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붕우언(大鵬寓言)과 혜자(惠子)

[이 글은 제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장자철학재독해> 중 {소요유-6}과 관련한 참고 해설입니다.]

<장자(莊子)> 내편(內篇)의 처음 부분이

소요유(逍遙遊)인 것은 곽상이 주석서를 편찬하고 난 이후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 원래부터 소요유가 맨처음에 나오는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으나,

어쨌든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장자(莊子)>는 소요유(逍遙遊)편부터
시작하고 있으며,

그 소요유편은 붕(鵬)이라는 새가 구만리 창천에 날아올라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황당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왜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나오는지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어쩌면 장자 자신말고는 아무도 없는지도
모를 일이긴 합니다.

후대의 학자들이 이리저리 그 뜻을 헤어려 보지만, 그건 그냥
해석들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는 여지가 없지는 않고

그 때문에 여러 해석이 나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단, 붕(鵬)이라는 새 이야기는 우언(寓言)에 속합니다.

우언이란 이솝 우화와 같은 우화입니다.

<장자(莊子)>의 잡편(雜寓)의 우언편(寓言篇)에는 "우언십구(寓言十九)"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장자의 말 중 열의 아홉은 "무엇인가를 빗대서 한
말", 즉 우언이라는 것입니다.

우언은 "정작 하고 싶은 말을 돌려서 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더 쉽고 명확하게 이해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진의가
무엇인지 난망해지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소요유에 있는 대붕우언(大鵬寓言) 역시 그러합니다.

아니, <장자(莊子)>에 있는 그 어떤 다른 우언보다도 이
우언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편에 속합니다.

소요유를 다 읽고 여러 번 생각해 보면, "이런 저런 뜻일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자신이 안 생길 수도
있지요.

 

잠시 소요유편을 벗어나

<장자(莊子)>의 외편(外篇) 중 추수편(秋水篇)으로 넘어가보면,
좀더 구체적인 차원에서

대붕우언(大鵬寓言)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나오긴 합니다.

추수편 마지막 부분에 있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혜자(惠子, 본명은 惠施)가 양(梁)나라 재상일 때 장자가 그를
만나고자 했습니다.

장자와 혜자는 서로 논쟁을 주고 받았던 사이이고,

<장자(莊子)>란 책에서는 장자가 혜자에 대해
비아냥대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긴 합니다만,

그 둘은 꽤 막역한 친구 사이[혜자가 죽자 장자는 말상대가 없어서
허전해 하였다고 합니다]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장자는 그저 친구를 만나보기 위해 양나라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혜자의 측근 중 한 사람이 혜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자는 당신을 대신하여 재상이 되려고 온 것입니다!"

당시 장자가 세상에서 아주 크게 인정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몰라도 그가 어느 정도 현명하다는 소문은 있었던 터이고,

그 때문에 몇몇 나라에서 장자를 재상이나 관료로 등용하고자
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

특히 혜자는 장자가 박식하고 현명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죠.

이에 혜자는 두려움을 품고, 사람들을 풀어서 사흘 밤낮으로
장자를 수색하였다고 합니다.

허나, 그 전에 장자가 먼저 혜자 앞에 나타나, 혜자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남쪽에 새가 있고 이 이름을 <원추>라고 하는데,
자네는 알고 있나? 원추는 남해를 출발하여 북해로 날아가지만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무르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예천>이란 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네. 이 원추가 날아가자 올빼미 한 마리가 썩은 쥐를 입에 물고 있다가
꽥 하고 소리를 쳤다네. 혹시라도 원추가 자신의 썩은 쥐를 빼앗아 먹지 않을까 염려해서지."

 

추수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대붕우언과 매우 유사한 이야기입니다.

단, 북에서 남으로 날아가는 대붕과는 달리 원추는 남에서 북으로
날아가긴 합니다.

북이든 남이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지요.

또한 그 새를 붕이라고 불러도 상관없고 원추라해도 상관은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올빼미와 같은 작은 새가 원추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자기 것"을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죠.

윗글에서 "썩은 쥐"는 물론 "재상자리"입니다.

장자의 눈엔 그게 단지 "썩은 쥐"에 지나지 않는데,
혜자는 혹시라도 그 자리를 장자에게 빼앗길까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장자에게 중요했던 것은 "높은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노자한비열전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초나라의 위왕이 장주가 현인이라는 말을 듣고 예물을
후하게 보내며 그를 재상으로 맞으려 하였다. 위왕의 사자가 장주를 찾아오자, 장주가

사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천금은 막대한 금액이고 재상은 존귀한 지위다. 그런데
그대는 제사에 희생되는 소를 보지 않았는가. 그 소는 수년간을 소중히 사육되어
자수무늬가 있는 비단옷이 입혀져 태묘(太廟)로 끌려들어 간다. 이 때를 당해서 희생으로
죽기 싫다고 하여 새끼돼지가 되겠다고 하더라고 어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속히
돌아가시오.>"

 

장자가 살았던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여러 제후들이 오로지
전쟁과 부국강병에만 골몰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면서도 자신의 영광을 드높이는데만 골몰하였던
시대입니다.

그와 같은 제후들의 업적을 위해 무수한 백성들이 희생되었을
정도라면,

재상이든 고관대작이든 -좀더 편하고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희생되기는 마찬가지일 수도 있죠.

 

장자철학의 궁극적 목적은 백성들이 두루 편히 쉬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재상 자리는 그것에 비하면, "썩은 쥐"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소수"만의 이익을 위해 결국 "이용만
당하는 재상자리"라면 더 그렇겠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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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逍遙遊)-6

蜩與鷽鳩 笑之曰 [조여학구
소지왈]

 

 

매미와 어린 비둘기가 붕(鵬)을 비웃으면서 말하였다.

我決起而上 搶楡枋

[아결기이상 창유방]

 

 

우리는 힘껏 날아도 느릅나무와 박달나무에 부딪힌다.

時則不至 而控於地而已矣

[시즉부지 이공어지이이의]

 

 

때로는 거기에조차 도달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한다.

奚以之九萬里而南爲

[해이지구만리이남위]

 

 

어찌하여 저 새는 구만리를 날아올라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일까?

[世經評解]

중국 진(晋)나라[춘추시대가 아니라 위진남북조시대의 진, 동진(265-316), 서진(317-419)]

시대의 곽상(郭象, 252?-312)은

<장자(莊子)>에 대한 주석서를 처음으로 편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을 <내편>, <외편>, <잡편>의 총 33편으로 정리한 사람입니다.

원래 <장자(莊子)>는 그와 같은 편제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원래 모습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곽상본이 현존하는 최고본(最古本)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곽상의 주석본 이전 <장자(莊子)>의 본모습에 대한 다른 기록들이 있지요.

사마천(司馬遷, BC145?-BC86?)의 <사기(史記)> 열전(列傳) 중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을 보시면,

장자(본명 莊周)에 대한 짧은 전기가 있는데,

<장자(莊子)>는 총 10만자로 되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곽상이 주를 단 <장자(莊子)> 33편은 5만여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편, 반고(班固, 32-92)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장자(莊子)>가 총 52편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역시 곽상이 주를 달기 전보다 많지요.

곽상의 장자주석은 당시의 신분질서를 옹호하는 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위 문장들에 대한 곽상의 해석은 약간은 그런 투입니다.

즉 매미와 어린 비둘기는 자신의 역할과 처지에 만족해야 하고,

대붕은 대붕대로의 역할이 있다는 투이지요.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다분히 플라톤주의적이며, 기능주의 사회학적
해석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하지만, 전에도 잠시 언급했던 중국 명나라 때의 승려 감산(憨山)의 해석은 곽상과
다릅니다.

동시에 김충렬 선생의 해석도 곽상의 해석과 다르며, 저 또한 다릅니다.

그 경우, 붕(鵬)은 대지(大知)에 대한 비유이고,

매미와 어린 비둘기는 소지(小知)에 대한 비유로 해석됩니다.

이는 위에 제시한 문장 다음에 나오는 문장들과도 상통하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에 쓰게 될 <소요유-7>, <소요유-8>에 소개하겠습니다.]

물론 곽상의 해석도 나름 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와 같은 해석 역시 <장자(莊子)>의 나머지 부분과 일치되는 면이 없지는 않지요.

가령, 두루미가 도마뱀에게 “너에게 최고의 집을 지어주겠다”면서

두루미가 사는 집 중 최고의 집을 지어준다면 도마뱀은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

즉 천지만물은 각자의 본성에 맞게 살도록 되어 있으며

어떤 하나의 입장에서 다른 입장에게 억지로 이를 강요하면 다른 입장은 죽게 됩니다.

하지만, 곽상의 해석에 일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위 문장은 곽상처럼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긴 합니다.

매미와 어린 비둘기가 붕(鵬)을 비웃는 것은

가령 도마뱀이 두루미를 비웃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죠.

오히려 이는 마치 어린 아이가 어른을 비웃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것입니다.

혹은 평생토록 한 곳에서만 살고 극히 제한된 사람들과만 접촉한 사람이 여러 지방을 둘러보고 온 사람을 비웃는 것과 같지요.

물론 어린 아이도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수 있고 또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처지에서는 세상 풍파를 겪은 어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언젠가는 어른이 되어야만 할 어린 아이의 경우,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아이와 같은

처지를 유지하며 어린 아이의 행복만을 누릴 수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붕(鵬)은 어린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될 때

겪게 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즉, 鯤의 상태)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인데,

아직 곤(鯤)의 상태도 경험하지 못한 어린 아이는 붕(鵬)이

왜 저런 짓을 하고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이라고 해석합니다.

붕(鵬)의 행위는 일종의 시대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며,

한 사회가 겪는 여러 가지 모순을 극복하고 그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어떤 대안을

모색하는 것과 연관되는데, 어린 아이처럼 오로지 자기 한 몸과

자기 주변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경우엔 그런 것들이 왜 필요한지조차

알 수 없기 마련일 것입니다.

 

 

* 참고1 : 학구(鷽鳩)는 "어린 비둘기"를 뜻합니다.

* 참고2 : 창(搶)은 "빼앗다" 혹은 "부딪히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부딪히다"는 뜻이 되겠지요.

* 참고3 : 해(奚)는 "어찌 해"자로 "어찌 무엇무엇한가?"라는
식의 의문문을 만들 때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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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逍遙遊)-5

且夫水之積也 不厚 則負大舟也 無力

[차부수지적야 불후 즉부대주야 무력]

생각컨대, 물이 충분히 고이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복배수어요당지상 즉개위지주]

잔 속의 물을 움푹 팬 곳에 부으면 그 물에서 겨자씨는 배가 될 수 있으나,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

[치배언즉교 수천이주대야]

 

그 물에 잔을 띄우면 가라앉는다.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風之積也 不厚 則其負大翼也 無力

[풍지적야 불후 즉기부대익야 무력]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붕(鵬)의 큰 날개를 띄울 수 없다.

