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스키, Queenst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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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탄의 연속이었던 15일간 뉴질랜드 배낭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엄선하여 이 카테고리를 통해 공개하고자 한다.

 

비록 사진 찍는 법은 모르지만, DSLR이 아닌 똑딱이지만,

 

이 곳의 자연은 모든 사람을 사진작가로, 모든 카메라를 DSLR로 만들어버렸다.

 

제 1탄. 뉴질랜드 첫번째 기착지, 스키어의 천국 Queenstown이다.

 

뉴질랜드 퀸즈타운에서 찍은 한 여름 속 겨울광경을 올려본다.

 

 

 

이 곳은 뉴질랜드 남섬 퀸스타운에 있는 Remakable이라는 스키장이다.

 

이 때가 7월 8일이었으니, 한국은 한여름이었을 것이다. 인공설이 아닌 자연설로
운영되는 리마커블은

 

전세계 스키어 및 보더들이 몰려드는 세계적 스키장이다. 자연이 준 지형과 날씨만으로
이런 세계적 관광산업이 가능하다니.

 

압도적 자연에 감탄하면서도 샘이 났다.

 

 

 

  자연설로 덮힌 리마커블 스키장. 퀸스타운은 자연이 준 산과 눈이
있으니 보호 펜스와 리프트만 설치하면 어디든 스키장이다.

 

 

 

작열하는 태양에도 눈은 녹지 않았다. 산 어느 곳에 리프트를 설치해도 이상하지
않은 광경. 천혜라는 것이 이런건가 보다.

 

 

 

스키장 가는 길 버스 안에서. 자연에의 위압이라는 것이 뭔지 절감했다. 원래
자연은 이리도 아름다운 것이구나.

 

 

 

 

카테고리 : 자연의 축복, 뉴질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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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정말 배워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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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 나에게 골프란 ‘아빠의 일요일’이었다.

 

10대 시절, 일요일마다 골프연습장을 가는 아버지를 보고 ‘왜 일요일인데 쉬시지
않고 매주 골프연습장을 가실까?’라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정작 골프장은 가뭄에 콩나듯 가시는 것 같은데 왜 골프연습장은
매주 가시는지 이해를 못했다.

 

집안 서재에는 나날이 골프 관련 서적이 늘어갔고, 책까지 보시며 골프를 치시는걸
보니

 

‘골프라는게 굉장히 중독적인 스포츠구나’라고만 생각했다.

 

 

  20대 중반이 된 지금,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알겠다. 과연 아버지는
‘정말 순수히 골프가 좋아서’ 매주 골프연습장에

 

가셔서 그물에 공을 날리셨던걸까. 그러고보니 스포츠 중에 뒤에 ‘접대’라는 말이
붙는 것은 골프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골프 접대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축구 접대, 농구 접대, 테니스 접대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예전에 50대 전직 은행직원 분을 만나서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이 대리 시절 일화를 들려주셨다.

 

자신과 동기가 대리일 때, 지점장이 고객들과 골프 약속이 있었는데 차장이 불가피하게
못가는 상황이 되어

 

다른 직원들에게 ‘골프 칠 줄 아는 사람 있나?’라고 물었다고 했다. 자신은 골프를
못쳤기에 가만 있었지만

 

자신의 동기가 ‘잘은 못치지만 칠 줄은 압니다’라며 자원했다고. 알고보니 그
대리는 골프실력자였고, 그 골프를

 

이후로 자신의 동기는 승승장구했다고 했다. 무슨 접대만 있으면 지점장이 그
동기를 찾았으니까.

 

 

  나는 골프를 칠 줄 모른다. 아버지 따라 연습장 몇 번 간게 전부다.
10대 때는 일요일만 되면 골프연습장에 가시던

 

아버지가 이해가 안 되었지만 지금은 아버지께 골프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난 골프를 쳐본 적도 없지만

 

나이가 한 살 한 살 들수록 골프를 배우고 싶은 마음은 커져만 간다. 정작 나는
골프의 재미가 뭔지도 모르지만 왠지

 

배워야 할 것 같다.

 

 

  왜 골프 접대만 있고 다른 운동은 접대가 흔하지 않은걸까 생각해봤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골프만큼 좋은 ‘명분’도 없었다.

 

몸 축나는 술자리 말고 ‘건전한 운동’을 표방하며 일 얘기도 할 수 있으니, 명분도
실리도 챙길 수 있다.

 

골프는 다른 운동에 비해 체력소모가 크지 않고, 18홀을 돌려면 대략 3-4시간이
소요되니, 상대와 오랜 시간동안 함께 있으며

 

얘기도 많이 나눌 수 있다. 또한 상대의 샷마다 터지는 ‘나이스 샷!’을 통해 ‘아부’하기도
쉽지 않나.

 

축구나 농구에 비해 운동효과는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지만 ‘일 얘기’하기에는
적합하다.

 

  그래서 ‘일 얘기가 오가는’ 골프를 잘 쳐야 되겠는데, 문제는 한국에서
골프장 가기가 꽤 만만치 않은 가격이라는거다.

 

한국 골프장 회원권은 호주나 인도네시아에 비해 10배가량 비싸다.

 

그래서 일반 직장인들은 접대 기회가 아니면 골프장을 자주 가기는 힘들다. 접대
시 상대에게 잘 보이려면 골프는

 

잘 쳐야 하긴 하는데, 정작 필드에서 골프치기는 또 돈이 만만치 않으니 아버지는
그렇게 매주 일요일마다 골프연습장에

 

가셨나보다. 단순히 ‘즐거운’ 마음으로만 몇 년간 매주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골프연습장을
가시긴 힘들었을거다.

 

일종의 ‘업무의 연장’ 아니었을까.

 

 

  우리 사회에서 성공적 인생을 살려면 단순히 ‘업무능력’만 있어서는
안된다. 업무능력은 기본이다.

 

처세술도 중요하다. 술도 잘 마셔야 하고, 노래방에서 분위기도 띄울 줄 알아야
한다. 골프도 마치 그런 것같다.

