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故)황장엽 선생…

조금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당신의 의견에 여러모로 큰 이견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남한 사람들이 쉽게 알아채기 어려웠을 고통과 외로움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여

늘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 모든 마음의 고통과 외로움에서 벗어나 편히 잠드시길 기원합니다.

 

제 관점에서 냉혹히 평가하자면, 당신께서는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여하신 게 그닥 많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이 땅의 2만 탈북자들의 상징적 버팀목이시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면,

당신의 떠남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부디 저세상에서라도 외롭고 서러운 탈북자들의 마음을 달래주시는

탈북자들의 수호신이 되어 주시고,

혹시라도 그들이 좌절하거나 과격해지거나, 포기하려 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보살펴 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저세상에서라도 남북의 평화통일을 끝까지 지켜봐 주십시오.

 

당신의 유해나마 당신의 그리운 고향 땅에 묻히실 그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더불어 당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많은 사람들 역시

즐겁게 뛰놀던 어린 시절의 그곳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온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카테고리 : 남북한그려보기
태그 : | 댓글 4개

소요유(逍遙遊)-12

而宋榮子 猶然笑之

[이송영자 유연소지]

 

송영자(宋榮子)는 그런 소견(협소한 소견 혹은 협소한
소견을 가진 인물)에 대해 비웃었다.

 

且擧世而譽之 而不加勤

[차거세이예지 이불가근]

 

그(송영자)는 온세상이 일어나 그를 칭송한다고 해도 애써
뭔가를 더 보태는 일이 없었고,

 

擧世而非之 而不加沮

[거세이비지 이불가저]

 

온세상이 그를 비난하거나 헐뜯어도 의기소침해지지 않았다.

 

  

  참고1 : 송영자(宋榮子)는
중국 전국시대 송나라의 현인으로 헛된 명성에 급급해 하는 삶을 비웃었다고 합니다.

  참고2 : 저()는
"의기소침해지다"라고 번역했는데, 원래는 "저지하다" 혹은 "막다"라는
뜻입니다. "저지하다"라는 뜻을 그대로 살려 번역할 경우엔, 모두가 비난해도 "그를 막지 못한다(而不加沮)"
정도가 되겠지요. 어느 게 나은가요?

 

 

 

[世經評解]

송영자가 비웃은 대상은 앞 문장(소요유-11)의 작은 새들,

즉 협소한 시각에 갇힌 사람들 혹은 협소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태도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태도를 비웃는 송영자는 사람들이 칭찬해도 우쭐대지 않고,

비난해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는 것인데요..

단테(Dante, A., 1265~1321)가 한 말, "제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
정도의 태도와 같은 것일까요?

 

위 송영자의 행동은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해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상식적인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이라면,

"외물(外物)"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갖는
행위로 바라볼 수 있겠지요.

이솝우화였던가요?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끌고 가는 이야기
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사람들의 비난"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결국 당나귀를 이고 가는 "최악의 선택"을 하지요.

그냥 처음부터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대로 하면 되었을 것을

"남의 눈치" 보다가 결국엔 이상해져버린 것입니다.

 

긍정적인 해석을 조금만 더 확장해 볼까요?

어떤 사람이 어떤 무엇인가를 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지요.

그리고 동시에 그 사람이 그 뭔가를 아주 잘하는 경우를 가정해
봅니다.

어떤 사람이 잘하는 사람인가요?

최고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잘하는 사람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최고가 되고자 한다는 것은 남들보다 앞서고 그로 인해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그런 것을 강하게 의식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는 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는 종종 아니 자주 막힐 수가 있습니다.

늘 결과를 먼저 생각하고 남을 너무 의식하는 것 자체가 독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때로 칭찬을 받으며 더 잘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칭찬의
부담 때문에, 때로는 비난의 공포 때문에

엄청나게 시달리게 되기도 하고 원래의 기량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길게 보면, 정말 뭔가를 잘하는 사람은 "최고가
되려는 욕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곤 합니다.

그 뭔가를 정말로 잘하는 사람은 그 뭔가를 스스로 즐기는 사람일
것입니다.

최고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은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을 앞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최고"에
관심이 없습니다.

즐겁게 하다보니, 남들이 최고라고는 하는데,

그에겐 그게 별 의미가 없지요.

가끔은 스스로 즐기는 과정을 거듭하다가 어느날 결과적으로 남들로부터 최고라는
소리를 듣고나서,

그 소리에 우쭐대기 시작한 후로 잘하던 것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원정 경기에 간 스포츠인이 관중석을 가득 메운 상대편
관중을 의식하지 않을수록 평소 기량을 발휘하는 것도 비슷하죠.]

[결과를 떠나서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 남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도 비슷할 것입니다.]

[위기지학(爲己之學)도 비슷하겠지요. 남들에게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학문이 아닌

자기자신의 수양은 물론, 어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위기지학이고,

남들에게 "내가 너보다 낫다"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학문을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번엔 송영자에 태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가능성을
한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부정적 평가가 가능할까요?

오히려 "꽉 막힌 고집쟁이"로 평가될 소지 역시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행동이 때로는 정말로 잘못된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그에
대해 남들이 진심으로 충고해 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들이 "그건 아니야"라고 충고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잘못을 못 깨닫고

원래 하던 행동을 계속 고집하기만 한다면 결국은 "꽉 막힌
고집쟁이" 정도밖에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평가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 평가의 가능성은

적어도 송영자의 행동에 국한해서 있을 수도 있는 것이긴 하지만,

소요유의 전체 내용으로 봐서는 오히려 "정반대"의
해석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즉 "꽉 막힌 행동"을 비판하기 위해 또 다른 형태의
"꽉 막힌 인물의 행동"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위 문장 뒤에서(소요유-13) 송영자의 행동 역시 "아직도
모자라다"라는 평가가 나오기는 하지만서도요.

[그에 대해서는 다음 글(소요유-13)에 쓰겠습니다.]

 

그렇다면, 송영자의 행동에 대해 부정적 평가의 소지를 완화할
수 있는 확대해석을 추가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다른 해석을 해 볼 수 있을까요?

어떤 행동을 할 때,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 그리고

그에 대한 남들의 평가 역시 "그러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벗어나는 데

사실상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가령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경우도 그 경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경우엔 결과가 좋게 나와서 남들이 칭찬해도,

단지 부득불 할 일을 한 것 뿐이기 때문에 칭찬으로 더 우쭐해질
일도 없고,

반대로 결과가 나쁘게 나와서 남들이 비난한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하여 의기소침해질 일 역시 없는 것입니다.

일례로, 내 배가 고파서 밥을 먹을 뿐인데,

남들이 "밥 잘 먹는다"고 칭찬한다고 해서 구태여
더 먹을 필요도 없고,

반대로 남들이 "작작 먹어라"라고 비난한다고 해서
먹어야 할 것을 먹지 않을 필요도 없겠지요.

그저 자기 양에 맞게 적당히 먹으면 그만입니다.

 

다시 말해, 송영자가 남들의 이목에 신경쓰지 않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처음부터 남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불필요한 행동"을 아예 하지 않거나 삼간다는
것이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처음부터 행위의 동기가

남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것이었을 경우,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 남들의 반응에 대단히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반면,

"꼭 필요한 일(반드시 해야 할 일)"이거나 그냥
단지 "자기가 좋아서 스스로의 범위 내에서 하는 일"일 경우,

굳이 남들의 이목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본다고 하더라도

마음 한 편에서 또 다른 종류의 의혹이 생길 수 있습니다.