故九萬里 則風斯在下矣

[고구만리 즉풍사재하의]

 

그러므로 구만리 창공을 날려면 먼저 그 밑에 바람이 충분해야 한다.

乃今培風 背負靑天

[내금배풍 배부청천]

 

그 바람에 의지하여 푸른 하늘을 등진 채,

而莫之夭閼者 而後 乃今將圖南

[이막지요알자 이후 내금장도남]

 

큰 걸림돌이 없게 된 후에야 붕(鵬)은 남쪽으로 날아간다.

[世經評解]

위 원문에는 붕(鵬)이란 말이 없는데도,

제가 번역하면서 붕(鵬)이란 주어를 넣었습니다만, 그게 들어가야 더 자연스럽습니다.

혹시라도 앞의 글들을 보신 분들은 왜 그런지 이해하실 겁니다.

이 구절에서는 붕(鵬)이 구만리 창공을 날아 남쪽으로 날아갈 수 있는

조건(條件)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를 효과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물이 충분하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는 비유를 들기도 했습니다.

붕(鵬)이 높이 날아 멀리 갈 수 있는 조건은 충분한 바람입니다.

앞 글(소요유-3)에서 저는 “6월의 바람”이

대붕(大鵬)이 날 수 있는 조건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참고로, 한국 내 중국철학의 대부인 김충렬 교수는 “6월의 바람”이라는 해석을 부정합니다.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六月息의 息은 바람이 아니라 휴식입니다. 그리고 6월은 계절이 아니라 기간이라고 해석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데에는 그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대체로 그럴 듯 하기는 합니다. 그분의 설명을 이 자리에서 장황하게 풀어놓기는 어렵고, 대신 예문서원출판사에서 1995년에 출간된 <김충렬교수의 노장철학강의>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 책의 263페이지에 있습니다. 제 의견은 김충렬 교수와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바람, 그것도 몸집과 날개가 삼천리나 되는 대붕(大鵬)을

구만리 창천으로 띄울 수 있는 충분한 바람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장자(莊子)를 처음 본 시기가 20년이 다 되었고,

그 기간 동안 거의 십 수 번이나 이 책을 뒤적거리고 그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도,

아직까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신 이 책을 읽을 때마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추정을 한 바 있고,

그와 같은 추정들은 역시 읽을 때마다 매번 달라져 오기는 하였습니다.

그 바람의 의미에 대한 저의 가장 최근의 추정은

“대붕(大鵬)을 띄울 수 있는 바람은

천지만물이자 뭇사람들과의 화통(化通)”이라는 해석입니다.

사람이 좁은 소견과 여러 가지 편견, 그리고 아집에 머무르면, 천지자연과도

뭇사람들과도 화통(化通)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不通의 결과)는

남을 해쳐서라도 자신의 부(富)와 공명을 늘리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증가로 이어지고, 결국 끊임없는 피로와 두려움, 미움과 원한, 오만과 자기모멸,

더 나아가 때때로 비참한 전쟁과 학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대붕(大鵬)이 구만리 창천을 날아 남명(南冥)으로 날아가고자 하는 것은

어떤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픈 욕망(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연과 뭇사람들과의 화통(化通)을 통해 대자유(大自由)와 함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혼자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망상입니다.

행복은 늘 타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뭇사람들을 껴안고 만물과 어우러져야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남을 무시하거나 두려워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쓸모없는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를 구별하느라 분주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존재라는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면,

경쟁심과 자기우월감으로 보잘 것 없어 보였던 사람들의 참된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면,

그 조건에서는 붕(鵬)이 날아오를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참고1: 요당(坳堂)은 움푹 들어간 공간을 뜻합니다. 坳(요)자는
凹(요)자와 통용될 수 있습니다.

* 참고2: 芥(개)는 겨자를 뜻합니다.

* 참고3: 膠(교)는 아교(阿膠), 교착(膠着)이란 말에서의 그
교자이며, "붙을 교"자입니다.

            배처럼
띄운 잔(杯)이 바닥에 붙으면, 가라앉는 것과 같겠지요.

 *참고4: 夭閼(요알)은 막힘이나 장애를 뜻합니다. 요절이라
할 때의 夭(요)이고, 알력이라 할 때의 閼(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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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逍遙遊)-4

野馬也 塵埃也 生物之以息相吹也

[야마야 진애야 생물지이식상취야]

 

아지랑이와 티끌은 생물이 호흡으로 뿜어내는 것이다.

 

天之蒼蒼 其正色耶 其遠而無所至極耶

[천지창창 기정색야 기원이무소지극야]

 

하늘의 푸르름은 원래 그 색일까? 아니면, 너무 멀어 끝간데가
없어서(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일까?

 

其視下也 亦若是則已矣

[기시하야 역약시즉이의]

 

하늘에서 내려다 보아도 또한 이와 같을 뿐일 것이다.

 

 

* 참고1 : 야마(野馬)의 액면상의 의미는 ‘들의 말’ 혹은 ‘야생마’이겠지만, 아지랑이라는
뜻도 있다는군요.

* 참고2 : 耶(야)는 의문문을 만들 때 붙이는 어조사입니다.

* 참고3 : 위 문장 맨 뒤의 已矣(이의)는 "무엇무엇할 뿐이다 혹은 따름이다"라는
뜻입니다.

            때때로
이이의(而已矣)가 쓰이기도 하는데, 논어나 맹자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世經評解]

 

장자를 보다가 이 구절에 이르렀을 때,

혹시라도 이 부분이 착간(簡)이 아닌가 의심했던 적도 있습니다.

[착간이란 옛날 종이가 없던 시절에 죽간으로 된 책의
줄이 끊어져 버려졌다가 후세에 발견되어 다시 이을 때

종종 죽간의 앞뒤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를 뜻하는데,
현재 남은 고전들의 일부 내용은 착간으로 의심되는 것들이 없지 않지요.]

 

하지만, 전에 살펴본(소요유3 참조) 문장들에서 붕(鵬)이 구만리 하늘에 떠 있는
상황을 상기해 보면,

이 문장들이 앞서 언급된 내용과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만리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보면,

나무도, 집도, 사람도 모두 티끌이나 먼지 혹은 아지랑이처럼 보이겠지요.

그러나, 그 먼지나 아지랑이가 생물의 호흡으로 뿜어진 것이란 문장의 의미는 아직도 잘
모르긴 합니다.

[오죽했으면, 착간이라고 의심하기까지 했겠습니까?]

굳이 대강 이해하자면,

먼 하늘에서 바라볼 경우엔 지상의 아무리 커다란 사태도 마치 생물들이 뿜어대는
입김 같은 것으로 보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선 대충 넘어가더라도 그 다음 문장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의 푸르른 색깔은 원래의 색깔일까?"라는 질문은 충분히
이해될만 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멀리서 본 것과 가까이서 본 것은

그것이 똑같은 대상이라 할지라도 각각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만약 구만리 하늘 위에서 지상의 뭔가를 내려다본다면, 그것은 지상에서 바라볼
때와 같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시각을 달리하거나 어떤 체험에 의해 관점이 바뀌면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일차적으로는 혼란이 오고 그 다음으로는 의심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남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하늘의 푸른 색깔을 의심해 보듯이 말이죠.

 

구만리 상공에 떠 있는 붕(鵬) 역시

지상의 생물들이나 낮게 나는 다른 새들의 시각과는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경우 거의 필연적으로 지상에서의 관점이 과연 당연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회의하는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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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逍遙遊)-3

齊諧者 志怪者也

[제해자 지괴자야]

 

"제해"라는 책은 괴이한 일을 기록한 책이다.

 

諧之言曰  

[해지언왈]

 

이 책에서 말하기를,

 

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붕지사어남명야 수격삼천리]

 

붕(鵬)이 남명으로 옮겨갈 때 물이 삼천리나 솟구친다고 한다.

 

搏扶搖而上者 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

[박부요이상자 구만리 거이유월식자야]

 

이 새는 날개로 물을 쳐내고 그 반동에 의지하여 요동을 치며 구만리를 날아올라
6월의 바람을 타고 간다.  

 

 

 

* 참고1 : 제해(齊諧)라는
책은 "제"나라의 "해"라는 책이겠지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책입니다.

 

 

[世經評解]

 

중국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과장된 표현을 즐겨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이 문장에서도 삼천리, 구만리 같은 표현이 나왔는데,

이는 앞서 곤과 붕의 몸의 크기가 삼천리란 표현과 마찬가지로 과장이겠지요.

이 중 삼천(三千)은 "많다", "크다"는 형용을 하기 위한
것으로, 중국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는 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식객(食客)이 삼천(三千)이다"라는 표현이 자주 발견되고,

불경을 한자로 번역하면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란 번역어가 만들어졌으며,

이백(李白)의 시(詩) 중에는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란
표현[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이 나오기도 합니다.

 

위 문장에서는 붕(鵬)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다소(혹은 꽤) 힘들어보인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날개로 삼천리 파도를 일으키면서 그 반동으로 겨우 날아오르는 느낌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즉 매우 장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제가 앞에서 곤(鯤)의 의미를 해석한 것은 이렇게 힘들게 붕(鵬)이 되어
날아가는 이미지와 어느 정도 결합됩니다.

기존의 상식에 회의를 품고 그 상식의 토대를 넘어서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까딱하면 철저한 외토리가 되거나 때때로 정신병자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그와 같은 위험성을 감수하고 주어진 자신의 상황을

정면돌파하고자 하는 붕(鵬)의 모습은 마치 그 날개로 삼천리의 물을 솟구치게
하고 구만리를 날아오르는

것 같은 장중함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6월의 바람을 타고간다는 의미는 여전히 애매모호한 의미로 다가오기는 하지만,

대략적으로는 "붕이 날아오를 수 있는 조건"의 하나로 간주됩니다.

1년 중 6월은 만물이 본격적으로 생장하는 시기로, 이 시기가 아니면 붕이 날아오르기
힘든 시기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간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생장하는 시기는

대체로 "여기저기서 여러 의론(discussion, 혹은 담론 discourse)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일 수도 있습니다.

장자가 살았던 시기는 이른바 "제자백가"의 시대였습니다.

즉 여기저기서 세상살이에 대한

여러가지 의론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미 기존의 상식이 크게 흔들리는 세상이었지요.

다만 여러가지 의론들이 쏟아져 나오긴 하지만, 그것들이 모두 따로따로 각개전투하고
서로 부딪히기만 하였습니다.