 

직장에서 성공하려면 꼭 잘해야 하는. 20대에게 골프란 성공을 위한 입사준비물 아닐까.

 

물론 골프를 잘 친다고 입사하는 일은 없겠지만, 입사 후에 업무능력은 동등한데 

 

골프를 잘 치면 분명 축구나 농구, 배구를 잘하는 것보단 훨씬 플러스가
되리라 생각된다.

 

아직 입사도 안한 20대 학생이지만, 훗날을 위해 왠지 골프를 배워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든다.

 

물론 취업부터 하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말 궁금하다. 여러분들의 고견을 듣고 싶다. 골프, 정말 배워야 하나요?

카테고리 : 사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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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없이 엄마만 둘, 아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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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이라는 정의는 모든 나라가 같을까?

 

우리나라 국어사전은 결혼은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관계를 맺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아마 이것이 대부분이 알고 있는 보편적인 ‘결혼’의 정의일 것이다. 하지만 호주는 그렇지 않다.

 

  호주는 Marriage Equality Amendment Bill 2009 (혼인평등 관련 법안)를
통해 결혼의 정의를

 

"union between two persons"로 변경했다. 더이상 결혼이 ‘union between
a man and a woman’이 아니다.

 

또한 2008년 9월 22일자로 NSW주에서 ‘new parenting laws’가 개정되어 NSW주에선
아이의 출생신고서에

 

동성부모를 법적으로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출처=Lyndall Coan)

 

 

  동성(同姓)결혼. 한국에서는 아직 시기상조의 주제라는건 잘 안다.
동성동본 혼인 불가 규정이 철폐된지도

 

오래 되지 않은 사회에 동성결혼이라니. 미친 소리라고 말할 수도 있음을
안다.

 

하지만 적어도 문제제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글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단순히 동성결혼이 아니다. 가족 개념의
새로운 변화가 머지 않았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가족 형태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남녀의 결합 이외에도, 남남 결합, 여여결합,
싱글대디, 싱글맘 등이 있지만

 

우리 사회는 남녀의 결합 외에는 굉장히 배타적이다.

 

 

  이혼율은 늘어가고, ‘한번 동반자는 평생 동반자’가 아니게 되어
재혼, 삼혼 등이 흔해지고 있다. 한부모 가정도 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생득적 성을 바꾸는 트렌스젠더들도 많아지고,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모두 공존하는게 오늘날의 사회다.

 

하지만 이 사회는 아직도 결혼상대자의 부모가 이혼 상태라면 결혼을 꺼리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또한 두 사람의 법적 결합인 결혼을 "서로 다른 성을 가진 두 사람"에게만 허락해준다.

 

 

서로 다른 성의 배우자를 만나 알콩달콩 자식을 낳아 평생 함께 사는 것이 행복인
사람들도 있지만

 

같은 성을 가진 배우자와 함께 알콩달콩 자식을 입양해 영원을 약속하는 것이
행복인 사람들도 있다. 

 

‘아빠, 엄마 그리고 자식들’로 구성되는 핵가족이
‘보편적 가족형태’라고 불릴수는 있지만

 

더이상 ‘정상적 가족형태’라고 불리면 안된다.

 

만약 핵가족이 ‘정상적’이라면 나머지 가정들, 예를 들면 한부모 가정이나 동성부부
가정은 비정상적인 가정이 되기 때문이다.

 

‘다름’을 ‘틀림’이라 하면 안된다. 다양한 가족 형태 중 하나일 뿐이다.

 

뭐가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임을 따지게 되면 뜻하지 않은 피해자를 낳게
된다.

 

  예를 들면, 최근 급증하는 이혼율에 ‘자신의 가정은 비정상적’이라는
피해의식 속에 사는 이혼가정 아이들이 있다.

 

생활기록부 가족 란에 부 혹은 모 란을 비워둘 수 밖에 없는 이들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정상적이지 못한 가정’이라는

 

낙인이 찍이게 된다. 만약 동성부부의 자녀라면 이보다 훨씬 심할 것이다. 아이들이 무슨 죄인가.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필요하다. 핵가족을 ‘추구해야 할 가치’로 포장하는 현 사회의 분위기는

 

‘추구하지 말아야 할 가치’를 추구한 사회적 소수자들에겐 숨쉬기 힘든 분위기다.

 

 

 

  이 곳 호주에서 가족에 대해 현지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이 곳은 이혼이 잦은 일이기 때문에 아이들도

 

부모의 이혼경력으로 인해 피해보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혼이 사회적
흠집이 아님은 물론이다.

 

자식들은 부모의 이혼경력에 대해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부모의 이혼을 숨기기
급급한 우리의 현실과 대조적이다.

 

 

  게이 혹은 레즈비언 커플의 결혼에 대한 국민적 인식 역시 개방적이다.

 

2009년 Galaxy Poll에 의하면 60%의 호주인이 동성커플의 결혼권리를 지지한다고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설문조사를 한다면 과연 60%의 지지율이 나올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리도 이혼율이 높고 이혼에 덤덤한걸 보면 가정생활이 아주 불우한가?
그렇지 않다.

 

다른 곳의 가정생활은 잘 모르겠으나, 이 곳 뉴캐슬의 호주 현지인 가정생활을
보면 ‘화목한 가정’이다.

 

 이 곳 뉴캐슬은 시골이라 그런지 오후 6-7시만 되면 가게들이 대부분 문을
닫는다. 그래서 남편 혹은 아내가 직장을 마치면

 

바로 집에 들어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밤에 가게가 열지를 않으니
놀러다닐 데가 없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이 곳의 부부들은 겉보기에 몹시 가정적이다. 각 가정의 자세한 속사정들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구의 것이라 하여, 외국 것이라 하여 무조건 좋다고 따르자는 것이
아니다.

