟 아들 게이브(최재림, 한지상), 똑똑하고 야무진 열여섯 딸 나탈리(오소연). 문제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다이애나가 철저히 무능한 존재라는 점입니다. 그는 16년째 조울증과 과대망상증에 시달리는, 마음이 아픈 여자입니다.
그로 인해 다이애나의 가정은 속으로 골병이 깊게 들었습니다. 남편은 호전됐다가 악화되기를 반복하는 아내의 병 때문에 지치고 외롭습니다. 딸은 정신병 치료를 위해 약쟁이가 된 엄마로 인한 애정결핍으로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는 욕쟁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아들만이 엄마를 이해해주고 달래줄 줄도 아는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바로 거기에 함정이 숨어있습니다.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그 무엇은 혼자만의 환상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환상을 제거해버리는 순간 현실 전체가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다이애나가 봉착한 문제의 본질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겉으로나마 완벽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먹기 실어도 삼켜야하는 약물은 반대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그 환상의 배설물입니다. 따라서 환상에 취해 사는 한 약물 역시 필수불가결합니다.
이 뮤지컬의 비범함은 환상의 그 대칭적 이중구조를 꿰뚫고 있다는 점입니다. 1막이 그 환상의 달콤한 약효를 보여준다면 2막은 그 부산물로서 약물과 전기충격치료(ECT)의 쓰디쓴 후유증을 보여줍니다. 1막에서 표면적 갈등구조를 보여주는 주요 테마곡이 2막에선 그 갈등 아래 숨은 심층구조를 드러내는 노래로 변주됩니다.
미장센도 이렇게 겹겹이 구조화돼있습니다. 다이애나를 중심으로 때론 남편 댄과 아들 게이브, 때론 댄과 정신과의사, 때론 아들 게이브와 딸 나탈리의 겹겹의 대칭구조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엄마 아빠의 쓰라린 옛사랑의 회상은 딸 나탈리와 그 남자친구 헨리(이상민)의 가슴시린 풋사랑과 대위법적으로 전개됩니다. 그래서 독창으로 시작한 노래는 이중창, 삼중창, 사중창, 육중창으로 확산됩니다.

과거의 상실감과 딸에 대한 죄채감에 시달리는 엄마(박칼린)와 그런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박탈된 모성애에 대한 좌절감이 교차하는 딸(오소연)의 복합구조로 현대여성의 상실감을 포착한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뮤지컬은 이런 중층구조를 통해 다이애나 가족의 문제는 미국 중산층이 안고 있는 보편적 문제로 공감대를 넓혀갑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과 죄의식을 감춘 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려 애를 쓰지만 그럴수록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만 안겨주고 마는 사람들. 그렇게 미국 중산층 가정의 치유될 수 없는 상실감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진정한 계보는 로버트 레드퍼드가 감독한 영화 <보통사람들>(Ordinary People1980)에서 찾아야할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은 큰아들을 잃은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엄마(매리 타일러 무어)와 그 형을 죽였다는 자책감으로 자살충돌에 시달리는 막내 아들(티모시 허튼)의 갈등구조를 통해 냉전시대 미국 중산층의 상실감을 가슴 시리게 그려냈습니다. <넥스트 투 노멀>은 이를 살짝 비틀어 탈냉전시대 심화된 미국 중산층의 상실감을 포착합니다. 과거의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환상 속에 사는 엄마의 죄책감과 “평범함 같은 것은 안 바래. 그 주변 어디만 돼도 견딜게”라는 딸의 좌절감이 나란히 병행하는 보다 중층의 갈등구조로.
그렇다고 다이애나가 미국 중산층 여성만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이애나에겐 진짜 현실을 외면한 채 드라마와 영화 속의 ‘환상 속 그대’에 취해 사는 이 땅의 수많은 여성들의 모습도 투영돼있습니다. 프로작과 재넥스, 발륨 같은 신경안정제 중 하나를 고르는 다이애나와 현빈과 원빈을 놓고 누가 더 매력적인지 논하는 한국 야줌마들이 놀랍도록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감사하게도 뮤지컬은 한국의 드라마와 달리 뻔한 해피 엔딩으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다이애나는 약을 쓰레기통속에 처박으면서 환상과 싸우기 위해 눈물겨운 홀로서기를 택합니다.
그렇다고 음울하지도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어설픈 자기연민의 거품을 걷어내고 스스로를 풍자할 줄 아는 어른스러움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록과 컨트리, 재즈를 넘나드는 강렬한 비트의 음악과 3층 높이(6.8m)에 960개의 조명을 장착한 독특한 철골구조물 무대도 이런 세련된 무대미학을 뒷받침해줍니다. 열두 개 공간으로 분할된 이 무대 곳곳에 배치된 7명의 밴드와 6명의 배우가 유기적으로 빚어낸 역동성과 입체성이야말로 이 작품의 비장의 무기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이내나 역으로 뮤지컬 주역으로 첫 데뷔한 박칼린 씨는 정확한 발성과 여유 넘치는 연기로 일반의 우려를 불식시킵니다. 같은 역을 맡은 일본 뮤지컬 전문극단 시키 출신의 베테랑 김지현 씨에게 결코 밀리지 않습니다. 김지현의 다이애나가 좀더 가녀린 느낌이 강하다면 박칼린의 다이애나는 좀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느껴질 뿐.
:i: 내년 2월12일까지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6만~9만 원. 02-744-4033





기자님 ! 유주 입니다^^ 서울 공연이 끝나고 바로 안산에서 이 작품을 합니다(2012년 저의 첫 담당 공연 입니다 ^^) 페이스북에 퍼갈께요.. 공연을 보고 느꼈던 깊은 생각들이 이 글 하나에 다 정리되어 있는 듯 합니다!!!
흠흠…처녀가 중년 애엄마 이야기에 너무 심취한 거 아니에요?^^
ㅎㅎㅎㅎㅎㅎㅎㅎ 기사를 조금 압축해서 전당 트윗에도 곧 올리려구요~ 조만간 따뜻한 카페라떼로 답례를 하것습니당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