만약 그 갖가지 의론들을 관통할 수 있는

광대한 시각(어떤 의미에서 그 모든
것을 엮을 수 있는 혹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이 나온다면,

그것은 마치 대붕이
날아오르는 모습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전 글을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소요유-1[/brothering/18785]

소요유-2[/brothering/19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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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3,700페이지 분량의 <그리스 로마 인명 신화 사전>이 인터넷상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이 사전의 제목은 <A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이고,

1849년에 윌리엄 스미스(William Smith) 주도 하에 총 3권으로 발간되었으며,

총 35명의 학자가 집필 및 수정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인터넷상에는 필름판, PDF판, 그리고 텍스트판을 선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텍스트판의 내용은 앞의 둘과 다릅니다.

 

<Making of America Books>라는 싸이트(http://www.umdl.umich.edu/ for more information)에

들어가신 다음, 위 영문제목을 입력-클릭하시면 전문(full-text)검색이 가능합니다.

같은 제목으로 몇 개가 뜨는데, 두 번째의 것이 온라인으로 개방된 것입니다.

각 권의 앞 부분에 있는 리스트를 출력하신 다음,

그 리스트를 중심으로 찾고 싶은 명칭의 페이지를 대강 추정한 후 해당 페이지를
찾으면 됩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 시학(Poetics)의 초반부에 인용된

크세나쿠스(Xenarchus)를 찾아보려면,

제3권(총 3권 중에 X로 시작되는 이름은 당연히 제3권에 있겠지요)의 리스트에서

X로 시작되는 명칭이 대략 어느 정도 페이지에 위치하는지 확인합니다.

제3권의 리스트에는 Xerxes가 1,307쪽에 있다고 적혀 있으므로 Xenarchus는 이보다 조금
앞의 페이지에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장을 앞으로 넘기다 보면 최종적으로 1,288페이지에 드디어 크세나쿠스(Xenarchus)가 나오게
됩니다.

총 4명의 크세나쿠스가 나오는데, 이 중 두 번째가 제가 찾던 그 사람입니다.

 

XENARCHUS,

literary. A son of Sophron, and, like his father, a celerbrated writer of
mimes. He flourished during Rhegian War(B.C.399-389), at the court of Dionysius,
who is said to have employed him to ridicule the Rhegians, as cowards, in his
poems. His mimes are mentioned, wiht those of Sophron, by Aristotle (Poet.2).
They were in Doric dialect.

 

그리스와 로마 문명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는 대체로 쓸만한 사전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카테고리 :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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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군구 사령관 이운창(李雲昌)에 대한 정보

저널로그의
시니피앙님께서 이운창(李雲昌)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아마도,
제 추측으로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되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당시
만주군 소속 박정희가 대항하여 싸웠던

부대가
중국공산당 팔로군 소속 이운창의 부대였지요.

 

실은
제가 이운창을 잘 알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혹시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운창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수집해 보고 있습니다.

 

일단
저는 이운창이 조선사람인지 중국사람인지조차


여부도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위키백과
중국어판에도 자료가 뜨지 않는 것을 봐서는 중국 사람들도 이운창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기는 합니다.

중국
포탈을 검색해 봐도 여전히 자료가 나오지 않다가

대만
포탈에서 일부 자료들이 검색되기는 하네요.

 

일단
그 첫번째 자료를 올립니다.

추가로
자료가 발견되면 추가로 덧붙여서 글을 올려보겠습니다.

시니피앙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만 자료가 변변치는 않습니다.

 

우선
첫번째 자료입니다.

 

 

[转帖] 第十八集团军组织状况

 

http://bbs.tiexue.net/post2_1457200_1.html

 

(전략)

 

(四)
冀东军区(成立于1938年4月) 

自1938年春季以来,第四纵队以冀察热边区为根据地进入冀东展开游击战。同年秋,由于日、满军的讨伐,建立根据地的计划受到挫折。1940年春划归晋察冀边区,以李云昌为司令成立晋察冀边区冀东军区。

 

(중략)

军区司令 李云昌(又名李云长)

 

(후략)

 

다음은
 위 문장을  어설프게 나마 번역해  본 것입니다.

중국어를
잘 아시는 분께서는 지적 바랍니다.

 

 

(4) 기동군구(1938년4월부터)

1938년 봄 이래, 제4종대가 기찰열변구(冀察热边区, 작전구역의 이름으로 추정됨)로서의 근거지를 삼기 위해 기동(冀东, 지명으로 추정됨)에 진입하여 유격전을 벌였다. 같은 해 가을, 일본 만주군의 토벌로 말미암아, 근거지를 건립하기 위한 계획이 좌절하기에 이르렀다. 1940년 진찰기변구(晋察冀边区, 작전구역의 이름으로 추정됨)로 돌아와 이운창(李云昌)을 사령관으로 하여 진찰기변구의 기동군구(冀东军区, 부대 이름으로 추정)를 성립하였다.

 

군구사령
이운창( 또는 다른 이름으로 이운장)

 

 

다음은
두 번째 자료입니다.

 

 

抗戰期間冀察兩省國共日偽兵力的消長
劉鳳翰

 

http://groups.google.com/group/neocromancer/web/%E6%8A%97%E6%88%B0%E6%9C%9F%E9%96%93%E5%86%80%E5%AF%9F%E5%85%A9%E7%9C%81%E5%9C%8B%E5%85%B1%E6%97%A5%E5%81%BD%E5%85%B5%E5%8A%9B%E7%9A%84%E6%B6%88%E9%95%B7

 


원문 중에 後改李運昌(日文稱
李雲昌,或李雲長)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운창의 이름은 李雲昌, 李運昌, 李雲長 세 개입니다.

 

 

다음은
세 번째 자료입니다.

 

 李运昌同志逝世

 

本报讯原中共中央顾问委员会委员,司法部原党组成员、副部长(正部长级)李运昌同志,因病医治无效,于2008年10月24日19时43分在北京逝世,享年101岁。

 

 


자료는 중국 법제일보 2008년 10월 28일자 부고란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는
두 번째 자료에서 이운창이

李雲昌에서
李運昌으로 개명했다는 것을 토대로 찾은 것입니다.

2008년에
101세로 사망하였다면, 출생연도는 1907년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1907년에
태어났다면 1940년대 즈음에

팔로군
내 지역 사령관이 될 수 있는 나이이기는 합니다.

그리고
사령관으로서의 항일투쟁 경력이 있다면,

이후
고위관료가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만약
이 인물이 우리가 찾는 이운창이라면,

이운창은
조선인이 아니라 중국 사람일 개연성이 더 높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좀더 자료를 더 찾아봐서 확인을 해야 분명해질 것입니다.

 

 

아,
드디어 찾았습니다. 확실한 정보입니다.


자료들과 일치하는 부분은 크게 확대하여 놓았습니다.

 

 李运昌

  李运昌(1908-
2008) 原名李芳岐河北乐亭人。早年就读于乐亭中学,参加学生爱国运动。1924年加入中国社会主义青年团。1925年10月赴广州考入黄埔军校第四期学习。同月转为中国共产党党员。1926年毕业后转入第六届广东农民运动讲习所学习。同年11月任广东省农民协会潮梅海陆丰办事处农军部主任。1927年5月任广东惠潮梅农工救党军第二团党代表,率部转至湖南汝城反抗国民党右派的叛变,同年秋失败。12月起先后任中共乐亭县委书记、滦(县)乐(亭)中心县委书记,领导恢复当地党的组织。1929年1月任中共顺直省委秘书、代理秘书长,同年秋被国民党当局逮捕入狱,1930年10月获释。同年11月任中华铁路总工会满洲办事处主任。1931年10月任全国铁路总工会特派员,先后到上海、天津、济南铁路工会巡视工作。1932年9月在乐亭、滦县主持成立京东御侮救亡会,担任主任。1933年6月任中共京东特委军事特派员,赴迁安组织农民暴动。1934年起在乐亭、哈尔滨、古冶、唐山等地从事地下工作。1936年4月任中共京东特委书记,领导冀东地区恢复发展党的组织,开展抗日救国运动。1937年5月赴延安参加中共白区工作会议。6月至10月担任中共河北省委书记,尔后任中共冀热边特委书记。1938年夏秋领导发动冀东抗日武装暴动,成立冀东抗日联军,任司令员,率部打击日伪军,扩大了抗日政治影响。

 

1939年7月任八路军冀热察挺进军第十三支队司令员。

 

1940年7月任冀东军分区司令员

 

1943年7月任中共冀热边特委书记兼冀热行署主任并兼晋察冀军区第十三军分区司令员、政治委员。1944年9月任中共冀热辽区党委书记兼冀热辽军区司令员、政治委员。率部开辟冀热边抗日民主根据地,坚持敌后抗日游击战争。解放战争初期率部挺进东北,担任东北人民自治军第二副总司令员,并任中共晋察冀中央局委员。1945年11月任热河省政府主席。1946年6月兼东北行政委员会冀察热辽办事处主任、冀察热辽军区副司令员、中共冀察热辽分局委员。1949年1月担任中共热河省委书记。参与领导解放热河的多次战斗和热河地区的土地改革及恢复发展生产、支援前线等工作。中华人民共和国成立后,历任中央人民政府政务院交通部常务副部长、中共党组书记,中共中央监察委员会常务委员(专职),国务院司法部第一副部长等职。“文化大革命”中曾受到错误批判和关押。十一届三中全会后给予平反,恢复名誉。他是第三、四届全国政协常务委员,在中共十二、十三大上,连续被选为中央顾问委员会委员。2003年10月24日当选黄埔军校同学会第四任会长。原中共中央顾问委员会委员,司法部原党组成员、副部长(正部长级)李运昌同志,因病医治无效,于2008年10月24日19时43分在北京逝世,享年101岁。

 

亮剑冀东——敢打一联队关东军的八路

  在八路军的序列中,冀东军分区和它的司令员李运昌将军,只是璀璨众星中的一颗。但是,即便在敌军的材料中,对这一支八路,也有不少精彩的纪录。

  一

  日军的汽车队出现了,头车的驾驶棚顶上架着两挺歪把子机枪。车厢里满载着荷枪实弹穿着黄色粗呢面皮大衣戴着皮帽的日本士兵,满载士兵的卡车竟有几十辆
……日军的卡车开得很慢,先头车似乎在谨慎地做搜索前进。随风传来日军士兵的歌声:“朝霞之下任遥望,起伏无比几山河。吾人精锐军威壮,盟邦众庶皆康宁,满载光荣啊,关东军。”

  懂些日语的赵刚脸色骤变,轻声道:“这是关东军军歌。老李,情况有变,这不是日本驻山西的部队,是刚调进关的关东军。”

  – 摘自《亮剑》之第三章:野狼峪之战

  能让赵刚这样的老八路变色,关东军的战斗力之强悍名不虚传。在日本陆军各部队中,公认最不能打的是大阪第4师团,最能打的,就要算关东军了。硫磺岛一战,补充到栗林忠道部下的关东军老兵让美国海军陆战队谈虎色变。在《亮剑》一书中,李云龙独立团在野狼峪伏击战力拼关东军两个中队,神鬼皆惊。