외물(外物)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자재의 행동이 좋은 것이라고
해도,

"남을 의식하고 사는 게 오히려 인지상정(人之常情)에 가까운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

더 나아가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사회(社會)란 것이
성립될 수 있나?"라는 생각도 이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곰곰히 잘 생각해 보자면.., 칭찬과 비난은 도덕과 법질서의 근간일
수도 있습니다.

잘 하는 것을 칭찬하여 북돋아주는 것, 못 하는 것을 비난하여
자제시키는 것이 도덕과 윤리의 모양새고,

(아이를 키울 때도 그런 식으로 하지요..)

잘 하는 것에 상을 주고, 못하는 것에 벌을 주는 것(信賞必罰)이
법률의 기본 모양새 아닙니까?

 

자, 여기까지 오면 이제 꽤 커다란 혼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혼란이 필연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혼란인지 다시 정리해 보지요.

노자와 장자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상벌(賞罰)을

인위(人爲)로 보고, 혼란의 근원으로 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논리를 잘 듣다보면 원론상으로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가 특히 현대사회가 인위에 의해 온통 포위되어
있는 시공간이며,

그것을 되돌려 태고적으로 돌아갈 방법을 아무도 알 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타인의 칭찬과 비난에 대한 민감성, 그리고 상벌과 법률 체계는
이미 인간세계에 너무도 깊숙히 자리잡아

그것이 없었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할 수 있죠.

 

제게는 그게 화두(話頭)입니다.

이미 그렇게 되어 버린 상황, 인위의 바다에서 "모두가
완전히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그 상황에서 무위(無爲)를 생각한다는 것 혹은 무위를 실천한다는

혹은 송영자처럼 남들의 이목에 상관없이 자유자재의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 그 자체가 화두겠지요.

 

제가 무슨 "답"을 제시하고자 이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시는 분이 계시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저는, 단지, 혹시라도 같이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둘러보는 것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이 같은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생각치 못했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전 글을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소요유-1[/brothering/18785]

소요유-2[/brothering/19362]

소요유-3[/brothering/19713]

소요유-4[/brothering/19857]

소요유-5[/brothering/19941]

소요유-6[/brothering/20076]

소요유S1[/brothering/20084]

소요유-7[/brothering/20587]

소요유-8[/brothering/32922]

소요유-9[/brothering/32988]

소요유-10[/brothering/33045]

소요유S2[/brothering/33145]

소요유-11[/brothering/33145]

카테고리 : 장자철학재독해
태그 : , , , , | 댓글 8개

새로운 류행을 따르는 조선처녀들[인민일보기사-논평생략]

새로운 류행을 따르는 조선처녀들

조선주재 본사기자 주지연

2010년 07월 26일 13:51

사진은 평양거리의 세련된 옷차람을 한
조선처녀들이다.

올해 여름의 평양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이 번쩍 뜨이게 한다. 사람들의 인상속에서 조선사람들은 언제나 단조로운 검은색,
흰색과 회색의 옷을 입는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이것은 오해에 불과하다. 올해 여름의 평양거리를 보면 정녕 사람들로 하여금 눈이 부시게 한다.
일상 작업복외에 많은 조선의 젊은 녀성들은 주홍색의 샤쯔, 조밀한 꽃무늬의 원피스, 홀치기염색처리를 한 얇은 재질의 복장세트는 물론 또 무늬가
많은 각종 T샤쯔도 좋아한다. 조선에 장기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찬양하는 말투로 이런 현상을 “조선녀성의 새로운 류행”이라고
말하고있다.《인민일보》(2010년 07월 26일 제15면)

* 참고 : 인민일보 조선어판입니다.

 

今夏的平壤街头,许多年轻女性爱上了朱红色衬衫、碎花连衣裙、扎染薄纱套装、五颜六色的T恤衫 

朝鲜姑娘时尚起来了(第一现场)

人民网驻朝鲜记者  周之然

2010年07月26日00:00  来源:人民网

 【字号
打印 留言 论坛 网摘 手机点评 纠错
E-mail推荐:  

本文记者 周之然

  图为平壤街头穿着时尚的朝鲜姑娘。  人民网记者 周之然摄

  今年夏天的平壤街头,让人眼前一亮。在人们的印象里,朝鲜人总是穿着单调的黑、白、灰色的衣服,其实那是一种误解,看看今年夏天的平壤街头,着实让人眼花缭乱。除了日常的工作装以外,许多朝鲜年轻女性爱上了朱红色的衬衫、碎花连衣裙、扎染的薄纱套装,还有各种五颜六色的T恤衫。常驻朝鲜的外国人以赞扬的口吻称:这种现象叫“朝鲜女性的新时尚”。

  平壤市民尤其是年轻女性的这种变化,引人注目,在同常驻平壤的一些中国人聊到这个话题时,他们也很感兴趣。一位在金日成综合大学留学5年的中国留学生说:“现在朝鲜的年轻姑娘们真的是越来越会打扮了。平壤一些市场上出售的衣服同我刚来的时候相比风格有很大变化,许多衣服式样真的很时尚,我们留学生偶尔也会去‘淘淘宝’呢。”

  据了解,不光是普通的市场上有如此的变化,在平壤的外汇商店中,体现得更加明显。到外汇商店购买进口服装的平壤市民络绎不绝。这些服装大多是从中国、日本还有欧洲进口的,有许多平壤女性热衷于购买最新款式的服装。在5月份结束的平壤国际商品展览会上,一位中国商家告诉记者,服装同日用品一样是展览会最畅销的商品,拿来多少,卖多少,而且越是颜色鲜艳的越是最先卖完。

  不光年轻女性是时尚的追捧者,近期在朝鲜街头,好多年长的妇女们也褪去了传统单一的颜色,穿上了五颜六色的花衣裳。年长的妇女们大多钟爱“三件套”套装,有一些人还穿着半透明的蕾丝开衫。在朝鲜的“时尚圈”中,还有不能忽视的一群人,那就是朝鲜的“海归”们。他们有时穿的甚至比我们这些外国人还新潮。

  其实,朝鲜人有他们自己的服装理念。他们认为服装不仅反映了各个国家、各个民族的民族感情和生活风俗,也反映了相关社会的阶级性质,朝鲜人着装的标准是要符合社会主义生活方式,衣服要干净、端庄、朴素和美丽。在朝鲜人的服装文化中,非常重要的一点就是衣服的颜色和样式要和身材相协调,这对提高一个人的品位具有重大意义。

  可见,朝鲜人对美的理解是独到的,随着时代的发展,朝鲜人对美的理解也在逐渐发展,而且努力在适应和追赶这种变化。五颜六色的服装给炎炎夏日里的人们带来了些许清凉感,成为平壤市又一道亮丽的风景。

  (本报平壤7月25日电)

카테고리 : 뉴스스크랩논평
태그 : , , , | 댓글 7개

지만원박사와 조영환박사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이 꼭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긴 하지만,

때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워낙 극적인 변화들이 많아서 일일이 거론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1980년대의 "과격한 언사"들은 주로 운동권 혹은 좌파의 전유물에 가까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보수는 "화합", "균형", "조화", "통합"이라는
용어를 자주 강조했었고,

운동권 좌파들은 이를 "보수의 기만"이라고 여겼지요.