 

사실 외국에서 동성결혼을 하든 뭘 하든 그 현상이 우리 사회에 주는 의의가
전혀 없다면 전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회적 편견때문에 자신의 가정에 떳떳하지 못한 우리의 아이들이
있다.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비정상적 가정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남들과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 하는 이 아이들이 있다.

 

 

  최근 이혼에 대해서 조금씩 사회적 인식이 변하고 있다. 예전만큼
이혼을 거대한 흉으로 보지는 않는다.

 

이는 긍정적인 변화의 신호탄이다. 대중의식의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 자녀는 남들에게 ‘우리 부모님 이혼했어요’라는 말은 쉽게 꺼내지
못한다. 상황이 이러한데

 

동성결혼에 대한 논의는 지나치게 앞서나가는 것임을 안다. 그리고 외국에 비해
동성커플도 많지 않다.

 

하지만 사회가 점점 개방화되고, 다양한 인식을 받아들일수록 분명 추후에 이
것이 이슈가 될 것이다.

 

사회의 편견때문에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숨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사회적 의식으로 인해 그들은 음지로 음지로 숨어든다. 그들에게도 밝은
빛을 주자는 얘기다.

 

우리가 ‘정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무의식적으로 쬐고 있는 이 밝은 빛이 ‘비정상’들은
음지 속에서 밝은 빛을 그리워한다.

 

 

  미국에서는 이미 90년대 방영된 TV 시트콤 프렌즈에서 동성부부나
싱글맘, 한부모 가정 등의 소재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이는 분명 대중들에게 무의식적 각성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런
방송이 필요하다.

 

동성부부나 싱글맘, 한부모 가정 등 보편적이지 않은 가족형태를 가지는 사람들이라
하여

 

특별히 ‘괴물’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공존해 살아가는 이웃임을 알릴 수 있는,
그런 방송 말이다.

 

  외국에서도 ‘동성커플’에 대한 찬반논쟁이 아직도 뜨겁다.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주자는 주장과 결혼은 남녀 고유의 성역

 

이라는 주장이 맞선다. 아직까지는 동성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해주는 나라보단
아닌 나라가 훨씬 많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회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 속도가 느리든 빠르든 변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언젠간 우리나라에도 외국처럼 소수자들의 권리인정 문제가 크게 대두되는 날이 올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그들’의 사랑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거늘, 왜 그들에게 사랑하게
해주지 못하는가.

 

지금 우리 주변에 혹시 무의식적 편견에 억눌려 힘들어하는 이웃이 없는지,
한번 쯤 둘러 볼 일이다.

카테고리 : 사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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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 주인공들, 요즘 뭐하고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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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즌 브레이크, 가십걸, 로스트, 24, 하우스, 그레이 아나토미,
위기의 주부들….

 

미드(미국 드라마) 애청자라면 대부분 알만한 작품들이다. 미드 열풍은 이제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현재 미드 열풍의 선구자는 바로 미국 NBC 시트콤 ‘프렌즈(Friends)’다.

 

  1994년 9월 22일 첫 방송을 시작으로 2004년 5월 6일까지 장장 10년동안
세계인을 웃긴 프렌즈는 국내에서

 

영어공부용 교재로 널리 쓰일만큼 한국인에게도 친숙하다.

 

 

 

               <프렌즈의
여섯 주인공(출처=napri.tistory.com)>

 

 

레이첼(제니퍼 애니스톤), 모니카(커트니 콕스), 피비(리사 쿠드로), 조이(맷
르 블랑), 챈들러(매튜 페리), 로스(데이빗 쉼머).

 

그들은 2004년 프렌즈 시즌 10을 마지막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프렌즈의 프렌즈
이후,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레이첼로 분했던 제니퍼 애니스톤은 6인의 프렌즈 중 가장 돋보이는
행보를 보였고, ‘친구들’ 중 가장 잘 나간다 할 수 있다.

 

프렌즈가 끝난 다음 해인 2005년 브래드 피트와의 이혼, 그 후 안젤리나 졸리와의
신경전,

 

이혼 후 이어지는 수많은 배우들과의 염문설 등은 그녀를 할리우드 최고의 가십스타로
만들었다.

 

덕분에 그녀는 2007년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얼굴 1위’로 꼽혔다. 이 곳 호주에서도

 

가판대에 꽂혀있는 연예잡지에서 아직도 제니퍼의 얼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비록 프렌즈 종영 이후 찍은 영화들, 루머 해즈 잇(2005), 디레일드(2005) 등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2009), 말리와 나(2009)로 이를 만회하는 분위기다.

 

뭐니뭐니해도 제니퍼 애니스톤을 말할 땐 전 남편 브래드 피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향간에는 아직도 제니퍼가 브래드 피트를 잊지 못하고 있고, 브래드 또한 최근
불거진 안젤리나 졸리와의 불화로

 

제니퍼를 그리워한다는 루머가 돈다. 브래드가 커트니 콕스와 데이빗 아퀘트 부부에게
제니퍼가 생각난다는 말을

 

했다는 보도도 있다. 이혼한지 4년이 지났지만 이들 전 부부는 여전히 가십의
중심에 있다.

 

  2008년 6월 ~ 2009년 6월 기준 할리우드 여배우 수입순위에서 200만달러
차이로 연적 안젤리나 졸리에게

 

1위를 내준 그녀지만(안젤리나 졸리 2700만 달러, 제니퍼 애니스톤 2500만 달러),
마흔을 넘긴(69년 생) 그녀지만,

 

배우에 만족하지 않고 영화감독 및 제작자까지 넘보는 욕심쟁이 ‘레이첼’이다.

 

 

  모니카 역의 커트니 콕스는 7살 연하 남편 데이빗 아퀘트(프렌즈에서 피비 &
우르술라의 스토커로 출연한)와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제니퍼 애니스톤과는 5살 차이가 나지만(64년 생)
진정한 ‘프렌즈’가 되어 프렌즈 종영 후에도

 

변치 않는 우정을 과시하고 있다.