  《亮剑》是文学作品,真实的战场上,是否发生过八路军和关东军的殊死血战呢?因为关东军主要驻防东北,八路军则活跃于华北,这样的机会不太容易找。

  事实上,这样的例子不但有,而且规模远远大于野狼峪之战。在大宅壮一监修的《兵队陆军史》一书中,就记载了这样一次战斗——马家峪伏击战。这本书是番町书房出版,1969年4月14日第一次印刷,因为保留了大量原始历史资料而弥足珍贵。比如,平型关战役中记录日军“大行李”遭到袭击,这“大行李”究竟是什么,一度颇有争议,甚至有人认为这指的是日军携带的物资。该书中对此有明确的定义,说明“大行李”是日军区别于专门辎重部队,在联队内设置的独立后勤作战单位,并有专门的照片,介绍在太行山地活动的日军“大行李”部队。这一点,对于确定平型关战役的战果有着重要意义。

  作为讨论日军训练水平的例子,本书中专门用了一节叙述马家峪之战。这次战斗中关东军和《亮剑》一样遭到了八路军的伏击。不过,被伏击的关东军不仅仅两个中队,而是作战兵员两千多名的整整一个联队。在日军“春兵团”,即独立混成第八旅团的作战纪录中曾经提到这次战斗,本书中对此则有更充分的描写。很遗憾,除了日军自己分析可能是遭遇了八路军李运昌部以外,在中文资料中没有找到相关的材料。因此,关于这支和关东军大打出手的八路军部队,至今无法确定它的番号。

  大宅壮一这部书中提到马家峪之战,是以此战为例说明针对八路军独特的作战方式,日军训练也需要相应的调整,单纯的正规操典式作战在八路军面前即便是关东军这样的精锐,也难免吃到苦头。

  马家峪,是个常见的地名,华北地区至少有三个马家峪,而且非常巧,个个都和八路有些关系。第一个马家峪在今山西黎阳境内,1938年八路军129师徐向前部为配合徐州会战从这里出击,发动响堂铺之战,歼灭日军辎重部队四百余人;第二个马家峪在山东费县,一度是115师聂荣臻司令部驻地;关东军遭遇八路伏击的这第三个马家峪,地点在河北省抚宁县,时间是1944年4月中旬。

  战斗的开始毫无悬念,几乎和所有八路军作战的老套路一样。日军发现一支人数不多的八路(此书中记载约三百人,春兵团作战纪录中,提到约一百人)在自己辖区招摇过市,自然是立即出击,试图一举围歼。八路掉过头来就跑,一来二去皇军抬头一看,嗯,怎么四面全是山了?

  这种战术八路军已经玩得熟练已极,这样的小股八路多为地方武装,目的就是钓鱼,把日本兵钓进包围圈让主力部队收拾,人称狼诱子。

 

还原冀东抗日历史中的李运昌

  提冀东军分区李运昌就不能不提单德贵,

  写成此文。目的既不是为单德贵正名,也不是否定原冀东主要领导人在抗战中的历史功绩,只想还历史一个本来面目。

  单德贵在冀东(又称京东)抗战史上,是位有着重要影响和重要贡献,与蓟县盘山烈士陵园头号烈士、号称“中国的夏伯阳”的包森齐名,在冀西三河、平谷、顺义、密云等县名声、影响甚至超过包森的传奇式人物。

  1944年5月初,单德贵突然投靠了驻扎在三河县的日伪,一时成了冀东部队和冀东百姓中的爆炸性新闻。一个参加过二万五千里长征,战功赫赫、令日寇闻风丧胆、建国后完全可以成为开国将军的优秀指挥员,为什么会投降自己的死对头?单德贵的一生是功是罪?当时的冀东部队和冀东百姓颇有争论。当地的革命史撰写者,对此也大多刻意回避。

  本人通过查阅单德贵在抗战中曾经战斗过的三河、平谷、顺义、密云等地的革命史和曾与单德贵并肩战斗过的老同志的回忆文章及其他相关资料,

  单德贵其人

  单德贵,男,1911年生于湖南省茶陵县虎据山乡三芫村。排行老大,家境贫寒,12岁时父亲去世。长大后因脸长满壮疙瘩,当地人称"烂脸"。1927年单德贵不满16周岁时,在老家被湖南军阀何健部抓去当兵,编入国民党中央军十五师。1930年6月在与红军彭德怀部作战时被俘,参加红军,被编入红八军团。因作战勇敢,不久即被提升为该部特务连班长,1931年被提升为特务连排长,并于同年加入了中国共产党,1933年被提升为特务连连长。1934年8月,跟随萧克、任弼时进入贺龙的湘鄂西根据地。1935年跟随贺龙部开始长征,于1936年10月到达陕北。1937年红军改编为八路军后,被编入八路军115师685团,并于1937年9月参加了平型关战役。1938年随宋时轮、邓华的八路军第四纵队挺进冀东,任八路军第四纵队第三十四大队(团级单位)一连连长,东进途中在攻打昌平(今北京市昌平区)县城时,因身先士卒,率队最先攻上城墙,对取得战斗的胜利起到了决定性作用,在火线上被提升为三十四大队二营营长。1938年10月,冀东大暴动失败,东进八路军第四纵队主力西撤后,奉命留在冀东坚持斗争,任第三支队(团级)司令。1940年7月,第三支队并入冀东八路军第十三团,任十三团副团长。1943年7月,被降职任冀东第一专署武装科科长。1944年5月3日,携老婆、女儿和两名随身警卫投靠驻扎在三河县的日伪,被封为"京北剿匪少将支队长"。1945年5月代理平谷县伪县长。1945年9月底逃往北京,1946年4月23日被北平国民政府法庭以汉奸罪判处有期徒刑12年,因被冀东西部地区部分百姓联名上保,后被减刑至6年,1949年春在北平被中共秘密处决。

  一位抗日功臣,在抗战出现曙光的时候投降日伪,当了日本鬼子的走狗,震惊了冀东党、军队和人民。单德贵熟知冀东军区的众多机密,特别是冀东西部抗日根据地的交通站、堡垒户和秘密抗日人员,其影响和危害可想而知。单德贵的投敌,到底给冀东的抗战造成了什么影响,单德贵投敌后又做了些什么呢?

  单德贵投敌,给冀东军民的思想造成了空前混乱

  单德贵投敌后,当地的日伪立即大肆宣传,除每天播出滚动新闻外,华北地区日伪报纸也大造舆论,并附上了单德贵亲笔签字的投降书和大幅的款宴照片。当军区主要领导听完监视单德贵的副科长的情况报告后,根本不信。当驻北平的日伪电台滚动播出"原冀东八路军十三团单德贵司令不满共产党的土匪政策,携带妻女弃暗投明,拥入大日本皇军怀抱,被封为京北剿匪少将支队长"的消息后,还在半信半疑,认为单德贵是个突发奇想的人,是不是假装投敌,打入敌人内部,以图大业?而最不能接受这个事实的,是原三支队和十三团的一些老部下,这些朴素的干部战士,依然心存幻想,根本不相信单德贵真的投敌了。单德贵创立的冀东西部根据地的老百姓,也根本不相信,时间过去了一年多,抗战胜利的时候还有多人反复向组织追问,单德贵是不是真的投敌了?是不是组织派去的?是不是敌人造谣,你们搞错了?他可是打鬼子的先锋啊。然而事实就是事实,中共冀热边特委很快作出决定,开除单德贵的党籍,并把决定和单德贵的投敌行为传达到每一个党员和抗日群众。

  单德贵的投敌,给冀东军民的抗战,蒙上了挥之不去的阴影。我军不仅损失了一员战将,更损失了当地军民抗战的信心。根据地一些群众由此对当地党组织和军队产生了疑问和怀疑。原单德贵的一些老部下,甚至一些参加过长征的老红军、抗战初期参加革命的老八路,也经不住打击和排挤,部分人员陆续追随单德贵到三河,投入到单的麾下。由此,当地群众曾戏称单德贵的三河伪军是老十三团,而舒行团长带的十三团为新十三团。1945年1月,当舒行团长得到情报,带队在平谷东高村伏击单德贵的伪军时,十三团部分基层干部战士不愿打自己原来的老首长和老战友,战斗中不向伪军群中开枪、投手榴弹,一场设计很好的伏击战打成了击溃战,当跟在后边的日军冲上来后,打伏击者反而吃了亏。

  据三河、平谷、顺义等地革命史的零星记载,单德贵投敌后,确曾随日军参加过对平谷、蓟县、香河等抗日根据地的围剿讨伐,包括1944年12月28日在平谷大小官庄地区围攻谭志诚、关旭部突围部队。但这些史料中都没有关于单德贵破坏冀东根据地的秘密交通站、联络点和抓捕我方八路军、地下交通员,杀害老百姓和我党政军秘密抗日人员,与八路军正面交锋的记载。采访当地部分75岁以上仍健在的老人,他们也没听说过单德贵有到老百姓中抢粮、征夫的事。原冀热边特委书记李子光在抗战胜利前夕,给单德贵写信并派原单的好友,民兵英雄胡广才送信并说劝单德贵重新回到人民一方的事,也证明了这一点。

  1945年5月,单德贵投敌一年后,李子光基于单德贵不象其他叛徒那样一旦当了汉奸,就疯狂报复自己原来的战友和同事,冀东西部的秘密党组织、交通站未遭到破坏,人员未遭到抓捕。特别是在平谷大小官庄一战中,救了不少被围的八路军和当地群众的事实,认定单德贵良心未泯。于是李子光给单德贵写了一封亲笔信,并派原单德贵的好友,民兵英雄胡广才、安大福带信劝单德贵重新回到人民的怀抱。

  在叙述胡广才等带信去见单德贵前,有必要再提一下平谷大小官庄战斗的后期情况。当日伪军将大小官庄团团包围后,日军总指挥小岛一郎数次命令朝村中数千群众和三百余八路军开炮,都被单德贵阻止。因为单德贵知道,炮击后,必然会玉石俱焚,不仅被围的数千群众和八路军干部战士将遭到重大伤亡,就连两个村百姓辛苦一生盖的房屋也将毁于一旦。小岛因对当地情况和单德贵本人不熟,看单德贵的少将军衔又比自己高,犹豫中听从了单的阻止。晚十点以后,枪声逐渐稀落下来。被围的300余名八路军干部战士,大部战死战伤,只有少数人员乘隙突围出去。剩下的近百名八路军干部战士,被迫隐藏枪支,换上老百姓服装,裹在数千群众中。

