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랑 헤어지길 잘했다

얼마 전까지 밤마다 드라마 ‘또오해영’을 봤습니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드라마를 보다가 남편이 들어오면 흠칫.

 

“아직 안 자고 뭐해?”

“아… 뭐 좀 보느라. 이제 자야지.”

 

큰 죄 지은 사람마냥 황급히 드라마를 멈췄습니다. 피곤한데 조금이라도 더 자라는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가 아닙니다. 드라마 주인공인 에릭이, 대학 시절 사귀었던 남자친구랑 닮았서 였습니다.

 

남편은 남편을 만나기 전 제가 어떤 남자를 만났었는지, 몇 명이나 사귀었는지 전혀 모릅니다. 당연히 제가 무려(!!!) 에릭닮은 남자와 연애를 했다는 것, 알 턱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드라마를 보며 문득문득 ‘에릭닮은 전 남친’을 떠올리는 게 찔렸습니다.

 


 

 여대에 다닌 덕에 미팅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미팅에 나가기 전, 친구들끼리 ‘이런 남자가 나오면 좋겠다’ 이야기를 나누며 설레던 기억입니다.

 

저의 ‘이런 남자’ 조건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김씨가 아니어야 한다. 김씨.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성씨이지요. 저도 김씨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애들 이름은 뭘로 할까, 자주 생각했었습니다. 딸 둘을 낳아 아름이, 다운이로 이름지어서 ‘아름다운 엄마’로 불려볼까, 그런데 김아름 김다운은 영 안이쁘다. 정아름, 정다운만 되어도 얼마나 좋아. 한아름 한다운도 좋지. 그래, 김씨 남자를 만나지 말자. 그래서 김씨 남자는 ‘미래의 남편감’에서 제외되곤 했습니다.

 

둘째, ‘오빠’여야 한다. 슬프게도 여중-여고-여대를 나왔습니다. 교회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언니와 남동생이 있습니다. 살면서 ‘오빠’를 만난 적이 손에 꼽힙니다. 그래서 모범생 오빠를 만나 귀여움 받으며 연애를 하고 싶었습니다.

 

셋째, 폭 안길 수 있어야 한다. 저는 예민하고 몸 아픈 것도 맘 아픈 것도 잘 참는 편입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잘 받고, 스트레스를 풀기 보다는 꾹꾹 잘 눌러담죠. 저에게 가장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은 누군가의 품에 안기는 겁니다. 남자친구한테 안기면 스트레스가 확 풀리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툭하면 안아주는 남자, 품이 넓은 남자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에릭닮은 전 남친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 ‘잇 보이’였습니다. 유씨였고, 저보다 두 살 많았고, 키 크고 팔이 길어서 폭 안아줬습니다.

 

보통의 연인이 그렇듯, 콩닥콩닥 사랑하고 매일같이 만나도 아쉽다가 이틀에 한 번, 삼 일에 한 번 만나도 참을 수 있어졌고, 일주일에 한 번 만나다가. 어느 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보통의 헤어진 연인이 그렇듯, 가끔 그 ‘오빠’가 생각납니다. 다행인 건, ‘헤어지기 잘 했지. 좋은 애인이었지만 좋은 남편은 아이었어’ 라는 결론이 난다는 겁니다.

 

폭 안아주는 남자였지만, 폭 안길 줄 모르는 남자였거든요. ‘남자는 여자에게 기대지 않는다’ ‘밥 값은 남자가 내야한다’는 사람이었습니다. 벽에 기대 울지언정 여자 품에서는 울지 않겠다던 남자였습니다. 그 땐 그 모습이 참 듬직했는데, 결혼하고 살아보니 참 답답한 남자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 남편은(김씨입니다!!!) 잘 안아주지만 (‘나 지금 안아주면 힘이 날텐데’라고 살짝만 돌려 말해도 안아달라는 줄 모르는, 안기고 싶으면 ‘안아줘!’ 세 글자를 정확히 말해야 아는 사람입니다!!!) 잘 안기기도 합니다. 힘들 땐 주저없이 ‘나 좀 안아줘’ 잔뜩 불쌍한 얼굴로 말합니다.

 

남편에겐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없습니다. 남자의 일, 여자의 일 구분없이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된다는 사람입니다. 연애할 땐, 나도 여잔에 좀 보호해주지? 야속할 때 있었지요. 하지만 결혼하니 다릅니다. 엄마이자 아내인 제가 복직하겠다고 했을 때 ‘당신이 하고 싶으면 해’ 제 결정을 존중하고, 아침밥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을 때 ‘나는 당신 아침밥 챙겨줬나?’ 쿨하게 손 흔들고 출근합니다. 좋은 동반자, 파트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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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심리학을 복수전공했습니다. 인간발달심리학 수업 첫 시간에 교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지금 연애하고 있는 사람?’ 많은 친구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질문. ‘그 남자랑 결혼할 것 같은 사람?’ 또 많은 친구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 때 교수님은 그러셨습니다.

 

“그쵸? 그럴 것 같죠? 근데 결혼할 때 옆에 있는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야.”

 

웅성웅성. 저 또한 저게 말이야 방구야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나보니 맞는 말입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는데, 이 남자를 만났고, 이 남자가 결혼할 때도 제 옆에 있어서 남편이 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남자가 결혼할 때 내 옆에 있어줘서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 결이가 연애할 때가 되면 이 글을 보여줄 겁니다. ‘이 남자 저 남자, 나쁜 남자 좋은 남자 다 만나봐라. 그리고 마지막엔 좋은 ‘사람’ 만나라’ 이야기 해주고 싶은데 결이가 클 때까지 ‘에릭닮은 남자’가 기억나지 않을까봐 글로 남깁니다.

++ 그리고 아들인 웅이는 좋은 사람으로 키워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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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ykim 에 대해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 aykim@donga.com 애둘 엄마이자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다. 어렸을 때부터 30살에 결혼해 32살, 34살에 아이를 낳고 4인 가족을 완성해 행복하게 살겠다고 계획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계획없이 살기가 계획이다. 포대기와 단동십훈을 즐기고 한 번에 하나씩만 하는 내가 워킹맘이라니… 하늘도 놀랄 일이다.

댓글(1) “그 남자랑 헤어지길 잘했다”

  1. 강춘 2016/08/01 at 9:07 am #

    여기 이방엔 방문객이 미어터질듯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좋은 글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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