 

작년 크리스마스와 올 새해를 제니퍼와 보내고, 제니퍼 관련 파티가 있으면 으레
주최자로 나설 정도로 친분이 깊다.

 

프렌즈 방영기간 중 찍은 영화인 스크림 시리즈는 대박을 쳤지만

 

프렌즈 종영 후 찍은 영화, 롱기스트 야드(2005), 줌(2006), 베드타임 스토리(2009)
등은 신통치 않았다.

 

배우보다는 감독에 욕심이 생겼는지 2009년 LA 단편영화제에 자신의 감독 데뷔작
‘먼데이 비포 땡스기빙’을 선보였다.

 

하지만 프렌즈 시절의 영광을 되찾기란 힘들 것으로 보인다. 프렌즈 이후 그녀는
‘제니퍼의 친구’로 두드러질 뿐이다.

 

 

 

   피비로 우리를 즐겁게 했던 리사 쿠드로는 프렌즈 중 최연장자(63년 생)다.

 

프렌즈에서 피비는 대중에게 의식적 각성을 외친다.

 

대량생산체제에 익숙해지면 모두가 같은 물건을 갖게 된다며 대형 가구점 ‘포터리
반’의 가구를 혐오하고,

 

동물을 사랑해서 모피를 입지 않고(결국 입었지만), 채식주의자다.

 

극 중에선 ‘weirdo’로 묘사되지만 그녀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곱씹을 만 했다.

 

하지만 프렌즈 종영 후 그녀의 배우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프렌즈 방영 시절 촬영한 섹스의 반대말(1998)은 호평을 받았지만 프렌즈 종영 후 찍은 영화 컴백(2005), 카블루이(2007),

 

P.S 아이 러브 유(2008),
밴드슬램(2009)등의 흥행은 ‘글쎄올시다’다.

 

영화 드림업이 올해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주인공은 현재 최고 스타 바네사 허진스다.

 

프렌즈에서 보인 발군의 코믹 연기는 나이가 든다고 빛이 바래는 것이 아니므로
향후 조연성 배우로 영화에 더

 

출연할 수는 있겠지만 역시 프렌즈가 그녀의 최전성기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피비가 남동생 프랭크의 대리모가 되어준 사연은 이렇다. 사실 프랭크와
엘리스는 장기 출연용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사가 97년 프렌즈 시즌 4 방영 시 임신을 하게 되자, 촬영을 계속하기
위해선 스토리상 피비가 임신을 해야 했고

 

결국 ‘남동생의 대리모’가 될 수밖에 없었다.

 

 

 

  조이 트리비아니로 프렌즈 6인방 중 미국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맷 르 블랑(67년 생)은 프렌즈 종영 이후 프렌즈의

 

후광을 선택했다. 프렌즈 종영 직후 NBC에서 프렌즈의 스핀오프 ‘조이’의 주인공을
맡은 것이다.

 

조이 트리비아니가 뉴욕에서 LA로 건너가 배우생활을 하는 내용을 그린 작품인데

 

프렌즈로 인한 대중의 기대가 컸던지 실패, 46편으로 제작되었지만 미국에선 38편만
방영되고 2006년 종영됐다.

 

프렌즈 시즌 10 편당 출연료가 배우당 100만 달러였는데, 맷 르 블랑은 ‘조이’에서
편당 50만 달러를 받고 출연했다.

 

다른 출연진과는 달리 프렌즈 종영 이후 ‘조이’이외에는 별다른 영화도 TV작품도
하지 않고 있다.

 

2005년 캐나다에서 스트리퍼와 어울리다 당시 부인에게 공식 사과까지 했고, 2008년에는
전 매니저로부터 100만달러짜리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는 등 프렌즈 종영 이후의 삶이 조이 트리비아니처럼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다.

 

  

 

  챈들러로 끊임없는 농담을 퍼붓던 매튜 페리(69년 생)의 가장 최근
출연작은 영화 ’17 어게인’이다. 주인공이

 

미국 10대 소녀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잭 에프론이어서인지 개봉 첫주만 2406만
달러의 흥행수입을 거뒀다.

 

메튜는 이 영화에서 잭 에프론의 나이 든 모습으로 출연해서 ‘잭 에프론이 나이들면
메튜 페리가 되는거냐’라는

 

잭 에프론 팬들의 원성을 들어야 했지만 흥행에는 성공했다.

 

프렌즈 종영 후에는 브루스 윌리스와 함께 나인야드2(2005), 스튜디오 60(2006
~ 2007), 넘(2007) 등에 출연했지만

 

매튜 특유의 귀여운 미소만큼 밝은 행보를 이어가진 못했다.

 

도무지 흉내낼 수 없는 매력적인 미소 덕분인지 염문설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르네 젤위거, ‘섹스 앤 더 시티의 샬롯’ 크리스틴 데이비스
등이 그의 데이트 상대였다.

 

과장해서 ‘할리우드 여배우라면 매튜와 데이트하지 않은 여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최근에는 배우보다는 영화제작에 힘을 쏟는 듯 하다. 2008년 케이블 채널 쇼타임의
‘엔드 오브 스티브’에 제작자 겸 주연으로

 

참여했다. 또한 자신의 제작사 ‘벨베틴 프로덕션’을 차려 워너 브라더스와 손잡고
영화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 3월에 배우 황정민의 할리우드 진출 파트너가 매튜 페리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잘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로스로 분해 이혼 3번 한 남자가 이리도 귀여울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데이빗
쉼머(66년 생)는 프렌즈 종영 이후

 

마다가스카(2005), 빅 낫씽(2006), 거짓 혹은 진실(2008), 마다가스카 2(2008)
등에 출연했다.

 

이 중 가장 두드러지는 성과를 보인 마다가스카 시리즈는 애니메이션 영화로 데이빗은
목소리로 출연했다.

 

마다가스카는 2005년 개봉 당시 전세계적을 5억 3000만 달러의 수입을 거둬 슈렉을
누른 바 있는 흥행작이다.