  据被围在大小官庄的地方干部木荣说,12月28日激战了整整一天,日军指挥官小岛一郎数次命令向村中开炮,迫使八路军、老百姓出村,都被单德贵拚命力谏并以身担保阻止。天黑后,小岛怕八路军突围,再次命令向村中开炮,单德贵再次阻止。为不使日军生疑,亲自带着伪军进了村。因单的伪军穿什么样的都有,木荣和另一地方干部趁机混入单德贵的伪军中,单的伪军相视一笑,没有吱声。以后又陆续有十几个八路军和地方干部混入单的队伍出了村,突出了包围。

  据被围在村中的多名群众讲,单德贵带伪军进村后,认出了多名八路军干部战士,包括数名自己的老部下。单德贵不但没抓,反而动员群众解开包裹拿出衣服让八路军换上。

  天亮后,数千群众全部被赶到了小官庄村的场院。鬼子在四面架起了7挺机枪。

  单德贵看着场院内黑鸦鸦的群众,想起几年来当地百姓对自己的恩情,急得来回走动着。据在场的群众后来说,单德贵突然站住了,对小岛一郎大声喊:"这里八路少少的,全都是良民大大的。"说完对翻译一挥手,命令道:"解除武装,机枪撤掉。"同时对翻译命令"放人"。于是数千群众和混在百姓中的数十名八路军干部战士全部逃出。小岛一郎面对剩余的近百名八路军伤员和来不及换上老百姓服装的八路军干部战士,大喊"机枪的准备,统统死了死了的。"单德贵又快步上前,握住小岛举刀的手腕,"这些原来统统是我的部下,我统统的带走,补充我的部队。"说罢一挥手,将这些八路军伤员和干部战士全部押上了卡车,途中放走40余人,剩余的40余人编入自己的保安队,带往三河。以后这些人又陆续逃出大部。

  胡广才、安大福带着李子光写给单德贵的信,面见单德贵的一幕,或许读者能看出单德贵投敌时的心态。

  据平谷革命史《泃水长流》记载:单德贵见到李子光写的信后,大哭说"过去人家(笔者注:指李子光)是革命的,我也是革命的;现在人家还是革命的,我却是反革命的。"

  当单德贵和胡广才、安大福共喝了几杯酒后,再次失声痛哭:"我为什么投敌当汉奸?我知道当汉奸遗臭万年,可他(笔者注:指冀东军区主要领导人李运昌)大会小会一次次的开会整我,撤了职务还不算,还要致我于死地,他派人追杀我,没我的活路了。我湖南老家离这这么远,我怎么回去?老胡、老安啊,你哥俩是了解我的,‘四纵’主力走了后,我们就跟没娘的孩子一样,让日本鬼子打的东躲西藏,可我单德贵却为平西革命根据地筹措了300多万元经费(经查阅有关晋察冀的史料,此数字属实),这是多么大的数字,苍天可鉴啊。如今我当了汉奸被人唾骂,遗臭万年,可你们想想,1939年冬天,小日本在山下一人家连着三天摆好了酒席请我下山,让我投降,我老单一点心思没动,照啃野果树皮。1940年初,我三支队的连长王连启脱离部队,带着一千光洋和鬼子的书信找到我,劝我投降,我亲手毙了他。他整我、撤我的职还不算,还把当年跟我出生入死、身上带着伤痕的红军战友、老八路全撤职、全调走了。"

  单德贵接着哭诉到:"我投降日本当汉奸后,日本人不相信我,老百姓也骂我,我是身在曹营心在汉哪,我是《三国》里的徐庶,投敌后没向鬼子献一计、出一谋,我没杀一个老百姓,我在暗地里依然抗日保民,我向李子光书记递出了多少情报,你们都知道啊。我给鬼子前边带路使鬼子扫荡一次次扑空,我为了什么?我在敌人手里救出了多少同志,冀东的山山水水犄角旮旯我都清楚,我都知道。谁是共产党的干部,又是谁的亲属,明的暗的,我都明了。老胡你说,连你都是我发展的党员,我能出卖你吗?你们都骂我汉奸,但我带鬼子打根据地,也就是做点表面文章,我这个剿匪支队司令,真要是端咱的老窝,一端一个准,可我的良心不许啊。你们都恨我……恨我,我是没办法才走的这一步啊。"

  单德贵给李子光写了一封回信,将胡广才、安大福两位民兵送走后,又陷入了激烈的思想斗争:回还是不回去?回去他(笔者注:指冀东军区主要领导人李运昌)他能不处理我?是活埋还是枪毙?能有我好果子吃?我递出哪么多情报,除了李子光知道,别人知道吗?我一个被开除出党的人,老百姓还相信吗?官庄一战虽然救了哪么多八路军、老百姓,能功过相抵吗?单德贵虽然也感到鬼子很快就要完蛋了,但最终还是继续走向了不归路。

  1945年5月至1945年8月,单德贵代理平谷县伪县长,又成了当汉奸的铁证。

  1945年9月底,单德贵带平谷伪政府官员和数百人的队伍逃到北京。1945年10月底被北平国民党政府抓捕。1946年4月23日,以汉奸罪被判处有期徒刑12年。1947年10月,因平谷县原岳各庄乡乡长张福厚、峪口镇镇长任永恕及三河县县党部张瑞生等九人联名作保,被减刑至6年。1949年春在众犯人转运途中,终以自杀结束了自己曾经光荣而又令人惋惜、痛恨的一生。

  对单德贵的投敌,《平谷革命史》作了如下结论:"一个长征干部为什么会投敌呢?其实并不偶然,主要是他居功自傲。

  "在独立工作时,把做出的成绩当做骄傲的资本,只读过两年小学,平时不注意学习党的方针政策;

  "其次是敌我界线不清,被坏人拉拢,常常在政府处决坏人时,出来替坏人说话。

  "由此和组织上产生了分歧意见。另外有严重的地位观念,当他由三支队司令员到副团长的位置又调降到专署武装科长时,对党心存不满,虽经组织教育和批评仍是固执己见,与党持敌对态度,最后走向叛变投敌当了汉奸。"

  对这段"权威"的结论,笔者不加评判。单德贵的一生,是功、是过,还是功过相抵?相信读者读完此文后,会对单德贵有一个恰当和公正的评价。

  单德贵从一名八路军的优秀指挥员、抗日功臣而投降日伪,走向人民的反面,其个人因素当然是主要的,拿今天的话说,就是丧失了理想信念,居功自傲,个人主义和名利思想严重,不能正确对待组织和他人的批评教育。拂去历史的浮沉,从实事求是的角度看,当时冀东党组织和军区主要领导人的一些极"左"和过激作法,也是促成单德贵最终投敌叛变不可忽视的因素。

  从个人因素上看,首先,单德贵是个走极端的人。当八路军十三团在蓟县十棵树地区被日伪打散,部队受到严重损失后不久,在尹家府地区诱歼敌伪的战斗中,单德贵复仇心切,不顾党的俘虏政策,将在战斗中俘虏、负伤的敌伪人员全部杀死;当十三团原任团长包森同志牺牲后,上级组织没有将他的副团长转正,而是调来了与自己的资历相当,但在当时冀东的影响远不如自己的舒行(江西省吉安市人,参加过长征,解放后任吉林省军区第一副司令员,1955年被授予少将军衔)同志,单德贵大为不满,曾仰天长叹:你鬃(笔者注:指冀东军区主要领导人李运昌)是对我有意见啊,最初将我兵强马壮的三支队撤销,合并为十三团,将我这司令降职副团长使用,看在四纵的老战友包森的面子上,他当团长我当副团长,一声没吭服从了组织决定。凭良心想想,当初留在冀东的三个支队哪个有我的人多、枪多?冀东的干部,哪个比我打的仗多?如今三个支队长只剩了我一个,可现在你还让我当副职,显然把我当成了异己啊。不久,单德贵赌气跑到平谷县的熊尔寨地区,以养病为名拒不归队。其间不向上级组织申请报告,娶了当地富家并有当汉奸哥哥的18岁的郭二美为妻(那个时候,部队的领导干部结婚,是有严格的审批手续和审查标准的啊),并不顾影响,大摆宴席100多桌,大请部下,以此发泄对上级组织和主要领导人的不满。其二,单德贵确有居功自傲问题。冀东的抗日部队,主要由原冀东抗日联军和东进的八路军第四纵队组成,作为参加过二万五千里长征,曾任红军、八路军连长、营长的单德贵,一贯以老资格和正规军自居,看不起原冀东抗日联军的领导干部。其三,单德贵在对上级领导提出批评和对待上级的批评上,也存在严重问题。对上级领导不满,对上级领导提出批评,不分场合,不讲方式;对上级组织和领导的批评,虽也申辩,但不讲策略,一味采取消极对抗的态度。这些,都为自己的人生之路埋下了祸根。

  而外部因素,也是单德贵最终投敌的一个极为重要原因。

  首先,当时的冀东党组织和军队,存在着严重的不团结和极"左"问题,对单德贵的处理,确实有欠合理和公正。1940年4月10日,中共北方局书记彭真同志在北方局会议上曾严厉指出,冀东"地方党与正规军不和,正规军党与地方军党不和,双方在狭隘心胸指使下,整个冀东的抗日战争和冀中平原的抗日战争战果相差远了,光党政干部在内耗中的损失就超乎寻常。"由此可见,冀东党和军区在团结和对待外来干部的使用上,确实存在一些问题。这些问题甚至在抗战胜利后,冀东部队进军东北,参加东北解放战争中,也有明显的表现。

  权延赤在《林彪将军》一书中,从侧面对此也有明确和真实的反映。这些问题,也是林彪对原冀东的领导干部不重用,甚至对部分冀东部队不信任的原因之一。据当地一些老人讲,当时冀东地区活埋人成风,除了活埋一些特务汉奸外,对一些在工作中犯有某些错误的同志,常常以开会或执行任务为名,将其诱到事先准备好的地点活埋。对一些与敌交过朋友、与日伪势力有过接触的人,也全部列入铲除之列。对一些持有不同意见的同志,也常常强加种种罪名,进行无情打击和批判;对一些犯了错误的同志,上纲上线,实行"一棍子打死",确实伤了部分同志的心。当单德贵对冀东军区主要领导多次提出批评指责,特别是不请示与富裕、漂亮闻名的汉奸妹妹郭二美结婚的"把柄"被抓到后,冀东军区党委立即组织对单德贵进行了批判斗争,把单德贵坚持党的"统一战线,全民抗日"主张,联络当地富贾和上层人士共同抗战,分化瓦解土匪武装,反对滥杀人等说成是"老好人"、"替坏人说话"、"立场不坚定";把指责冀东军区主要领导军事指挥上的失误说成是"以老红军自居"、"居功自傲,不服从领导";把娶了富家小姐和汉奸妹妹说成是"贪图享受"、"革命意志衰退"。听到这些批判和指责,单德贵曾气得当场背过气。