 

그런데, 요즘엔 거꾸로 된 것 같습니다.

요즘의 "과격한 언사들"은 소위 자칭 우파들에서 많이 나오고,

(온건한 보수들이 들으면 좀 기분 나쁘시겠지만..)

"화합", "조화", "통합"이란 말을 "좌파의
기만"으로 여기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과격함으로 꽤 유명하신 분들을 꼽자면, 조갑제 선생, 김동길 선생, 서정갑
대령 등을 꼽을 수도 있겠지만,

지만원 박사와 조영환 박사에 비할 바는 못 된다고 보기도 합니다.

실은 상대가 안 될 정도지요.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내용들에 대해 언급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실 만한 분들은 다 알고 계실 테니까요.

저는 그저 그동안 흘러간 세월의 변화가 무상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먼저 우리의 지만원박사님 모르시는 분은 설마 안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제가 지만원박사의 글을 처음 본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신동아>와 <월간조선> 등에 군사평론 등을 기고하였던 분이셨지요.

제 기억에는 꽤, 아니 매우 신선했습니다.

당시 제가 군사적 지식이 없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전문적인 분석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글도 논리적이고 문장도 깔끔했으며 무엇보다도 논의 자체가 재미있었습니다.

정말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군대에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있었구나!", "아! 그래, 이런 사람이
필요해!"라고요..

 

혹시 저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당시엔 저 말고도 그렇게 생각하셨던 분들이 좀더 많이 계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대중 전대통령이 지만원박사를 불러서 이 일 저 일을 같이 했을 정도이니까
그것은 대체로 사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지만원박사 말로도 한 때는 김근태의원하고도 잘 지냈던 적도 있고,

정동영의원하고도 잘 지냈던 적도 있었을 정도이지요.

 

뭐, 살다 보면 관계가 좋았다가도 서로 원수가 되는 일이야 아주 드문 일도 아니고..

지박사님의 옛 관계를 들춰내는 것을 목적으로 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단지, 예전에 제가 보았던 글에서 느껴졌던 객관성과 전문성,

그리고 냉철함(다시 보면 판단이 달라질 지 모르지만, 어쨌든..)이

요즈음 글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서…

세월의 무상함을 많이 느낀다는 이야기를 해 본 것입니다.

삶이 많이 고달퍼 보인다는 느낌도 들었지요.

심신이 지치지 않고서는, 아프고 불편한 심신 때문에 생기는 분노가 없고서는
그렇게 글 못 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의 오해일 수도 있고,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요즘 그분의 글에서는 근본적인 자신감이 느껴지기 보다는

끝모를 불안감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런 느낌을 들게 만드시는 분이 또 한 분 계시는데,

(실은 그 외에도 더 많기는 합니다만..)

바로 조영환 박사이십니다.

그 분이 무슨 일을 하시는 누구신지 아시는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예전엔 정치 비슷한 것을 하기도 하셨고, 요즘엔 뭐.. 언론인이라고 불러드려야겠지요.

"올인코리아"라고… 제가 홍보까지 해드리네요.

 

 

 혹시라도 예전에 조영환박사님께서 쓰신 책들을 읽어보신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은 저도 그리 꼼꼼히 본 것은 아닙니다.. 가령, <한국 대통령도 미국이
뽑나?>와 같은 책들…)

그 글들을 대충만 봐도 정말 세월이 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도 남을 겁니다.

아니, 그보다 좀더 더 지나고 나서인 "브레이크뉴스 시절"만 해도

지금과 같은 표현들은 잘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이 분 역시 경실련에서도 일하시고,

새천년민주당에서 김대중 전대통령과 함께 이 일 저 일을 같이 하셨던 분이기는
한데,

세월은 무상하여 "옛정은 사라지고 원한만 남은 관계"가 되긴 하였지요.

그건 그럴 수도 있다고 쳐도,

예전 글에서 보였던 비교적 담백하고 객관적이고자 애쓰던 문장의 흔적들은
어디로 갔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저 제 감회를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

그분들께서 현재 하고 계신 말씀들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것은 그분들의 자유라고 여깁니다.

제가 느끼는 어떤.. 끝 모를 "인생의 무상감".. 그것이 저를 아리게
합니다.

그건 제 문제이겠지요.

 

세월이 그렇게 변해가고 사람이 그렇게 변해간 것들 때문에 좀 우울하기도 합니다.

변하는 건 늘 있는 일인데, 제가 과민했나 봅니다.

 

그동안 사회가 어떻게 변한 것일까요?

사회학을 전공한 제가 이것을 묻고 있네요..

 

이런 이상한 글은 당분간 안 쓰는 게 제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조금, 아니 어쩌면 한참 쉬었다가, "장자" 이야기나 계속 이어나가면서
노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

카테고리 : 기본게시판사설
태그 : , | 댓글 12개

야당의 이재오 당선 운동, 보수언론의 이재오 낙선 운동

말도 안되는 소설을 써 보는 김에 한번 더 써 보겠습니다.

 

7.28 재보궐 선거에서

서울 은평을 선거구의 결과가 매우 중요하고 주목되는 이유는 대략 아실 것이라
봅니다.

"킹메이커 이재오 전의원"의 부활 여부가 달려 있는 선거이니까요.

누가 봐도 그 결과에 따라 향후 정국은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야당들이

이 선거구를 처음부터 포기하고 게임을 시작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상당히
많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일 후보를 내는 것에 실패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그럴 수도 있지요. 정치란 것이 그렇고요.

문제는 제1야당인 민주당이 "선거승리를 전제로 했을 경우" 사실상
"최악의 악수"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인물이 아무리 없어도 그렇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거의 가능성이 없는
수입니다.

제가 보기엔 포기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이에 대해,

가끔은 문득 "일부러 그런 악수를 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다시 말해, 야당이 내심 "이재오 당선"을 바라면서 그런 결정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지요.

 

비록 소설이지만, 야당 입장에서는 몇 가지 점에서 "이재오 당선"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 첫번 째는, 이재오 전의원이

한나라당 내 "풍파의 진원지"가 될 것이란 은근한 기대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로 인해 한나라당이 쪼개질 가능성도 없지 않으니까요.

그에 따라 두 번째로 한나라당 내 분열을 이용하여 전술적으로 "정치적 카드"의
수를 늘리는 것이 가능해 질 수도 있겠지요.

최종적으로는 그 분열로 인한 반사이득을 극대화하여 정권을 재창출해 내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야당 의원들이 아주 없지는 않아 보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몽상" 수준이기는 합니다만..

 

재미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른바 친박계, 더 나아가 "박사모"들이 은근히 "이재오 낙선"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은 "은근한" 수준이 아닐 정도이긴 합니다.

"야당들은 은평을구 후보 단일화하라!"는 이야기가 야당들 내부에서
나오지 않고

오히려 "박사모"들의 입에서 노골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실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재미의 극치는 아마도 언론, 그것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와 같은 보수언론들이지
않나 싶습니다.

이들 언론들에서 "이재오"에 대한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조선일보가 "영포회"를 거의 특종감으로 삼아가며, 엄청나게 뒤흔들어
놓았죠.

