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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붕지배 부지기기천리야]
붕의 등은 그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怒而飛 其翼 若垂天之雲
[노이비 기익 약수천지운]
붕이 힘차게 날 때 그 날개는 마치 하늘의 구름이 드리워진 것과 같다.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시조야 해운즉장사어남명 남명자 천지야]
이 새는 바다의 기운을 타고 남명으로 가고자 한다. 남명은 하늘의 연못이다.
* 참고1 : 若(약)은 "마치 무엇무엇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 참고2 : 垂(수)는 "드리우다"라는 뜻으로, "수렴청정"이라고
할 때 이 글자를 씁니다.
* 참고3 : 徙(사)는 "옮기다"인데, ‘이사하다’란 말을 쓸 때 이 글자가
쓰입니다.
* 참고4 : 將(장)은 ‘장군’이라는 뜻 외에 "장차 무엇무엇을 하려하다(Will)"의
뜻이 있습니다.
[예문
子將何之? "자네는 어디로 가려하는가?"]
* 참고5 : 조선시대 위대한 성리학자인 조식 선생의 호가 남명(南冥)이기도
합니다. 그가 장자의 영향을 받은 듯 합니다.
[世經評解]
곤(鯤)도 크지만, 붕(鵬)도 대단히 큽니다.
그런데, 붕(鵬)이 큰 것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변화되기 이전 상태인 곤(鯤)이 큰 것과 연관되는 듯합니다.
즉 곤(鯤)이 엄청나게 큰 존재였기 때문에 붕(鵬) 역시 엄청나게 큰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장자(莊子)를 해석한 사람 중에
감산(憨山, 1546-1623: 중국 명나라 때 승려)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감산의 해석에 따르면, 곤(鯤)과 붕(鵬)은 모두 성인(聖人)에 대한 비유 혹은 상징이랍니다.
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기는 있습니다.
저도 한 때는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할 경우 곤(鯤)은 복룡(伏龍) 혹은 와룡(臥龍)의 이미지를
얻게 되는 것과 대체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하여 곤(鯤)은 성인이 세상에 나가기 전 모습이고,
붕(鵬)은 세상에 나간 이후의 모습이라고 해석해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감산의 해석을 너무 교조적으로 고수하면서 책을 읽어나갔을 경우,
장자가 성인(聖人)에 대해 별다른 집착을 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사실과
충돌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는 합니다.
이 책을 끝까지 계속 읽다보면,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구절이 종종 나오기는 합니다.
장자가 보기엔 때때로 요순(堯舜)이나 티끌이나 별 차이도 없습니다.
노자(老子)의 생각도 대체로 비슷해 보입니다.
아무튼 곤(鯤)과 붕(鵬)에 대한 감산(憨山)의 해석에 제가 크게 반기를 들었던 때가 있었지요.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그 반발은 아직도 지속 중입니다.
적어도 성인(聖人)은 남들이 그렇게 불러서 그 이름을 취한 것이긴 하나,
성인이 날 때부터 별종이라거나 일반인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헤겔(Hegel, F.)을 공부할 때에는 “발전적 인식론”의 차원에서
곤(鯤)과 붕(鵬)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즉 곤(鯤)은 상대적으로 맹아적 인식의 단계이고 붕(鵬)은 “절대정신으로
가는 과정”
혹은
좀 더 고차적인 인식의 상태로 나아간 것 혹은
고차적인 인식(진리 또는 南冥 또는 大道)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해석해 보기도
했던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럴 경우 인식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는 이미지가 생기기도 하는데,
곤(鯤)은 원래부터 컸다는 점에서 좀 아귀가 맞지 않는 점이 생기기도 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과정이 어느 정도까지는 “순탄해” 보입니다.
[실은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이 나아가는 과정 역시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고, '정신'은 종종 커다란 혼란과 오류를 겪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지적고투조차도 곤에서 붕이 되는
과정보다는 상대적으로 순탄해 보입니다.]
곤에서 대붕(大鵬)으로 변하는 과정은 제게는 전혀 순탄해 보이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제게
곤(鯤)의 이미지에 새로운 상념들이 추가되었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좀 어렵습니다만,
설명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역사상 존재했던 일부 유태인들이 처했던 상황을 곤(鯤)으로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 일부 유태인들의 예를 들자면,
지그문트 프로이트(Freud, S.), 베네딕트 스피노자(Spinoza, B.),
구스타프 말러(Mahler, G.), 칼 맑스(Marx, K.) 등입니다.
적어도 제 생각엔,
유태인들이 선천적으로 뛰어난 인종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처했던 환경이 “인식의 새 지평”을 여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곤(鯤)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고 생각해 봅니다.
우선 위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처했던 환경에는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태인이면서 유태교도가 아니었습니다.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유태교를 버린 사람들이거나 혹은 그러한 사람들의 자식들이죠.
따라서 유태인들은 그들을 배신자로써 경멸했을 만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고도 기독교도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유태인 취급을 받았지요.
말러의 경우엔, 좀 더 곤란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러는 심지어 체코 태생이었기도 하였으니까요.
체코 사람들은 유태인을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말러가 자신의 음악적 꿈을 이루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가자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말러를 “쓰레기 같은 체코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당시 빈 필하모니는 “카톨릭교도”만 들어갈 수 있어서
유태교를 버리게 된 말러는 유태인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했죠.