  1943年7月,在冀东军分区升格为冀热边军区(笔者注:二级军区,军级单位)数月后,在论功行赏,各级领导人几乎全部升职的情况下,单德贵被降职为第一专署武装科长(营级)。在撤职会上,单德贵据理力争,说大军西撤,三支队孤悬敌后,离北平最近,被敌人吃掉的危险最大。在冀东革命最低潮最困难时期,日伪军、土匪、杂牌武装都想消灭三支队,如果不贯彻统一战线思想,不联络当地商贾上层人士、不收编教育土匪,让土匪和八路军作对,三支队怎么能存在?怎能发展壮大?我都三十多岁了,参加革命和入党都已十年有余,符合中央定的"258团"的规定(25岁以上,8年党龄,团级以上干部),娶老婆怎么成了贪图享受?但无论单德贵如何申辩,都被说成是不听党的话,不服从组织领导,革命立场不坚定。迫于当时的形势,几乎无人敢为单德贵说话。只有冀热边特委书记兼十三团政委李子光站了出来(有的老人说,李子光敢说真话正直磊落,正是他"文革"被迫害致死的重要原因),为单德贵申辩,对军区作出的对单德贵的不公正处理鸣冤,可毕竟是杯水车薪,无碍大局。单德贵原三支队的一些老部下,甚至是参加过长征的老红军,也受到了株连。二连连长刘芝龙(又称刘志龙,山东人,曾任三支队、十三团特务连连长)、五连兼特务连连长贺明灯(陕北绥德人,老红军)两位战功赫赫,在冀东西部群众中有极佳口碑的基层指挥员,在单德贵被降职后,也受到了不公正待遇。刘芝龙被削去兵权,免去连长职务,改任团作战参谋。

  1944年2月24日在密云县北部五指山地区为掩护领导机关突围,亲自端着机枪带队冲锋,负重伤后不治牺牲;在十三团有"神枪"之誉的贺明灯虽然没被降职或改任他职,但也一直未被提升。1944年11月19日在平谷洪洞水养伤时被鬼子包围,用仅有的不足30发子弹,击毙20余名日伪军。为不被俘虏,用剩余的2发子弹,和照顾自己的通信员一起自杀殉国。要知道,二连、五连和特务连是冀东十三团的绝对主力,大战必上,恶战必参。虽然,1945年7月,冀东党和军区认真检讨了自己的左倾错误,认为确实错误处理了一些干部,伤了一部分同志的心。对单德贵的处理,也确实有欠公正合理,做了一些亲者痛、仇者快的事,让敌人钻了空子,但已于此事不补。

  其二,原冀东军区主要领导人在军事指挥上,确有让单德贵不服的方面。单德贵认为,原冀东军区主要领导人在军事指挥上,存在严重失误,为此多次对其提出批评指责。原冀东军区主要领导在军事指挥上,到底如何,当地的史料上没有评说,笔者作为晚辈,也不敢妄加评论。采访目前仍健在的当年的老八路,因当时都是基层干部战士,对此也没有更多更深的理解体会。但从下述两次使冀东八路军遭受严重损失的战斗,读者或许可窥一斑。1941年5月,敌集中4万多兵力向冀东根据地进行围攻。

  当时的冀东军区主要负责人,被1940年以来取得的一系列胜利和逐渐恢复的抗战大好形势所迷惑,对日寇的意图和兵力调动毫无警惕,将军区的主力部队和部分游击队调出山区,全部集中在了盘山以东、以南的平原地带,并提出了不切实际的"大战红五月"的口号。5月中旬发觉敌对我的作战意图后,匆忙做出反扫荡部署时,已经太迟,冀东军区的主力部队十二团、十三团全部被敌包围于平原地区。6月初,十二团主力在玉田县孟四庄地区与敌激战,在遭受严重损失后突围,老红军、十二团团长陈群牺牲。该团一营也在丰润南部遭优势日军包围,全营伤亡200余人,营长阵亡。

  6月1日,十三团在蓟县、玉田县之边界杨家会与板桥一带与敌激战一日。入夜,冀东军区司令部率十三团突围到蓟县十棵树、六道街村一带再次被敌重兵包围。敌使用坦克、毒瓦斯攻击,战斗异常激烈,团长包森险些被俘,被单德贵派特务连战士拼死救出。经过苦战,入夜,军区主要领导率一营突围,二、三营终因寡不敌众,被迫隐藏枪支就地潜伏。但因叛徒出卖,潜伏的部队和枪支大部丧失。此战,十三团除不足一营兵力突出外,其他部队大部损失。此次战斗,冀东八路军主力部队共伤亡、失散1000余人(不含失散后收拢人员),其中牺牲400余人,被俘近百人。失掉步枪1000余支,机枪13挺,使冀东的主力部队士气锐减,根据地也受到了严重损失。这次战斗,也是单德贵大骂军区主要领导人"不懂军事、瞎指挥,打一仗败一仗,把好不容易攒起来的部队打没了"的主要原因,也是单德贵急于报仇,在尹家府战斗中枪杀俘虏的主要原因。《通县革命史》对此次战斗,也如实记载如下:"我军确实缺乏警惕,1941年春,仍以‘大战红五月’为口号,集中兵力,转战蓟县、丰润、玉田平原"。

  另一次战斗,是1944年12月底发生在平谷县的五路突围战斗。1944年底,为加强冀东党的领导和抗日斗争,晋察冀军区派出曾雍雅、张明远等80余名中高级干部经平北、密云,12月底到达平谷。冀东军区主要领导同志带部队到达平谷县西部、顺义县东部地区迎接。驻北平日军侦知后,立即从北平、承德、天津、唐山等地调集了一万余名日伪军进行合围。被当时全国抗战大好形势迷蒙的冀东军区主要领导,对敌人的大规模、大范围的兵力调动未有察知。

  当12月26日部队向其紧急报告了敌人机动部队的大规模集结情况后,仍认为敌人的小范围调动是司空见惯的事,未作出相应的部署。同时,还要求冀东军区第二区队(团级单位)政委谭志诚(老红军,江西永新县人)来平谷西部向其汇报工作。当12月27日,敌人已完成了兵力调动,包围圈越来越小时才引起注意,但已来不及作出详细的突围部署。慌忙中,将所带部队分成五路,从不同的方向开始突围。军区主要领导和十三团团长舒行、参谋长陈云中、政治部主任王文带的四路除了机关干部外,都配有正规作战连队掩护,只有不熟悉平谷地形的新任团参谋长关旭(东北人,曾任11团参谋长,准备接替陈云中,但陈此时未离职)带的一路突围部队,配备了由伪军反正不久的义勇大队(连级)、只装备部分爆破器材,基本没有武器的团工兵连和使用木枪的三八步枪训练班。在突围中,前四路基本顺利突出。特别是由团长舒行、冀热边特委书记兼十三团政委李子光带的一路,不仅人数最多,有500余人,还包括东进的80余名中高级干部。李子光利用熟悉的地形和对单德贵的了解,从单德贵留下的一条生路中突围而出。只有关旭带的一路,因地形不熟、部队缺乏战斗力,和不了解敌情前来汇报工作的二区队政委谭志诚、军区文工团部分人员共300余人及附近村庄的数千群众一起被万余敌人合围在了平谷两个几乎相连的大小官庄村。尽管如此,在二区队政委谭志诚、团参谋长关旭的带领下,被包围的八路军干部战士与敌展开了英勇卓绝的拚杀。

  战斗从12月28日上午9时开始,至晚上10点,缺枪少弹的八路军战士打退了敌人一次又一次的进功,并组织了数次突围,均因敌人众多火力严密和弹尽而失利。战斗中,团参谋长关旭牺牲,二区队政委谭志诚负伤后自杀。原单德贵的老部下、号称"枪漏"的团工兵连连长杜荣春也在突围中阵亡。此次战斗,共有120余名八路军干部战士牺牲,80余名负伤后被俘,另有近百名战士乘隙或在群众掩护下化装突围。被围的数千群众也有400余人伤亡。

  其三,当地日伪和特务的离间,也是单德贵最终走向人民反面的重要原因。就在单德贵被降职并受到批判而情绪一落千丈,态度极为消沉的时候,驻三河的日军和特务组织得知此情况后,加紧了对冀东党组织和单德贵本人的离间活动。日伪派汉奸、单德贵的大舅子郭启明找到单德贵,说冀东军区的主要领导准备将其活埋暗杀掉,老婆孩子也不放过等。听到这些挑拨,单德贵的思想更加消沉。他想起十余年来跟随共产党从老家湖南打了大半个中国到了陕北,又打到冀东,竟落得如此下场,不禁潸然泪下,于是挥笔给家里写了参加革命以来仅有的一封信。为了进一步恶化单德贵与冀东军区主要领导的关系,日伪还在群众中到处散布说"单德贵被撤职后不服欲起兵造反"、"单德贵发誓要杀死鬃(笔者注:指冀东军区主要领导人李运昌)"、"单德贵挨整气愤不过,掏出手枪要和鬃玩命"。这些谣言,加重了冀东军区主要领导人对单德贵的反感和警惕,派第一专署武装科副科长等人日夜监视单德贵的行动,也加重了单德贵的逆反心理,使单德贵的思想进一步发生了动摇。据解放后携女改嫁到平谷峪口镇的郭二美讲,单德贵投敌前,曾数次想过自杀,也曾想上阵和日寇决战一死了之,可又舍不下妻子和刚出生不久的孩子。近于绝望后,在其大舅子的反复惑患下,终于1944年5月3日,趁赴顺义东南部尹家府地区检查工作时机,带老婆、孩子和两名跟随多年的警卫投降驻三河县的日伪。《三河革命史》载:由此单德贵结束了他近20年的革命生涯。

  平谷县城是冀东地区的中心地带,东邻山海关,是东北三省的门户,西临京津唐,是华北的重要城镇,南靠大盘山地区,北面就是鱼子山村,经鱼子山村可直通长城,历来为兵家必争之地。

  鱼子山村据平谷县城10公里,位于燕山脚下,坐落在一个南北走向、长7.5公里的大峡谷里,北面与长城相接,南面是一望无际的平原,三面环山,地势险要,在明朝时就曾设立过军事要塞。山上橡树成荫,东西两坡花果飘香,山上还有祥云古刹,每日早晚,可闻钟鼓之声,有诗云:"一轮红日照山川,二凤展翅望虎山。古刹钟声常报晓,泉水潺潺入龙潭。"

  1938年时,村里共有300余户人家,但绝大多数土地和山场都被少数地主和富农占有,历来有"南王、北尉、东李、西巨"四大户之说,而广大农民只能以上山打柴、出卖劳力为生,生活极其困苦,终年劳动也不得温饱。