아마도, 그 시점에 민주당은

"아, 이러다가 이재오가 낙선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결국 "노골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낮은 후보를 들이대는 초강수로 대응하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민주당의 초강수(?)"에 화들짝 놀란 중앙일보가

"아, 정말 이러다가는 이재오가 당선될 지도 몰라!"하고 노심초사하다가

"강용석 의원 성희롱사건"을 특종으로 몰아붙이면서 "이재오 낙선
운동"의 불씨를 꺼드리지 않고자 상당히 애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워낙 "완벽하게 가능성 없는 후보"를 들이댄 데다가 이재오계측에서

매우 신속하게 "꼬리 자르기"를 하는 바람에

이재오 후보의 지지율은 그다지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초조해진(?) 중앙일보가 오늘 새벽 다시 "남경필 의원 부인 사찰"
건을 기사화했습니다.

이 기사를 그 다음으로 동아일보가 받아서 전했지요.

한겨레신문은 거의 7시간이나 지난 연후에 비로소 그 기사가 떳을 정도로 늦었습니다.

 

음, 제가 보기엔 그 정도로도 "이재오 낙선"은 쉽지 않을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낙선운동"이 쉽게 포기 되지도 않을 것이긴 합니다.

9회말 쯤에 마지막 구원투수가 나올 수도 있을 터인데, 그게 무엇인지 벌써부터
매우 궁금해집니다.

 

앞에서 제가 소설이라고 한 거 기억하시죠?

기억하시면, 된 것입니다.

 

단,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 누구의 뜻이든 "반드시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마지막으로 소설을 벗어나

간단한 멘트로 현실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회창 전총재는 친이계의 "보수대연합론"에 대해 "택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던 바 있지요.

그러면서도 "박근혜 의원"쪽과는 보수대연합을 할 수도 있다는 언급을
해버렸습니다.

판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보수언론들도 잘 알 것입니다.

카테고리 : 말도안되는소리
태그 : , , , , , , | 댓글 20개

혹시 그 칼날은 다른 누군가를 겨냥한 것이었나?

혹시라도 중앙일보가 작심하고 한나라당 강용석 의원을 날려버렸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그 행위가 당연히 지탄받아야 할 만한 것이고,

당내 제명 조치 역시 누가 봐도 뭐라고 반박할 여지가 없는 것이긴 합니다.

또한 언론사 기자가 그런 정보를 파악하고도 그냥 좌시하는 것은

언론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건에
대한

중앙일보의 최초 보도는 흠잡을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강용석 의원의 평소 행실과 과거 전력을 보면,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문제 삼았을 만한 기회가
적지 않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꼭 지금"이라 표현한 것은 지금이 바로 "7.28 보궐선거"를

앞둔 시점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것이라면 저도 좋겠습니다.

 

하지만, 중앙일보 기자가 양심에 따른 폭로를 했다고 하더라도

중앙일보 편집 데스크가 "한나라당을 보호하기로 마음 먹었더라면"
사전에

기사화를 저지했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봅니다.

평기자들이 상대적으로 "언론인의 양심"으로 때때로 괴로워 하는 것에
비해 데스크는

상대적으로 "정치적인" 데가 있으니까요.

권력의 눈치를 보는 지점이지요.

 

"레임덕"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데스크가 권력의 눈치를 안 본 것일까요?

아니면, 혹시라도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도 아니면 순수한 행동의 결과였을까요?

일단은 그저 순수한 언론 행위의 결과로 보고 싶기는 합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중앙일보의 보도를 칭찬해야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네티즌들은 강용석 의원의 과거 참여연대 시절 "삼성 괴롭히기 전력"을
의심해 보기도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 의견에 대해 잠시나마 순간적으로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언뜻 들기도 하였지만,

그렇다면 그것이 왜 "꼭 지금"인가에 대한 답은 거기에 없습니다.

 

만에 하나, 혹시라도 은평을구 보궐선거 후보인 이재오 전의원을 겨냥한
것이라면,

중앙일보가 작정하고 강용석 의원을 날려버렸을 가능성이 존재할까요?

그런 경우라면 실제 타겟은 이재오 후보가 되겠지요.

그럼 더 크게는? 한나라 친이계? 더 나아가 이명박 대통령? 설마..

 

하지만, 적어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엮인 것이 맞습니다.

강용석 의원이 친이계이고, 이재오 전의원의 공천을 받았으며,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과 사돈 지간이니…

친이계 입장에서는 제대로 꼬인 것이 맞기는 맞지요.

 

저는 중앙일보의 강용석 의원 보도의 순수성을 믿어보고 싶기는 합니다.

하지만, 중앙일보의 이후 행태가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따라 그 순수성은 의심될
수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레임덕"을 간파하고, 벌써부터 차기 정권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말입니다.

실제로, 이미 중앙일보는 "대통령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고로, 권영빈 전중앙일보 사장이 최근 이명박 정부에게 "리빠똥(거꾸로
쓰면 "똥파리") 보수"라고 맹공을 퍼부은 바 있지요.

물론 원론적으로는 언론의 성역이란 없는 것이고, 대통령이 언론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하란 법은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니까요.

 

평소 이명박 대통령을 전적으로 지지해 본 적이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반대해 본 적도 없지요…)

그래도 요즘엔 때때로 대통령이 조금은 안쓰럽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레임덕이 오기 전에 최소한 남북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하고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요…

 

그저 소설을 써 본 것입니다.

중앙일보….

설령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보도해야 할 기사는 당연히 보도해야 하겠지요.

카테고리 : 말도안되는소리
태그 : , , , , , , | 댓글 6개

동아일보, 사회통합-좌우소통-공존상생 기획기사

요 며칠 사이 동아일보에서 기획기사를 연재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기획기사의 큰 제목은 "대한민국, 공존을 향해"입니다.

 

아마 작년 하반기였던 것 같은데요.

경향신문에서 "소통합시다"라는 주제로 기획기사를 연재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에 유독 관심이 많은지라, 그 기획기사들에 대해

매우 흥미롭게 지켜봤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비슷한 시기에

중앙일보에서도 다소 유사한 시도를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최근에 동아일보에서도 그와 관련된 기획연재기사가 등장한 것에 대해

매우 환영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적어도 몇 년 동안 동아일보가 한국내 사회갈등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저 개인적으로는 다소 유감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기획기사를 보고 그 유감은 어느 정도의 희망으로 전환되고 있는
중입니다.

"동아일보"도 이제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전부터 조금씩 내부에서 그런 고민이 진행되고 있었을 지도 모르죠.

다만, 여러 가지 정치적 맥락 등에 따라

잘 표면화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해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최근 일련의 시도에 대해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습니다.

기사를 작성하는 방식도 제가 보기엔 매우 신선합니다.

작년 경향신문에서 시도했던 방식과는 많은 차이를 나타내 보여준 기사들도 있었습니다.

경향신문에서는 주로 학자나 명망가 위주의 대담 형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 동아일보 기획기사에서는 -물론 그런 형식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 좀더
전방위적이고 포괄적입니다.

가령, 이번 기획연재기사에서는 일반 국민 수준의 "의식 차이"와 "불통",
"세대갈등" 등까지 아울러

논의의 범위가 이전보다 더 광범위해지고 논의의 깊이도

예전보다 더 깊어진 감이 있다고 봅니다.