 

감정이 풍부한 그의 목소리 덕택인지 마다가스카2 역시 2008년 미국 개봉
당시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목소리 출연 외의 작품들에선 그다지 돋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더이상 프렌즈의 ‘로스’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지만 프렌즈 이후

 

로스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캐릭터 개발에는 실패한 듯 보인다.

 

어떤 역할을 해도 ‘~하는 로스’로만, 심지어 전쟁영화에 출연해도 ‘총 쏘는 로스’로만 기억되서
속상하다는 데이빗.

 

그는 런, 팻보이, 런(2008)을 연출하여 감독으로 데뷔했는데, 각종 인터뷰들을
보면 데이빗은 배우보다는

 

영화감독에의 욕심이 더 커보인다. 앞으로는 배우 데이빗 쉼머보다 감독 데이빗
쉼머로 만나게 될 공산이 크다.

 

 

  10년동안 방영되면서 평균 시청자 수 2000만 명을 넘긴,
최대 시청자 수 5000만 명을 넘긴(시즌 2 슈퍼볼 편)

 

‘말도 안되는 시트콤’ 프렌즈. 한 때 프렌즈의 영화화 얘기가 나오긴 했었지만
무산된만큼, 앞으로 여섯 친구들이

 

프렌즈란 이름으로 다시 작품에 나서는 일은 없을 듯 하다.

 

하지만 또한 그들이 우리 가슴 속에서 지워지는 일도 없을 듯 하다.

 

Miss you, 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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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바라는게 많아지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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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 초반 학번인 외사촌형이 나를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야~ 너네 세대는 정말 불쌍하다~ 우리 때는 영어 잘 못해도 취직 잘했는데~"라는
식의 말이다.

 

대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때도 40대 교수님께 비슷한 말을 들었다.

 

"나 때는 기업들이 우리 학교로 와서 원서 쫙 뿌리고 가고, 그 원서 집어서
지원하면 대부분 붙고 그랬는데~"

 

하지만 지금 대학생들에겐 꿈만 같은 ‘과거의 전설’일 뿐이다.

 

 

  솔직히 정말 그랬는지 아니었는지는 내가 그 시대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른다. 그 때도 물론 치열한 경쟁이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취업하기 어렵지는 않지 않았을까’ 싶은 막연한 추측만 들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사회가 점점

 

바라는 것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SKY 졸업장이 있다고 해서 취업되던 시대는 분명 지났다.

 

나도 대학교에 막 입학할 당시에는 ‘아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구나’라는 핑크빛
꿈에 젖어있었지만

 

지금은 그 꿈이 달콤하기만 했던 허상이었음을 안다.

 

 

  어느샌가 ‘유창한 영어’는 구직자의 기본 조건이 되어버렸다. 영어
뿐이랴. 한자도 잘해야 한다. 모교 고려대학교는

 

2004학번부터 한자 2급 자격증 취득을 졸업 의무조건으로 걸었다. 하필 내 학번부터
딱 걸리게 되었다.

 

03학번 선배들은 우리더러 불쌍하다며 자신들은 한자 딸 필요 없다고 놀려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제 2외국어, 제 3외국어 바람까지 불고 있다.

 

10년 후엔 지금의 영어처럼 제 2외국어가 당연한 취업조건이 되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학업적인 것 뿐만 아니다. 이젠 더이상 머리만 좋아서, 혹은 똑똑하기만
해선 안된다.

 

2000년대 초부터 불기 시작한 ‘몸짱’ 열풍은 지식 뿐만 아니라 몸까지 키워야
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했다.

 

나 자신이 아무리 지금의 내 ‘물렁살’을 사랑한다고 해도,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원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내 ‘물렁살’은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어느덧 사회에는
‘뚱뚱한 사람들은 자기관리를

 

못 한다’는 의식이 자리잡아 구직자들은 권상우같은 근육질까진 아니더라도 몸관리에도
충실해야 하게 되었다.

 

다이어트가 더이상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나 역시도 ’5년째 다이어트’ 중이다.
또한 근육에 대한 압박감도 있다.

 

시대의 젊은이들은 취직을 위해선 ‘자기 관리를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러닝머신을 뛰고, 역기를 들어야 한다.

 

물론 사람들이 ‘몸관리’에 새로운 의식을 갖게 된 것은 분명 바람직한 현상이다.

 

사실 헬스장 1달 회원권을 끊고 초반 3일 열심히 달리다가 어느샌가 유령회원이
되는 내 자신이 가장 큰 문제긴 하다.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구직자에게 ‘탄탄한 근육질 몸매’가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되어가고 있는 듯한 사회적 분위기다.

 

어느새 ‘살이 오른’ 사람은 취업준비 조건에 ‘다이어트’를 포함시켜야 하게 되었다.

 

 

  요즘 한창 자녀들이 초등학생인 30~40대 분들과 자녀양육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보면

 

‘요즘 애들은 정말 힘들겠다’라는 생각부터 든다.

 

국어, 수학 등 각종 학원에 영어공부는 기본이고, 한자 공부에 논술까지.

 

‘만약 이 아이들이 자라서 구직자가 되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래서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요즘 애들은 어릴수록 더 똑똑하니까 1년이라도
더 빨리 취업해야 경쟁이 덜 하다’라는

 

말이 나온다.

 

 

90년대 초반 학번인 외사촌형이 우리 세대를 보고 느끼는 감정을 우리 세대가
아래 세대를 보고 똑같이 느끼고 있는거다.

 

아마 우리 아래 세대들은 그 다음 세대를 보고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이 것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선 필요한 분위기일지도 모른다. 보다 우수한 인재들이
양성되기 때문이다.

 

 

  지금 취업준비생들에겐 고학점, 유창한 영어, 한자, 각종 자격증,
인턴경력, 공모전 경력, 작문능력, 면접능력

 

게다가 몸까지 취업필요조건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들은 분명 이보다
더한 자격조건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기업이 능력있는 인재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
있는 인재’가 되기 위한 조건들은

 

점점 많아만진다. 젊은이들은 이를 갖추기 위해 대학교 5학년, 6학년을 자청하고
있다.