  1938年5月,共产党领导的八路军第四纵队奉命挺进冀东地区,开辟敌后抗日根据地,同年7月,在地方游击队和民兵的配合下,一举攻下平谷县城,建立了冀、平、密联合抗日政府,创建了抗日根据地,经常给日伪军以沉重的打击。日寇不甘心失败,从各地调来大批军队对平谷县城进行围攻,我军民对敌进行了坚决的反击,使日寇付出了惨重的代价,但我军也伤亡甚众,由于敌强我弱,党组织决定向山区转移,开展游击战争,一个月后,八路军第四纵队第三支队和抗日政府机关在第三支队副司令员单得贵的带领下转移至鱼子山村。

  部队转移到鱼子山以后,立刻发动群众,把村里的青壮年组织起来,成立了以孙吉祥为队长、王世发为指导员的抗日游击队,并在大峡谷内设立了兵工厂。为了更好的领导抗日斗争,1940年9月,平谷县的第一个农村党支部——鱼子山党支部在鱼子山村成立,当时共有党员9人,鱼子山成为当时平谷县抗日斗争的中心。

  以贫苦农民为成员的游击队建立以后,引起了反动地主和富农的仇恨,他们一面向外转移财产,一面等待时机,企图发动叛乱。1938年的一个秋夜,地主反动武装包围了游击队的队部,抓住了游击队的正副队长和几名游击队员,在对他们进行残酷的殴打之后,将队长孙吉祥和副队长用铁丝穿了锁骨送给了平谷县城的日军。

  几天后,单得贵副司令员派杨营长带领部队从北土门、东长峪方向向鱼子山进军,一举消灭了地主反动武装,收缴了全部武器,并将几名地主头目交给抗日政府处置,叛乱被平息了。

  为了更有效地打击敌人,八路军与民兵、游击队相互配合,村与村之间也形成了庞大的联络网,山顶日夜有哨兵巡逻,有力的打击了日本侵略者。

  1940年的正月十五,当村民正在准备元宵佳节的时候,镇罗营的日军突然闯入了鱼子山村,抢夺了大批粮食、衣物、牲畜,并要求我村民作"向导",搜索八路军。在敌人行至大峡谷将军石时,早已埋伏在此的我八路军和民兵一起射击,当场打死日军1人,俘虏伪军4人,并缴获一批武器弹药,被敌人抢走的粮食、衣物、牲畜等也被夺回。

  1941年11月,南独乐河和峨眉山据点的日伪军趁着黎明向鱼子山村发动了进攻,一进村即遭到我游击队和民兵的猛烈打击,敌人在丢下数十具尸体后狼狈逃回,此役共打死打伤日伪军50余名,活捉伪军5人,缴获大批军用物资。

  抗日形势的日益发展,使敌人既感到恐慌,又对鱼子山恨之入骨,多次调集日伪军对根据地进行扫荡和围剿,妄图用杀光、烧光、抢光的"三光政策"来扑灭鱼子山的抗日火焰。1941年11月22日,200多名日伪军包围了鱼子山村,在山梁架起机枪。凌晨,群众往村外突围时,遭到机枪的疯狂扫射,当场有60多人被残杀。12月11日,天刚亮,日军又包围了鱼子山,将来不及撤离的30多名群众抓住,其中4人扔进火里活活烧死。制造了惨绝人寰的"鱼子山惨案"。

  1942年农历的腊月二十九,峨眉山的日伪军再次包围了鱼子山,将住在西山坡窝棚里的李家7口,上至70多岁的老人,下到刚满周岁的婴儿全部刺死。并且逼被抓住的村民说出游击队和兵工厂的下落,村民们不说,日寇就把人拉出来用刀砍,可怜这些人死后都无人收埋,竟为野狗吞噬!从1933年5月日军侵入平谷境开始,至1945年9月13日日伪军逃往三河的12年期间里,鱼子山村共有180多人被杀害,2000多间房屋被烧毁,鱼子山成为一片焦土。

  但是,在多年的抗日斗争中,鱼子山人民在党的领导下,始终以顽强的精神,坚持斗争,从来没有向日本侵略者屈服过,素有“铜南山、铁北寨、打不垮的鱼子山”之称。在解放后,上级党组织称鱼子山村为“打不垮,拖不乱”的铁鱼子山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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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ate and Mimesis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장황한 자습용 글을 써보기 이전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함께 사용하였던 용어인 미메시스(Mimesis, imitation,
모방)라는 용어에 대해

잠깐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미메시스"를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이 나오더군요.

 

모방() ·흉내와 함께 예술적 표현도 의미하는 수사학() ·미학 용어다. BC 5세기경 피타고라스파()에 따르면 음악은 수()의 미메시스(모방물)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플라톤에 이르러 비로소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플라톤은 여러 가지 개체()는 개체가 되도록 한 형상(: idea)을 흉내낸다고 하여, 이에 의해서 현상계()의 열등성을 증명하는 이유로 삼았다. [후략]

 

피타고라스학파가 플라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명백하긴 합니다만,

미메시스란 말 역시 피타고라스학파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해 다소의 의문을 품게
하는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다음은 제임스 허튼(James Hutton)의 <Poetics> 영어번역번 소개글(Introduction,
p8)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Poetics, 1982, Norton & Company, Ins.]

 

… in fact "imitation(mimesis)" used distinctly of the poet’s
function seems not to be found before Plato.

 

시인의 역할(혹은 기능)과 관련한 용어의 사용에 한정해서인지는 몰라도

플라톤(Platon, BC428-BC347) 이전의 문헌에서는 미메시스라는 용어가 발견되지
않는 것 같다는 내용입니다.

 

제임스 허튼은 미메시스 개념에 선행하는 개념으로 고르기아스(Gorgias, BC483?-BC376?)의

아파테(Apate, deception, 기만) 개념을 들고 있네요.

고르기아스는 이른바 소피스트였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말로 유명합니다.

 

아파테(Apate)는 원래 그리스 신화의 닉스(Nyx)의 딸로 "기만(deception)의
화신"입니다.

참고로, 닉스(Nyx)는 밤의 여신입니다.

 

고르기아스는 로고스(Logos, 이성)의 힘에 기만의 힘이 포함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인 혹은 작가(poet)는 기만을 통해 즐거움을 준다고 하였지요.

그리고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려면 개념이나 말이나 논리나 이성이 실은 기만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었을
만합니다.

 

플라톤이나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모두 소피스트들과의 대화와 그들에
대한 논박을 통해

그들의 사상을 정립해 나갔다고 할 수 있는데,

그에 따라 어떤 측면에서는 소피스트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Republic)>에 나오는

미메시스는 고르기아스의 아파테(Apate) 개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시인 혹은 작가는 구두장이를 모방하지만 실제 구두는 만들지
못합니다.

이 때의 미메시스(Mimesis, 모방)는 일종의 기만(deception)인 셈이지요.

플라톤에게는 이데아(Idea)만 진실이고, 현상계는 그에 대한 모방 또는 기만입니다.

그 현상계를 모방한 작가의 작품은 기만에 대한 기만, 즉 이중기만이 되겠지요.

고로 플라톤에게 예술이나 문학은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 혹은 문예창작론: Poetics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On Poet)의 저술 취지를

플라톤의 "예술 무용론적 시각"에 대한

반박적인 답변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제게 시간이 허락되는 한도 내에서 다음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보탠 다음 내친 김에 그에 대해 좀더 자세히
읽어보는

기회를 가져보고자 합니다.

 

그냥 자습용입니다. 아무도 안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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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逍遙遊)-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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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붕지배 부지기기천리야]

 

붕의 등은 그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怒而飛 其翼 若垂天之雲

[노이비 기익 약수천지운]

 

붕이 힘차게 날 때 그 날개는 마치 하늘의 구름이 드리워진 것과 같다.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시조야 해운즉장사어남명 남명자 천지야]

이 새는 바다의 기운을 타고 남명으로 가고자 한다. 남명은 하늘의 연못이다.

 

* 참고1 : 若(약)은 "마치 무엇무엇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 참고2 : 垂(수)는 "드리우다"라는 뜻으로, "수렴청정"이라고
할 때 이 글자를 씁니다.

* 참고3 : 徙(사)는 "옮기다"인데, ‘이사하다’란 말을 쓸 때 이 글자가
쓰입니다.

* 참고4 : 將(장)은 ‘장군’이라는 뜻 외에 "장차 무엇무엇을 하려하다(Will)"의
뜻이 있습니다.

             [예문
子將何之? "자네는 어디로 가려하는가?"]

* 참고5 : 조선시대 위대한 성리학자인 조식 선생의 호가 남명(南冥)이기도
합니다. 그가 장자의 영향을 받은 듯 합니다.

 

 

 

[世經評解]

 

곤(鯤)도 크지만, 붕(鵬)도 대단히 큽니다.

그런데, 붕(鵬)이 큰 것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변화되기 이전 상태인 곤(鯤)이 큰 것과 연관되는 듯합니다.

즉 곤(鯤)이 엄청나게 큰 존재였기 때문에 붕(鵬) 역시 엄청나게 큰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장자(莊子)를 해석한 사람 중에

감산(憨山, 1546-1623: 중국 명나라 때 승려)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감산의 해석에 따르면, 곤(鯤)과 붕(鵬)은 모두 성인(聖人)에 대한 비유 혹은 상징이랍니다.

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기는 있습니다.

저도 한 때는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할 경우 곤(鯤)은 복룡(伏龍) 혹은 와룡(臥龍)의 이미지를
얻게 되는 것과 대체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하여 곤(鯤)은 성인이 세상에 나가기 전 모습이고,

붕(鵬)은 세상에 나간 이후의 모습이라고 해석해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감산의 해석을 너무 교조적으로 고수하면서 책을 읽어나갔을 경우,

장자가 성인(聖人)에 대해 별다른 집착을 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사실과

충돌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는 합니다.

이 책을 끝까지 계속 읽다보면,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구절이 종종 나오기는 합니다.

장자가 보기엔 때때로 요순(堯舜)이나 티끌이나 별 차이도 없습니다.

노자(老子)의 생각도 대체로 비슷해 보입니다.

아무튼 곤(鯤)과 붕(鵬)에 대한 감산(憨山)의 해석에 제가 크게 반기를 들었던 때가 있었지요.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그 반발은 아직도 지속 중입니다.

적어도 성인(聖人)은 남들이 그렇게 불러서 그 이름을 취한 것이긴 하나,

성인이 날 때부터 별종이라거나 일반인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헤겔(Hegel, F.)을 공부할 때에는 “발전적 인식론”의 차원에서

곤(鯤)과 붕(鵬)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즉 곤(鯤)은 상대적으로 맹아적 인식의 단계이고 붕(鵬)은 “절대정신으로
가는 과정”
혹은

좀 더 고차적인 인식의 상태로 나아간 것 혹은

고차적인 인식(진리 또는 南冥 또는 大道)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해석해 보기도
했던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럴 경우 인식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는 이미지가 생기기도 하는데,

곤(鯤)은 원래부터 컸다는 점에서 좀 아귀가 맞지 않는 점이 생기기도 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과정이 어느 정도까지는 “순탄해” 보입니다.