 

제가 동아일보 기사에 대해 이렇게까지 칭찬해 본 적은 거의 처음입니다.

 

 

 

 <아래 사진은 2010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1면입니다.>

 

 

<아래 그림과 표는 2010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 "대한민국,
공존을 향해-1부"에 게재되었던 것입니다.>

카테고리 : 뉴스스크랩논평
태그 : , , , , | 댓글 2개

소요유(逍遙遊)-11

故夫知效一官 行比一鄕 德合一君

[고부지효일관 행비일향 합덕일군]

 

무릇 지식이란 하나의 관직에서나 효험이 있을 만한 것이고,

행동은 한 고을에서나 모범이 될 만하며, 덕(德)은 한 임금에게나
부합할 만한 것이다.

 

而徵一國者
其自視也 亦若此矣

[이징일국자 기자시야 약역차의]

 

그러므로 한 나라의 부름을 받은 자가 스스로에 대해 (자기가
대단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마치 이(작은 새의 소견)와 같다.

 

 

 

  [참고1] : 고부(故夫)는 표면상의
뜻으로는 "그러므로 무릇"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집어넣어
기계적으로 번역하면 좀 이상해 집니다. 즉 "그러므로 무릇(故夫)
무엇무엇한 것(중간의 내용들) 또한 이와 같은 따름이라(亦若此矣)(고
말할 수 있다)"라는
문맥으로 볼 수도 있지만, 중간 문장을 넣어 만든 최종 문장은 좀 이상해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무릇(대저,
보통, 일반적으로 말해) 무엇무엇하니()
무엇이 무엇하는 것은 역시 이와 같은 따름이다(亦若此矣)."라는
형식으로 번역해 보았는데, 뭐 어찌해도 대강은 파악된다고 봅니다. 큰 기대는 마십쇼.

  [참고2] : 차()는
위 문장 이전의 문장<소요유-10>에서의 척안(斥鴳)으로 간주하여
번역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척안(斥鴳)은 "종달새"라고 번역하는 이도 있고, "메추라기"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튼 무엇이든간에 이는 붕()을
비웃거나 혹은 붕의 날아감(適南冥)을
이해하지 못하는 "작은 새"의 의미겠지요.

 

 

 

[世經評解]

지식(知)이 하나의 관직(官)에만 효용이(쓸모가) 있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일단, 일관(一官)의 의미는 "하나의 관직이라는 의미"를 넘어 "어떤
한 가지 일"로 좀더 확대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지식이란 어떤 한 가지 일에만 쓸모가 있다"라는
뜻이 되겠지요.

 

그래도 이 말이 선뜻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는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못해 "지식 만능주의"에 젖어있기도 합니다.

저 역시도 거의 매일 어떤 지식을 추구합니다.

 

오늘의 사회를 사는 입장에서 보자면,

지식은 어떤 일에 쓸모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대체로 옳아 보입니다.

실제로 지식은 대체로 많은 쓸모가 있는 것이며,

또한 그 쓸모는 반드시 어떤 하나의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장자가 지효일관(知效一官)이라는 말로써 지식을 폄하하는 듯한 말을
한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해석해 보겠습니다.

제가 어떤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일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일을 하다보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겠지요.

아무튼 그래서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이리저리 생각해 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구해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이
책 저 책을 찾아보기도 하며,

또한 이것저것을 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반복하다가 보니, 마침내 그 일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결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당연히 그 "방법"에는 "어떤 내용"이 있었겠지요.

지식이라는 것은 대체로 위와 같은 것(위와 같은 과정과 결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경우에야 비로소 "아는 것은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말이 진정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는 것이 힘=지식을 통한 문제 해결]

   

사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다고도 봅니다.

장자가 지적하는 문제는 오히려 그 다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위와 같은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지식이 수반되고 결국 그 지식에
의해 어떤 문제가 해결됩니다.

다시 말해, 지식은 문제 해결의 순간에 스스로 그 효용성을 입증하고
마침내 "승리"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그 다음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승리의
도취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승리의 도취감은 "이 문제 말고도 다른 문제까지 이
지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자신감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어느 한 부분에서 얻은 자신감이 다른 부분으로 확장되는 것은

삶 전체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참으로
긍정적인 것일 수도 있기는 합니다.

 

단, 과(過)한 것은 분명히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한 분야의 해법이 "반드시" 다른 분야의 해법이
되리란 "확실한 보장"은 없습니다.

어떤 하나의 지식으로 모든 문제를 풀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사실은
무모합니다.

그것이 무모한 이유는 우리의 삶이 그렇게 단순치 않고, 이 세계는
무궁무진하며 끝없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어떤 부부의 화목함의 비결을 다른 부부에 적용하면
화목함은커녕 더 큰 불화가 되기도 하죠.)

(또한 나의 답이 반드시 다른 사람의 답이 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답이 나의 답이 되지 않기도 하지요.)

다시 말해, "어제의 답"이 반드시 "내일의 답"까지
아우를 수 있는 것만은 아니겠지요.

만약 정말로 그게 가능했다면, 인류는 이미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았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새로운 문제는 늘 새로운 방법으로 풀어야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역사는 비슷해 보여도 늘 다르고, 사건은 비슷해 보여도 각각
독특성이 있으니

기존의 지식이란 단지 참고 자료가 될 뿐이고,

새로운 문제를 풀려면 새로운 상황에 대한 재해석과 새로운 실천(혹은
새로운 실험)이 필요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어제 주어진(얻어낸) 답"만을 가지고 "내일의
문제"까지

모두 완벽하게 풀겠다고 나서는 것은 "죽은 지식"으로
"변화하는 생생한 삶"을 재단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요약해 보자면,

제가 해석하는 위 장자의 문장(知效一官)의 요체는

"그 자체로 지식을 배척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식에 대한
얽매임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 쓰던 공부방법을 -당시에 그것이 아무리 효율적이었다고
해도- 대학교에서도 고수하면 큰 문제가
될 수 있고,

군대에서 유용했던 것을 가족관계에서 관철하고자 애쓰는 것도
역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대적인 지식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시대의 옳음은 바로 다음 시대에 무의미해질 수도 있지요.

때때로 그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로 경멸되기도 하나,

또한 때때로 그것은 비극적인 느낌을 동반하며 연민을 자아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농촌사회에서의 노인들의 지식" 역시 이에 해당될
수 있고,

(도시로 이주하면서 혹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그들의 지식은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좀 씁슬하지요.)

"수많은 전통사회의 지식"들이 "현대"에
밀려 "무용한 지식"으로 전락한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황순원 선생의 단편소설 "독짓는 늙은이"가 그와
같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비슷한 이야기 구조(과거의 지식에 집착하는 모습)를 가지고 있는

"돈키호테"에서 돈키호테는 어리석게 묘사되어 있지만,

"독짓는 늙은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연민
그 자체"에 가까울 때가 있지요.]

 

그런데, 한편으로 오로지 "전통 지식의 무력성"이란
시각에서만 보자면,

지효일관(知效一官)이란 말이 "낡은 것"을 배척하고
오로지 "새로운 것"만을

옹호하는 듯한 의미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새롭다"는 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지기도 하겠지만서도요...]