 

이런걸 두고 팍팍해진다고 하는걸까 아니면 발전되고 있다고 하는걸까.

 

 

  취업난에 대한 한탄이 아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취업에 자신 있고,
내년에 도전할 취업전쟁이 기다려진다.

 

물론 푸른 바다를 나가기 전의 흰 나비같은 마음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말하고 싶은건 점점 바라는게 많아지는 이 사회에서 앞으로는 어떤 것들을 더
바랄까 하는 작은 호기심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보다 더한 자격조건들은 어떤게 있을까? 어떤
조건들이 새로운 조건들이 될까?

 

80년대 학번 교수님은 자기 때는 기업들이 와달라고 요청할 정도라고 했다.

 

90년대 초반 학번 외사촌형은 자기 때는 ‘유창한 영어’가 지금처럼 중요하진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필수가 되었다.

 

앞으로는 또 어떤 것들이 생겨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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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지고 있는 국토 9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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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수도 서울은 세계 어느도시와 견주어봐도 손색이 없는 메트로폴리스다.

 

드높이 치솟은 마천루, 북적이는 사람들,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는 화려한 네온사인들..

 

대한민국 행정,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의 중심지답다. 이곳 호주인들도 Korea에서
왔다고 하면 Seoul 사냐고

 

물어볼 정도로 서울은 국제적인 도시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울을 기준으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는 성향이 있다.

 

 

  이 곳 뉴캐슬은 인구 50만의 호주 지방도시다. 한국으로 치면 천안 쯤 되는 인구규모다.
이 곳과 서울을 비교하면 호주가

 

도무지 왜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될 정도로 서울에 비하면 ‘시골스러운’ 공간이다.

 

서울은 시드니, 오클랜드와 비교해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지언정 절대 그들보다 못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방은
어떨까?

  

 

  4900만 인구 중 1028만 7847명(2004), 인구의 약 20%가 전체 국토의
0.61%인 서울에 몰려 살고 있다.

 

서울에 유입되는 인구는 점점 늘고 있다. 지방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서울에 살고
싶어한다. 서울이 안되면 수도권에라도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서울과 수도권의 면적은 넓어지지 않는다. 전국인구
대비 수도권 거주율은

 

96년 45.4%에서 05년 48.3%로 점점 늘어나고 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지방거주율이
점진적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어느새인가 우리 스스로 우리의 국토를 좁혀가고 있다. 전체 국토의 0.61%로 말이다.
국토의 99.39%는 ‘떠나야 할 땅’이

 

되고 있다.

 

  

  우리의 고등학교 사회교과서에는 중앙집권체제에서 벗어나 지방분권
체제로 거듭나 지방발전에 힘써야 한다고 명시되있지만

 

정작 이를 보고 자란 청소년들은 서울에 살고 싶어한다. 후진국일수록 중앙집중적
국가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수도 하나에

 

의존하는 국가양태는 국가의 장기적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이 곳 호주의 시골(rural area)이라는 곳을 돌아다녀보면 확실히
시골은 시골인데, 한국에서 말하는 ‘시골’과는

 

그 의미가 다르게 느껴진다.

 

    

 

이 사진은 newcastle의 도심지에서 꽤 떨어진 ‘시골’의 풍경이다. 아스팔트 도로가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고, 우리나라

 

‘시골’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이러한 풍경은 뉴캐슬 뿐만 아니라 호주 지방도시들을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정비되지 않은 듯한 주거환경과 비포장도로가 만연한 우리나라의
‘시골’과는 확실히 다르다. 전원적

 

풍경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풍경은 뉴질랜드 지방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곳은 Tekapo라는 뉴질랜드의 시골이다. 이 곳조차 모든 길이 아스팔트
도로다. 사진 상에는 잘 안나왔지만

 

시골 중의 시골이라 할 수 있는 소규모 지역이지만 인프라 정비만큼은 깔끔하다.
‘살기 좋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 수 있다.

 

 

 혹자는 이 두 나라는 인구대비 국토가 넓기 때문에 전원적 양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나라도 결코 작은

 

국토가 아니다. 전체 국토의 0.61%, 면적 605 평방킬로미터에 인구 1000만이 산다.
반대로 생각하면 서울, 나아가 수도권을

 

제외한 국토에는 무궁무진한 발전가능성을 가진 공간들이 널려있다. 시골 아파트에는
미입주 사태가 벌어지지만 서울 아파트는

 

집값 무서운 줄 모른다. 국토가 작다는건 핑계다. 지방엔 발전시킬 공간이 드넓기만
하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대다수의 국민들도 지방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리에는 동감할 것이다. 모두가 그것이

 

옳은 길임은 알고 있다. 문제는 방법이다. 그러다 문득 미국의 수도가 뉴욕이
아니라 워싱턴 D.C임을, 호주의

 

수도가 시드니가 아니라 캔버라임을, 뉴질랜드의 수도가 오클랜드가 아니라 웰링턴임을,
캐나다의 수도가 벤쿠버가

 

아니라 오타와임이 떠올랐다.

 

  행정수도 이전계획은 박정희 대통령 때 처음으로 추진되었다. 당시를
조명한 KBS 역사스페셜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리에 행정수도를 충청도 쪽으로 옮길 치밀한 계획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최근에 행정수도가 대두된 것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기이다. 헌법재판소까지 간 끝에 행정수도 이전이
‘관습헌법’에 근거한 위헌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현재 행정도시 세종시가 건립준비 중이지만 최근 이에 대해 여야 간 잡음이 새어나오고
있다.

 

세종시 원점 재검토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또한 많은 서울시민들이 수도 이전 후 서울의 쇠락을 걱정해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외국의 사례를 보자.