[실은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이 나아가는 과정 역시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고, '정신'은 종종 커다란 혼란과 오류를 겪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지적고투조차도 곤에서 붕이 되는
과정보다는 상대적으로 순탄해 보입니다.]

곤에서 대붕(大鵬)으로 변하는 과정은 제게는 전혀 순탄해 보이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제게

곤(鯤)의 이미지에 새로운 상념들이 추가되었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좀 어렵습니다만,

설명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역사상 존재했던 일부 유태인들이 처했던 상황을 곤(鯤)으로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 일부 유태인들의 예를 들자면,

지그문트 프로이트(Freud, S.), 베네딕트 스피노자(Spinoza, B.),

구스타프 말러(Mahler, G.), 칼 맑스(Marx, K.) 등입니다.

적어도 제 생각엔,

유태인들이 선천적으로 뛰어난 인종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처했던 환경이 “인식의 새 지평”을 여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곤(鯤)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고 생각해 봅니다.

우선 위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처했던 환경에는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태인이면서 유태교도가 아니었습니다.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유태교를 버린 사람들이거나 혹은 그러한 사람들의 자식들이죠.

따라서 유태인들은 그들을 배신자로써 경멸했을 만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고도 기독교도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유태인 취급을 받았지요.

말러의 경우엔, 좀 더 곤란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러는 심지어 체코 태생이었기도 하였으니까요.

체코 사람들은 유태인을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말러가 자신의 음악적 꿈을 이루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가자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말러를 “쓰레기 같은 체코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당시 빈 필하모니는 “카톨릭교도”만 들어갈 수 있어서

유태교를 버리게 된 말러는 유태인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했죠.

독일에 가면 “오스트리아 촌놈” 소리를 들었고…

어딜 가도 그가 편히 안주할 곳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안주하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세상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말러는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각고의 노력을 하였고,

그 상태에 이르게 되자 남들은 그를 천재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말러에게 있어 “천재”란 말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는 천재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암울한 상태를 돌파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남들이 그를 천재라 부르게 된 것일 뿐입니다.

스피노자나 맑스나 프로이트도 비슷합니다.

그리고 꼭 그와 같은 처지에 처했던 이들 유태인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와 유사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지요.

어쩌면 장자 역시도 그랬을지 모릅니다.

어딜 가도 안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그 환경 자체가 “두 가지 선택지
중 한 가지 선택”을 강요합니다.

하나는 "낙오자" 혹은 “망나니”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남들이 말하는 “천재” 또는 "성인(聖人)이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의 경우, 될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다보니 남들이 그렇게 부르게 된다는 뜻]

일단 그들은 "낙오자" 혹은 “망나니”가 될 만합니다.

천덕꾸러기들이 망나니나 범죄자 혹은 미친놈 혹은 자살행위자가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좀 당연한 귀결로 보이기까지 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천재” 또는 "聖人"이 될 수 있다는 의미는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일반인들의 상식”을 쉽게 공유하지 못해서입니다.

보통 상식이란 “자신이 속해 있다고 생각되는 무리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무데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뭐가 되겠습니까?

"왕따로 차별받다가 비참하게 죽거나 범죄자가 되거나 정신병자가
되거나" 혹은

“사람들의 상식을 다 부수어버리는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이를
실천해” 버리거나 둘 중의 하나만

택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가령 프로이트는 유태인의 상식에도 속하지 못했고,

게르만 공동체의 상식에도 속하지 못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유태인의 상식과 게르만 공동체의 상식을 모두

초월하는 혁신적인 사상을 만들어 오늘날 상식의 일부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적어도 당시 현실 속에서 “막혀있던 사고의 장벽”을 그들이 부순 것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곤과 붕을 해석할 경우,

먼저 곤(鯤)의 상태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즐거운 상태는 아닐 것입니다.

매우 암울한 상황이고, 때로는 미쳐 죽어버릴 것 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러한 상황에서는 실제로 미쳐 죽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곤(鯤)에겐 “쉽게 상식에 속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것(보편 혹은 道)에 속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곤(鯤)은 결코 작지 않은 것입니다. 대단히 커다란 것이죠.]

바로 그 자리에서 쓰러지면 그냥 허무하게 죽는 것일 뿐이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그 상황을 돌파하면 대붕(大鵬, 진리추구자)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게 위 원문 구절에 대한 저의 최근 해석입니다.

붕(鵬)은 남명(南冥)을 향해 날아갑니다.

남명은 무엇일까요?

다시 감산의 해석을 들먹이자면, 남명은 왕이 남면(南面)하는 것이라 합니다.

옛날 중국 궁궐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전(가령, 경복궁)은

대체로 남쪽을 바라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일단 궁궐 뒤에 산이 있어 북풍을 막아주고 남쪽의 따뜻한 햇살을

받게 된다는 기본적 상식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 같은데,

아무튼 그렇게 하여 남면(南面)은 왕 혹은 왕과 같은 권위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지요.

남명에 대한 감산의 해석이 딱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해석에 정답 같은 것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으니까요.]

성인(聖人)을 들먹이며 곤(鯤)과 붕(鵬)을 해석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저로서는

남명에 대한 감산의 해석에도 역시 반기를 듭니다.

저는 좀 더 소박하게 남명을 생각합니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 즉 만물은 음(차가움, 괴로움)을 피하고 양(따뜻함,
행복)을 끌어안으려 한다.

즉 제 생각엔, 남명은 그냥 양(陽)일 뿐입니다.

북반구에서 양은 남쪽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행복한 것(또는 자유로운 것 또는 大同)을 추구하는 것이죠.

다만, 곤(鯤)과 같은 어려운 상태를 각고의 노력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대붕(大鵬)이 될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고(아니면 죽음),

대붕이 되어 남명(南冥)에 도달해갈 경우,

사람들은 때때로 그를 비꼬기도 하지만 때때로 그가 “천재”니 “성인”이니 “구세주”니 하면서

온갖 쓸데없는 말들을 그에게 갖다 붙여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남명(南冥)이 어떤 의미에서 왕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는 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를 “왕”으로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왕에 관심이 없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에게 물었지요. “네가 유태인의 왕이라며?” 예수왈, “그것은 단지
너의 말이다.”]

장자 역시 왕에 관심이 없습니다.

삶의 행복을 찾으면 그 뿐이지 왜 쓸데없이 왕이 되고 싶어 했겠습니까?

다만, 예수나 장자는 오로지 보편적 행복만이

자신의 암울한 조건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는 조건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몇몇 사람들의

“특수한 행복”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감산이 말하는 왕의 의미는 상징적인 것에 머물고,

예수를 왕이라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기는 하기 때문에

제가 감산의 해석을 전면적으로 부인하지는 않기도 하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징적인 의미를 진짜 “왕(세속적 권세와 출세,
자기자신의 돋보임, 일등, 최고)”의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다고 판단하기에 구태여 제 해석을 보탠 것뿐입니다.

살다보면, 그 경험으로 인해 제 머리속에서

또 다른 해석이 나오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현재까지는
대체로 이와 같이 해석하고 있는 중입니다.

문득 이 세상 사람 거의 대부분이 곤(鯤)에 해당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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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逍遙遊)-1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북    명   유    어      기
   명   위   곤       곤
  지    대        부   지
  기    기    천   리   야]

 

북쪽바다(혹은 북쪽의 어두운 곳, 북쪽의 신묘한 장소)에 물고기가 있었다.

그 이름은 곤(鯤)이다. 곤은 크다.

너무 커서 그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다.

  

化而爲鳥 其名爲鵬

[화    이    위   조      기
   명    위   붕]

 

이 곤이라는 물고기는 새가 된다. 그 새의 이름은 붕(鵬)이다.

 

 

 

* 참고 : 위 원문에서 기천리(幾千里)는 수천리(數千里)라고 봐도 되겠지요. 기(幾, 기미 기)는 "몇"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일상용어에서도 "그 수가 기천(幾千)이다" "기천(幾千)
명의 인파"와 같은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世經評解]

 

제가 처음 장자(莊子)를 읽었을 때, 장자의 첫편인 "소요유"의 맨처음
문장인 위 구절들을 읽고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도대체 뭔 소리여? 이 인간 미친놈 아녀?"라는 말이 자동적으로 나왔을
정도입니다.

"갑자기 웬 물고기? 그리고 그 물고기는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물고기라…"

"그건 그렇다 치고, 왜 물고기가 또 갑자기 새가 되남? 미치겠군."

 

그렇다면, 그 동안 여러 차례 이 구절을 읽고 음미했을 뿐만 아니라

김충렬 선생의 도움까지 받아서 해석해 보기도 했던 제가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를
과연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단 한 마디로 대답하겠습니다. 잘 모릅니다.

김충렬 선생도 나름 자신의 해석을 하시긴 하였지만, 장자의 진의는 선생도 모릅니다.

누군가 제게 장자가 애당초 이 구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진의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그건 장자나 알고 있겠지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럼 왜 계속 읽어도 여전히 잘 알지도 못하는 장자를 읽고 있느냐고 반문하실
분도 혹 계실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저는 장자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 마음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장자를 읽는 매력은 거기에 있습니다.

 

곤(鯤)은 무엇이고 붕(鵬)은 무엇이냐?

일단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이 구절 이후의 장자의 말들을 더 들어봐야
하긴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을 다 들어도 여전히 곤은 무엇이고 붕은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신 소요유편을 읽을 때마다 곤의 의미와 붕의 의미는 달라지거나

혹은 삶의 경험이 축적될수록 계속해서 거기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기는 했습니다.

 

영화를 볼 때도, 소설을 볼 때도 거기에 푹 빠지려면,

영화나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마치 내 자신과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야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곤과 붕도 내 자신이 될 것입니다.

곤이 무엇인지 붕이 무엇인지 여전히 분명치는 않으나 적어도 곤이 변화해서 붕으로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나는 곤일 때도 있고 붕일 때도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자신의 처지와 생각이

극적으로 변화했던 시점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그 경험은 대체로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곤은 어느 장소에 갇혀 있는 상태이고, 붕은 그 장소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는
이미지를 줍니다.

 

장자가, 특히 장자의 소요유가 제 나름대로 읽히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제가 어느 장소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부자유를 절감하고 있을 때였죠.

그 상태에서는 곤이 붕이 되고 붕이 날아가는 모습만 상상해도 즐거워질 수 있습니다.

 

곤과 붕의 의미는 제게 그렇게 다가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글은 계속됩니다. 몇 년 걸리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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