현대 사회는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어제의 진실"이

"오늘의 거짓 혹은 오늘의 무력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역시 사실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지식에 대한 얽매임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새로운 지식"에 대한 욕구 역시 "집착(얽매임)"
수준에 도달하면 그 또한 "역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거식증 환자처럼 말이죠.

거식증 환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먹을 것을 사다가
여기저기 쌓아놓지만 실은 하나도 제대로 먹지 못합니다.

 

그럼 뭐란 말입니까?

제가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혹은 "이것도
그렇다 저것도 그렇다"라는 식으로 계속 쓰다 보니,

혹시라도 짜증을 내실 만한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앞에서 저는 "지식은 쓸모있는 것"이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예, 쓸모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식이 부질 없는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특정한 지식은 시간과 공간의 변화와 함께 무용해질
수도 있다는 말도 했습니다.

예, 쓸모 있는 지식이란 특정한

시공간적 맥락 속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과 공간의 변화와 함께 무력해진
과거의 지식이 언제나 무용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요?

 

그나마 가장 쉽게 표현하자면(과연 그게 가장 쉬운 건지는 잘
모름…),

"쓸모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이 상대적이므로, 어디에도
집착할 필요는 없다"입니다.

즉 쓸모없다고 생각되던 것이

쓸모있는 것으로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쓸모있는 것이 쓸모없는 상태로 전화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며,

지식 역시 그렇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장자의 다른 구절에서 일례를
인용하여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단락의 이야기의 본체는 장자 잡편[雜篇] 외물[外物]편의
혜자-장자문답입니다.)

지금 여기 제가 발을 딛고 있는 "땅"이 존재합니다.

사실 제가 발을 딛고 서 있기에는 그다지 "많은 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 한 평의 땅만 있어도 저는 서 있을 수 있게 되니까요.

즉 그 시각에서 보자면, 제가 지금 발 딛고 있는 땅은 "필요한
땅"이고 나머지는

적어도 잠정적으로는 "불필요한 땅"이 됩니다.

[知無用而始可與言用矣, 夫地非不廣且大也, 人之所用容足耳....]

[필요와 불필요를 이렇게 나누는 것이 우습다고 여기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인간이 나누는 "필요"와 "불필요"란
거의 대부분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즉시 이동을 시작하자마자 이 "필요한 땅"과
"불필요한 땅"의 구체적 내용은 변화하게 됩니다.

즉 지금까지 "불필요했던 땅"의 일부가 "필요한
땅"으로 전화되고,

지금까지 "필요했던 땅"이 "불필요한 땅"으로
변화합니다.

그 경우 "옛 땅"은 불필요해졌고, "새 땅"은
필요해졌다고도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혹시라도 제가 "옛 땅"을 다시 밟을 경우, 반드시
그러한 것만도 아닙니다.

오로지 "새 것"만을 더 옹호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제가 지식을 필요(유용)한 것이면서 불필요(무용)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면 위와 같은 예의 맥락에서입니다.

즉 모든 지식은 "잠재적으로 필요(유용)"한 것이면서
동시에 "잠재적으로 불필요(무용)"한 것입니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그렇게 파악할 때에만 필요(유용)와 불필요(무용)의
구분도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위의 예에서는 "필요", "불필요"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위 예에서 "필요"한 것(혹은 유용한 것)에 집착하면, 최악의
경우 단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게 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어떤 하나의 지식과 다른 지식 사이의 대비를
통해 지효일관(知效一官)을 해석해 본 것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이와 같은 해석만 고집할 필요 역시 없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지식과 지식 이외의 것을 대비하여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지식을 지식 전체로 본다고 해도, 지효일관(知效一官)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것은 지식이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며, 지식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만약 지식을 추구하다가 오로지 머리만 많이 써서 몸이 상한다면,

그것은 하나는 얻되 다른 하나를 잃는 것이겠지요.

더 나아가서 몸이 상하면 지식의 의미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로지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때때로 문제해결은커녕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죠.

 

아무튼 이상이 제가 지효일관(知效一官)의 의미를 해석하는 나름대로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동의하시든 말든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그것이 장자의 원래 의도였다고 말하든 그렇지 않든 역시
개의치 않습니다.

 

어쨌든 지효일관(知效一官)의 의미를 위와 같이 해석하고 나면,

행비일향(行比一鄕), 덕합일군(德合一君)의 의미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하실 수 있다고 봅니다.

[어떤 행동은 어느 지방 혹은 어느 나라에서는 칭찬받지만, 다른
나라에 가서는 비난받는 행동일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지효일관, 행비일향, 덕합일군의 예로 "작은 새(종달새
혹은 메추라기)"를

빗대어 말한 것은

그들의 지식, 그들의 행동, 그들의 덕이 "유용하다 무용하다"를
평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시각이 "유용성" 혹은 "필요"에 "갇혀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작은 새"에 대비되는 "대붕(大鵬)은
더 크거나 더 유용한 존재"라기보다는

"유용성"과 "필요"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존재인 것입니다.

 

자연(自然)에는 필요와 불필요가 나뉘어 있지 않다고 할 만합니다.

실은 모두가 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깨끗한 청소가 소임으로 규정된 청소부의 입장에서는 비 온 뒤 길가에
나온 "지렁이"가 불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반드시 깨끗이 치워버려야 할 존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단지 예입니다. 예에 집착하지는 마시고..]

자연(自然)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대붕우화 속의 "작은 새"는

"필요한 것" 혹은 "유용한 것"에 집착하고,

(어떤 것만을 선택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하거나
절대적으로 유용하다고 여기는 것을 뜻하며,

그 결과로 그 외 나머지의 것들은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뜻하겠지요.)

결과적으로는 자기 자신과 관련된 것을 "필요하고
유용하며",

그 나머지는 "불필요하고 무용하다"는 경직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 사고의 최종 귀결은 자신은 유용, 그외 나머지 타인은 무용이겠지요.)

[극단적인 예로, 의사가 농사일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반대로 농부가 의업을 불필요하다고 여기거나 하는 등..]

[혹은 이 세상에 "중요한 사람"들만 가치 있고, 나머지는
무가치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 등...]

[결국 제일 중요한 것은 "나"로 귀결되기 쉽기 때문에
나는 가치 있고 나머지는 가치 없고 등...]

그 때문에 이들로부터 "현자와 성인은 유용(존귀)하고, 나머지는
무용(비천)하다"는 식의 편견이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인의 말씀을 따르는 "나"는 유용하고 성인의 말씀을
이해 못하는 "너"는 무용하다는 등..]

이에 비해 대붕(大鵬)의 입장에서는 "천지에 절대적으로
유용한 것도 무용한 것도 없고",

그러한 구분은 임시적이고 변동하는 것일 뿐이며,

만약 그 구분을 절대화하게 되면 잃는 것은 "인간의 자유"일
뿐입니다.

그럴 경우, 대붕의 입장에서는 "작은 새" 역시 무용하거나
쓸데없는 존재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 셈이며,

단지 그 얽매임으로 인해 자신을 속박하고 타인까지 속박하는
행태를 개탄하는 것일 따름이겠지요.

 

대붕우화의 "작은 새들"은 당시의 "재상",
"현자" , "군자", "임금(제후)" 등의 위치에 있으면서

[물론 반드시 그 위치에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겠지요...]