 

앞서 언급한 모든 나라들은 수도가 아닌 ‘중심도시’가 훨씬 유명하다. 호주하면
시드니, 미국하면 뉴욕이다. 발전도 역시

 

이 도시들이 우월하다. 이들의 수도는 대부분 계획도시이기 때문이다. 호주는
시드니를 근거로, 미국은 뉴욕을 근거로

 

발전했으므로 이후 계획적으로 조성한 수도보다 발전된 상태일 수 밖에 없다.
만약 행정수도이전을 하더라도 서울은

 

대한민국 제1의 도시로 남을 것이다. 행정,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에서 행정이
빠진다고 해서 서울이 쇠락하는 일은

 

없다. ‘행정의 기능’은 서울에게는 수많은 중심기능 중 하나지만 지방에게는 가뭄의
단비같은 존재다.

 

‘행정의 기능’을 품은 지방도시는 또다른 중심이 되어 주변지역에 파급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행정수도로 충청도가 거론되는 것은 충청도가 남한의 지리적 중심이고,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와 접경해 있어

 

파급효과가 전국적으로 퍼지기 때문이다. 결국 국토가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파급효과가 전국적이 된다.

 

행정수도는 지방에 사회간접자본 확충, 인프라 구축 등을 하게 될 명시적 명분이
생기게 된다.

 

말로만, 교과서로만 지방분권을 말할게 아니라 이제 정말 ‘지방’에 ‘분권’을 실질적으로
논할 수 있을만큼

 

조국이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해야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국가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는 지방발전이 필수적이다. 더이상 국토의
0.61%만 달달 볶아 살 수는 없다. 행정수도는

 

지방발전을 위한 대책 중 하나일 뿐이다. 더 나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행정수도이전이
말처럼 쉽게 떡하니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행정수도보다 한 발 물러난 행정도시 세종시조차 제대로
건립되지 않고 있다.

 

행정수도면 이보다 더 많은 걸림돌이 있을 수 있다. 지역에 기반한 정당의 정치논리가
작용하는 민감한 사안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현 정권은 일단 삽을 뜨기 시작한 세종시를 ‘청계천을 뚫던 그 추진력’으로 공약대로
완공시켜야 한다.

 

행정도시는 행정수도를 향한 발판이기 때문에 지방발전을 위해선 세종시의 역할이
중대하다.

 

더이상 지방에서 올라온 서울유학생들이 서울의 마천루를 보고 딴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을 들게 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적어도 우리 자식들만큼은 ‘서울’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적 의식에서 자유로워져야
하지 않겠는가.

 

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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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학생이 본 한국과 호주의 대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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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는 무의식적으로 ‘외국대학 교육이 우리나라 대학 교육보다
낫다’라는 고정관념이 있는 듯 하다.

 

우리나라 대학 교육은 교수 강의 위주의 주입식이라 창의성을 계발하기 어렵고,
외국의 대학교육은 학생들의 의견을

 

중시하는 열린 교육이라는 막연한 이미지가 그 실체다. 하지만 정말 ‘외국대학
교육’이라고 해서 방법론적 우위를 가질까?

 

2008년 2학기를 고려대학교에서, 2009년 1학기를 호주 University of Newcastle에서
수강한 경험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고려대학교에서나 뉴캐슬대학교에서나 듣는 과목은 전공인 사회학과
정치외교학이었다. 그러므로 비교 대상은 사회학과

 

정치외교학 수업에 국한됨을 먼저 알려드린다. 우선 고려대학교부터 논해보자.

 

 

  고대 학생들은 주로 1학기당 18학점~21학점을 수강한다. 한 과목당
대부분 3학점이므로 6~7개의 강의를 듣는다.

 

강의는 주로 1 과목당 주 2회, 각 90분 강의로 이루어져 있다. 과제는 특정 주제를
바탕으로 한 리포트 혹은 소논문 작성이

 

있고, 입대하기 전 마지막 학기였던 2005년 2학기에 비해 달라진 것은 급격히
늘어난 ‘팀플’이었다. 팀플이란 그룹을 지어

 

조별발표를 하는 것인데, 일방적 주입식 강의의 양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로
생각된다.

 

이는 장단이 있는데, 장점은 수강생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고 수강생이 주체가
되어 관련 지식을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점은 모든 조의 발표를 봐야하므로 교수의 강의시간이 현격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팀플의 효용성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팀플이 주가 될 경우 교수의 강의가 몹시 줄어들어 ‘강의’를
듣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플을

 

옹호하는 수강생도 많았으므로 특정 견해가 우세를 가지긴 어렵다.

 

 

Newcastle대 학생들은 1학기당 30 ~ 50 unit을 듣는다. 10 unit이 1과목이므로
3 ~ 5개의 강의를 듣는다.

 

강의(lecture)는 주로 1과목당 주 1회, 120분이다.

 

호주의 특징은 강의 외에 튜토리얼(tutorial)이라는
시간이 보통 주 1회 60분씩 편성되어 있다.

 

튜토리얼은 수강생을 15 ~20명 규모로 분반시켜서 각 반마다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교수의 강의를 보충해주고 질의 응답을 받는 토론시간이다. 즉  한 과목당 한 주에 강의 2시간, 튜토리얼
1시간을 수강한다.

 

  

  가장 큰 차이는 강의방식이다. 고대의 강의는 교수의 지식전달이
최우선시된다. 그래서 90분동안 교수의 지속적 강의를

 

통해 지식을 쌓게 된다. 한편 Newcastle대 강의는 교수가 학생들에게 논쟁거리가
될만한 주제를 던져놓고 토론을 권장한다.

 

예를 들면 정치외교학 수업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은 각각 Realist인가
Idealist인가?"를 두고 학생들끼리

 

강의시간에 서로 의견을 나눈다. 의견을 잘 말한다고 해서 플러스 점수가 있는건
아니지만 학생들은 곧잘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이러한 공방이 강의 내내 지속되고, 교수가 보충설명을 하는 정도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대학, 즉 고대의 강의방식이 지식의 내면의 폭을
깊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90분동안 집중적인

 

강의를 통해 얻는 지식의 양이 지식수준이 비슷한 학생들의 토론을 통해 얻는
것보다 훨씬 심도깊기 때문이다.