독일에 가면 “오스트리아 촌놈” 소리를 들었고…
어딜 가도 그가 편히 안주할 곳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안주하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세상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말러는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각고의 노력을 하였고,
그 상태에 이르게 되자 남들은 그를 천재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말러에게 있어 “천재”란 말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는 천재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암울한 상태를 돌파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남들이 그를 천재라 부르게 된 것일 뿐입니다.
스피노자나 맑스나 프로이트도 비슷합니다.
그리고 꼭 그와 같은 처지에 처했던 이들 유태인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와 유사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지요.
어쩌면 장자 역시도 그랬을지 모릅니다.
어딜 가도 안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그 환경 자체가 “두 가지 선택지
중 한 가지 선택”을 강요합니다.
하나는 "낙오자" 혹은 “망나니”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남들이 말하는 “천재” 또는 "성인(聖人)이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의 경우, 될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다보니 남들이 그렇게 부르게 된다는 뜻]
일단 그들은 "낙오자" 혹은 “망나니”가 될 만합니다.
천덕꾸러기들이 망나니나 범죄자 혹은 미친놈 혹은 자살행위자가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좀 당연한 귀결로 보이기까지 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천재” 또는 "聖人"이 될 수 있다는 의미는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일반인들의 상식”을 쉽게 공유하지 못해서입니다.
보통 상식이란 “자신이 속해 있다고 생각되는 무리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무데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뭐가 되겠습니까?
"왕따로 차별받다가 비참하게 죽거나 범죄자가 되거나 정신병자가
되거나" 혹은
“사람들의 상식을 다 부수어버리는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이를
실천해” 버리거나 둘 중의 하나만
택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가령 프로이트는 유태인의 상식에도 속하지 못했고,
게르만 공동체의 상식에도 속하지 못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유태인의 상식과 게르만 공동체의 상식을 모두
초월하는 혁신적인 사상을 만들어 오늘날 상식의 일부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적어도 당시 현실 속에서 “막혀있던 사고의 장벽”을 그들이 부순 것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곤과 붕을 해석할 경우,
먼저 곤(鯤)의 상태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즐거운 상태는 아닐 것입니다.
매우 암울한 상황이고, 때로는 미쳐 죽어버릴 것 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러한 상황에서는 실제로 미쳐 죽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곤(鯤)에겐 “쉽게 상식에 속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것(보편 혹은 道)에 속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곤(鯤)은 결코 작지 않은 것입니다. 대단히 커다란 것이죠.]
바로 그 자리에서 쓰러지면 그냥 허무하게 죽는 것일 뿐이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그 상황을 돌파하면 대붕(大鵬, 진리추구자)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게 위 원문 구절에 대한 저의 최근 해석입니다.
붕(鵬)은 남명(南冥)을 향해 날아갑니다.
남명은 무엇일까요?
다시 감산의 해석을 들먹이자면, 남명은 왕이 남면(南面)하는 것이라 합니다.
옛날 중국 궁궐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전(가령, 경복궁)은
대체로 남쪽을 바라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일단 궁궐 뒤에 산이 있어 북풍을 막아주고 남쪽의 따뜻한 햇살을
받게 된다는 기본적 상식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 같은데,
아무튼 그렇게 하여 남면(南面)은 왕 혹은 왕과 같은 권위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지요.
남명에 대한 감산의 해석이 딱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해석에 정답 같은 것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으니까요.]
성인(聖人)을 들먹이며 곤(鯤)과 붕(鵬)을 해석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저로서는
남명에 대한 감산의 해석에도 역시 반기를 듭니다.
저는 좀 더 소박하게 남명을 생각합니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 즉 만물은 음(차가움, 괴로움)을 피하고 양(따뜻함,
행복)을 끌어안으려 한다.
즉 제 생각엔, 남명은 그냥 양(陽)일 뿐입니다.
북반구에서 양은 남쪽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행복한 것(또는 자유로운 것 또는 大同)을 추구하는 것이죠.
다만, 곤(鯤)과 같은 어려운 상태를 각고의 노력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대붕(大鵬)이 될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고(아니면 죽음),
대붕이 되어 남명(南冥)에 도달해갈 경우,
사람들은 때때로 그를 비꼬기도 하지만 때때로 그가 “천재”니 “성인”이니 “구세주”니 하면서
온갖 쓸데없는 말들을 그에게 갖다 붙여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남명(南冥)이 어떤 의미에서 왕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는 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를 “왕”으로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왕에 관심이 없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에게 물었지요. “네가 유태인의 왕이라며?” 예수왈, “그것은 단지
너의 말이다.”]
장자 역시 왕에 관심이 없습니다.
삶의 행복을 찾으면 그 뿐이지 왜 쓸데없이 왕이 되고 싶어 했겠습니까?
다만, 예수나 장자는 오로지 보편적 행복만이
자신의 암울한 조건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는 조건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몇몇 사람들의
“특수한 행복”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감산이 말하는 왕의 의미는 상징적인 것에 머물고,
예수를 왕이라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기는 하기 때문에
제가 감산의 해석을 전면적으로 부인하지는 않기도 하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징적인 의미를 진짜 “왕(세속적 권세와 출세,
자기자신의 돋보임, 일등, 최고)”의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다고 판단하기에 구태여 제 해석을 보탠 것뿐입니다.
살다보면, 그 경험으로 인해 제 머리속에서
또 다른 해석이 나오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현재까지는
대체로 이와 같이 해석하고 있는 중입니다.
문득 이 세상 사람 거의 대부분이 곤(鯤)에 해당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