천지만물과 뭇 백성들을 하찮게 여기고 자신이 스스로 지혜롭고
잘 났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다고 믿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지혜만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붕(大鵬)은 그러한 오만이 "세상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들도 위태롭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천상천하의 거대한 협업으로 이루어진 결과를 "자기의
공"이라 여기는 것이니 그 어찌 위태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공(功)을 모두 자기의 것으로 여기니 언젠가는 과(過)도 모두 자기의
것으로 받게 되는 날이 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대붕은 구태여 그 어떤 실체라기보다는

<"커다란 것"이지만 "작은 것"들을 포괄하기
때문에 "커다란 것">을 상징하는 그 무엇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경계와 구분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기에 그것을
"크다"고 말하기도 어렵겠지요.

"크다"는 표현조차 임시적인 것입니다.

 

 

 

 

이전 글을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소요유-1[/brothering/18785]

소요유-2[/brothering/19362]

소요유-3[/brothering/19713]

소요유-4[/brothering/19857]

소요유-5[/brothering/19941]

소요유-6[/brothering/20076]

소요유S1[/brothering/20084]

소요유-7[/brothering/20587]

소요유-8[/brothering/32922]

소요유-9[/brothering/32988]

소요유-10[/brothering/33045]

소요유S2[/brothering/33145]

카테고리 : 장자철학재독해
태그 : , , , , , | 댓글 남기기

장자(莊子)에 관한 쓸데없는 글쓰기에 대한 변명

제가 장자에 대한 글을 쓰면, 그 글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가급적 쉬운 예를 찾아서 쉽게 쓰려고 노력은 합니다만,

부득불 조금이라도 어렵고 골치 아픈 글을 쓰면 대중적 인기는
떨어지게 되어 있지요.

다시 말씀드리자면, 적어도 제가 쓰는 장자에 관한 글은 처음부터
대중적 호소력을 겨냥한 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엔 "장자의 철학"이 예전에 비해 상당한 정도로
"대중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 글들은 제 자신을 위해서 씁니다. 제가 이 글의 필자이자
독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글이란 것이 순전한 독백일 수는 없겠지요.

누군가에게 읽혀질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글을 쓰지
않게 될 것이긴 합니다.

그렇다면 이 글들은 저를 제외할 경우 누구를 대상으로 쓰고
있는 것일까요?

 

그저 읽을 수 있는 사람이면 됩니다.

제 해석에 동의하시는 분이든 그렇지 않은 분이시든 상관없이,

그저 "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하시는 정도이면
그 정도로도 만족입니다.

따라서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이 단 한 분만 계셔도 저는 계속
글을 써내려갈 것입니다.

심지어 지금 당장 아무도 읽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관심을 가지실 만한 분들이 나타날 수밖에는 없다고 믿습니다.

그런 사람이 많고 적음에는 개의치 않습니다. 그냥 단 한 분이라도
좋습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이런 종류의 글들에 관심을 가지실 수 있는
분은

그렇지 않은 분들에 비해 조금은 다른 "인생 체험"을
하신 분들일 개연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른 체험을 하기는 합니다.

누구의 체험도 서로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그 모든 사람들의 체험은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자신의 체험에 갇혀 지내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체험을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데,

"장자"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가지실 수 있는 분은 아마도
후자의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장자철학이 그렇게 "위대하고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매우 소박한 철학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지금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은 어쩌면

"위대함"이 아니라 "소박함"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남보다 앞서기를"
바라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마음조차 때때로 사회에 득이 될 수도 있기는 하다고
봅니다.

더 중요하게는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을 스스로도 어찌지 못하는
사회 속에 처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탓하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장자철학"은 적어도 한번쯤은 "남보다
앞서려는 마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마음 안에 "남보다 앞서려는
마음"이 아예 없으신 분은

굳이 "장자철학"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셔도 된다고
봅니다.

 

카테고리 : 장자철학재독해
태그 : , | 댓글 2개

소요유(逍遙遊)-10

湯之問棘也 是已

[탕지문극야 시이]

 

탕임금이 신하인 극(棘)에게 물은 것이 이와 같을 따름이다.

 

窮髮之北 有冥海者 天池也

[궁발지북 유명해자 천지야]

 

풀이 자라지 않는 북쪽까지 계속해서 가보면, 명해(冥海:
어두운 바다)라는 바다가 나오고 이를 하늘의 연못(天池)라고 합니다.

 

有魚焉 其廣 數千里 未有知其脩者 其名爲鯤

[유어언 기광수천리 미유지기수자 기명위곤]

 

그곳에는 이름이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어
그 크기가 수천리에 달한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길이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有鳥焉 其名爲鵬 背若泰山 翼若垂天之雲

[유조언 기명위붕 배약태산 익약수천지운]

 

이름을 붕(鵬)이라고 일컫는 새가 있는데, 그 새의
등은 태산만큼 크고 그 날개는 마치 하늘에 드리워진 구름과 같습니다.

 

搏扶搖羊角而上者 九萬里

[박부요양각이상자 구만리]

 

그 새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솟구치는 것이 구만리에
달한다고 합니다.


 

絶雲氣 負靑天 然後圖南 且適南冥也

[절운기 부청천 연후도남 차적남명야]

 

붕은 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을 등진 연후에 남쪽의 남명으로
갑니다.

 

斥鴳笑之曰 彼且奚適也

[척안소지왈 피차해적야]

 

이에 연못의 작은새가 비웃으며 말하기를, "저 새는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我騰躍而上 不過數仞而下

[아등약이상 불과수인이하]

 

"나는 힘차게 솟구쳐 올라도 불과 몇 길 높이를 넘지
못하고,"

 

翶翔蓬蒿之間 此亦飛之至也

[고상봉호지간 차역비지지야]

 

"쑥대밭 사이를 날아다니다가 마는 것이 고작이다."


 

而彼且奚適也

[이피차해적야]

 

"그런데, 저 새는 (저렇게 높이 날아서) 도대체 어디로 날아가겠다는
것일까?"

<의역 : 내(작은 새) 입장에서는 도저히 붕(엄청나게 큰 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 멀리 나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다.>

 

此小大之辨也

[차소대지변야]

 

이것이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의 차이입니다.

<의역 : 협소한
시야에 갇혀 있고서는 큰 지혜를 이해할 수 없기 마련이다. ==> 왕이시여, 부디
"크게 보셔야" 합니다.>

 

 

  참고1 : 탕()은
은(殷)나라의 임금으로 흔히 "요순우탕(堯舜禹湯)"이라고 할 때의 그 탕(탕왕)입니다.

  참고2 : 문장 맨끝에 이()가
붙으면 "무엇무엇일 따름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게 보통이죠. 자주
나오는 것입니다.

  참고3 : 극()은
은나라의 현명한 재상이었다고 하는데, 실존 인물이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즉, 가상의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단,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만은 없다고 봅니다. 은나라
탕왕의 현명한 재상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은본기(殷本記)에
나오는 이윤(伊尹)입니다. 하지만, 사기(史記)에서 극(棘)이란 이름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극(棘)은 때때로 하극(夏棘)이라고도 합니다. 공식 사서(史書)에 극(棘)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기 어려운데(적어도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극이라고도 할까요? 이는 <열자(列子)>의
탕문(湯問)편에 ‘殷湯問夏革曰’에 근거한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革자는 "혁"자가
아니냐고 반문하실 분도 혹 계실지 모르겠는데, "극"이라고 읽기도 합니다.
극(棘)과 革은 음이 가까워 통한다고 본 것입니다. 열자 탕문편에서 탕임금은
하극에게 "세상의 넓음"에 대해 물었습니다. 열자 탕문편에도 "곤(鯤)"과
"붕(鵬)" 이야기가 잠깐 나오고, 또한 동서남북 어디로 가도 계속해서 또
다른 나라가 나온다는 이야기 역시 나옵니다. 그 때문에 열자 탕문편에서의 하극(夏革)과
탕왕이 한 이야기와 장자 소요유편에서의 극(棘)과 탕왕이 한 이야기는 "전체적으로는
같은 이야기의 서로 다른 일부분"이라고 추정되기도 하는 것이며, 또한 그 때문에
열자의 하극(夏革)과 장자의 극(棘)이 동일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열자 역시 허구의 인물이었을 수도 있기는 합니다. 혹시라도
열자가 허구의 인물이며 <열자>라는 책이 후대에 만들어진 책일 경우
열자 탕문편은 <장자>를 토대로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요. 물론 장자는
분명한 실존 인물입니다.]

  참고4 :궁발(窮髮)은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직역하면, 머리카락이 다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머리카락은
풀(草)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궁발은 "풀이 다한 곳",
다시 말해, "풀조차 자라나지 않는 불모지"를 뜻합니다. 그러니 궁발지북이란
풀조차 자라지 못하는 북쪽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궁발지북이란 표현은 열자
탕문편에서 탕왕과 하극 사이에 세상의 넓음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간 것으로
기록된 것을 상기시키기도 합니다.

  참고5 : 익약수천지운(翼若垂天之雲)
- "그 날개는 하늘의 구름이 발(簾)처럼 드리워져 있는 것과 같다."
대단히 시적인 표현이라서 다시 한번 적어본 것 뿐입니다.

  참고6 : 박부요양각(搏扶搖羊角),
"박"은 "때린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박살"은
"때려죽인다"는 뜻입니다. "박부요"까지는 소요유의 앞부분에서도
나왔던 표현입니다. "부"는 돕는다 혹은 의지한다는 뜻이고, "요"는
심하게 흔드는 것인데, "부요" 혹은 "부요양각"(양각은 양의
뿔)을 "회오리바람"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각"은
그 모양이 회오리 같기는 하지요. "박부요양각"은 회오리바람을 타고,
혹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면서 하늘 높이 올라가는 모양새이겠지요.

  참고7 : 절운기부청천(絶雲氣 負靑天)
- 이 역시 대단히 시적인 표현이라서 다시 적어봅니다. 큰 새가 구름을 "끊어버리고"
올라가서 푸른 하늘을 "등에 이고" 날아간다는 표현이니 얼마나 절묘한
표현입니까?

  참고8 : 척안(斥鴳),
"척"은 연못의 이름이라 하네요. "안"은 보통 종달새를 뜻하는
것으로 아는데, 메추라기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튼 "척안"은
연못에 사는 작은 새 혹은 그냥 "작은 새" 정도로만 보셔도 될 듯합니다.

  참고9 : 인(),
"길 인"자이지요. "한 길 사람 속을 알 수 없다"고 할 때의
그 "길"입니다. "일곱척"이 "한길"이랍니다. 한 척은
대략 30센티미터 정도이니 한 길은 대략 2미터 정도가 되겠네요.

  참고10 : 고상(翶翔),
두 글자 모두에 "날개(羽)"가 달린 것을 봐서 "나는 것"과 관련된
글자임을 알 수 있겠지요. 아마도, 높이 날지 않고 새가 이 나무 저 나무 옳겨다니며
마치 놀 듯이 날아다니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참고11 : 봉호(蓬蒿),
두 글자 모두 "쑥" 혹은 "쑥대"라는 뜻입니다.

 

 

 

[世經評解]

갑자기 진도를 많이 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앞부분을 보셨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부분은 사실 앞부분에서
했던 이야기를 또 다시 반복하는 형태입니다.

물론 약간 다른 부분들이 있기는 합니다.

앞에서는 <제해>라는
책을 인용하는 형식이었고,

여기서는 <극(棘)이란 사람이 탕(湯)임금에게 해준 이야기>를 인용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결국엔 사실상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위 문장을 좀 더 쪼개고 나누어 소개하면 적어도 앞부분의 내용을 아시는
분들께는

오히려 "이해의 맥락"을 끊어버리는 셈이 될 수 있어서

한꺼번에 관련 문장 모두를 소개한 것입니다.

 

또한 위 문장들은 앞의 내용과 유사한 내용이므로 위 문장들에
대한 저의 해석을 별도로 덧붙일 필요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대신, 위 문장들과 간접적으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는

열자(列子)의 탕문(湯問)편<위 참고3 부분 참조>의 내용
중 일부를
간단히

축약적인 형태로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자의 탕문편 전반부의 내용 중

"탕임금"이 "하극"에게 물은 것은 "시간"과
"공간"의 "유한"과 "무한"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탕(湯)은 극(棘, 夏革)에게 "시초"와 "종말"에
대해 묻습니다.

이에 하극은 "우주의 시초와 종말"은 따로 존재할
수 없으며 결국 시간은 "무한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으로 답합니다.

물론 하극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만,

맥락으로 보자면 "무한론"에 가깝습니다.

곧이어 탕임금은 하극에게 공간의 "종착점 혹은 끝"에
관하여 묻습니다.

이에 하극은 역시 "모르겠다"고 대답하였지만(하극이
모른다고 하자 탕왕이 끝까지 캐물었습니다),

전체
맥락으로는 공간 역시 "무한"하다는 대답을 합니다.

 

탕문편 전반부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언뜻 보기에 황당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철학적 "유한"과 "무한" 개념으로 파악하면

전반적으로 말이 되는 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사상은 대략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 엘레아학파 파르메니데스와
멜리소스의 철학과 크게 닮은꼴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무한" 개념은 수학의 "극한" 개념 및 물리학의
"질량보존의 법칙", "에너지보존의 법칙" 등의 토대입니다.

종교에서도 무한 개념은 매우 중요하며, 실은 거의 모든 종교의
토대에는 무한 개념이 있습니다.

심지어 "시초와 종말"을 논하는 기독교조차도,

"신(神 혹은 야훼)"은 "I am who I am"으로써
사실상 무한입니다.

(신은 무한, 인간은 유한 – 이것이 종교의 기본 개념틀이죠.)

사족이지만, "I am who I am"을 한자로 번역하면,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한 것, 스스로 존재하는 자)"에 가깝기도 합니다.

 

  

이전 글을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소요유-1[/brothering/18785]

소요유-2[/brothering/19362]

소요유-3[/brothering/19713]

소요유-4[/brothering/19857]

소요유-5[/brothering/19941]

소요유-6[/brothering/20076]

소요유S1[/brothering/20084]

소요유-7[/brothering/20587]

소요유-8[/brothering/32922]

소요유-9[/brothering/32988]

카테고리 : 장자철학재독해
태그 : , , , , , | 댓글 4개
페이지 1 의 11|1|2|3|4|5|10...마지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