 

대학교육에서 자율성도 중요하지만 본연의 목적은 교수에게 강의를 통해 지식을 전달받는 것이다.

 

학생들의 의견논쟁도 나름 유의미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지식의 외연의 폭은 넓힐지언정 내면의 폭을
깊게 하진 못했다.

 

학부생 수준의 얕은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공방은 때로는 지리멸렬하기까지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국대학 교육방식은 창의력을 증진시키는 열린
교육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한국의 대학 강의방식 역시 유의미성을 가진다. 교수의 집중적 지식전달을 학생이
잘 수용한다는 전제 하에서

 

지식습득에 뛰어난 효과를 지닌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물론 교수의 성향이 자신과
맞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외국대학을 나온 한국학생들이 국내대학 수업을 듣고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수업태도’, ‘교수 혼자 떠드는 강의’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을 종종 봤다. 물론 수업시간에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자세는
배울 점이다. 하지만 100명이 듣는

 

강의에서 너도나도 계속 질문을 해댄다면 강의의 맥이 끊긴다. 뭐든 일장일단이
있는 것 아닌가. 게다가 교수 혼자 떠드는

 

강의라 토론이 없다고 비판하는데, 강의의 본질은 교수로부터 지식을 전달받는
것이니 교수가 주가 되어 말하는건 당연하다.

 

물론 학생들의 소극적 수강자세, 예를 들면 교수가 질문할 경우 눈빛을 피하기
위해 모두 고개를 푹 숙인다던가 하는

 

자세는 문제가 있지만 ‘교수 혼자 떠드는 강의’라고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물론 배워야 할 점들도 있다. 특히 토론을 권장하는 튜토리얼 시간은
국내에 점진적으로 도입하면 대학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의 발표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자신의
발표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는 팀플 방식보다는

 

소그룹화하여 토론시간을 별도로 갖는 튜토리얼 시간이 더 유의미하다고 본다.
튜토리얼이 정착하게 되면 학생들의

 

수업참여의식도 적극적으로 변할 것이다. 대학당국의 시범적 운용을 추천하고
싶다.

 

 

2008학년 2학기는 그 어느 때보다 충실하게 강의를 들었고, 4개월의 짧은 시간동안
깊이 있는 지식을 많이 배웠다.

 

대체 어떤 강의들이길래 창의력을 계발하는 열린 교육이라는건지 기대하며 들었던
호주의 2009학년도 1학기 Newcastle

 

강의는 기대가 컸던지 실망도 컸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우리나라 대학교육이 외국대학 교육에
비해 강점을 보이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무조건

 

‘외국 것’이라고 해서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고 다 좋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의식을 버리려면 직접 체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절대 한국의 대학교육
방식이 단점으로 점철된,

 

개선해야만 하는 그런 방식은 아니라는 것이 내 결론이다.

 

 주입식=무조건 나쁜 것, 열린 창의적 교육=무조건 좋은 것 이라는 맹목적인
등식은 버리고

 

곰곰히 각각의 장단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이 필요한 시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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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살다온 여자는 사귀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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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고정관념’이 있다. 이러한 고정관념들은 대부분
경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학습을 통해

 

이루어진다. ‘외국 살다온 여자는 내국거주 여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란하다’
역시 수많은 고정관념 중 하나다.

 

그래서 일부 20대 사이에는 ‘외국 나갔다 온 여자는 전력이 의심스러우니 사귀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식이 파다한게

 

현실이다. 그 대상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에 국한되어지는 것은 우리 사회에
아직도 뿌리깊게 남아있는 혼전순결에 대한

 

의식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아무리 개방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사회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관용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곳 호주로 교환학생을 오기 전에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유학생들이 서양인들에게 정신을 못차린다더라’

 

혹은 ‘동거하는 남녀가 넘쳐난다더라’라는 식의 말들이었다. 대부분 유학생의
성적 문란함에 대한 말들이었고, 그 대상은

 

대부분 여성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정말 유학생들은 내국거주인들에 비해 ‘화려한
일탈’을 즐기고 있는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이다. 물론 실제로 서양남자면 좋아라하는
여자들도 있고, 우편함을 함께 쓰는 동거남녀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극히 일부다. 유학생이라고 해서 내국거주인들에 비해 가시적인
성적 문란성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곳 호주에 와서 수많은 유학생들을 만났지만 한국에 있는 그네들과 진배 다를게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남자들이 가장

 

가십거리 삼는 것이

 

‘유학간 한국여자들이 외국에서 혼자 살다보니 외로워지고, 따라서 깊은 관계를
쉽게 맺어 성적으로 문란해진다’인데,

 

그렇다면 외국에서 혼자 사는 것과 한국에서 혼자 사는 것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어차피 혼자 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혼자 살면 모든 여자들이 성적으로 문란해지나? 그렇다면 지방에서 상경해서 서울에서
혼자 살며 대학 다니는 여학생들은

 

모두 문란한가? 절대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람 자체지, 환경이 아니다.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라고,
10시 통금이 있더라도 얼마든지 성적으로

 

문란해 질 수 있다. 서울 시내 곳곳에 가장 눈에 쉽게 띄는 것이 모텔이다. 아마
대한민국처럼 모텔이 많고, 싸고, 좋은데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모텔들은 대부분 24시간이다. 게다가 해외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DVD방’이라든가,

 

‘멀티방’이라든가 하는 개념만 보더라도 외국보다는 한국이 훨씬 성적으로 ‘문란’해지기
쉬운 여건이다.

 

 사실 성이라는 부분에 대해 그 화살이 여성에 집중되는 현실 자체가 전근대적이다.
자신이 수많은 여자와 잔 것은

 

마치 훈장마냥 자랑스러워하면서 정작 자신의 여자친구는 ‘전력’이 있나 전전긍긍하는
것이 대한민국 남자의 현실이다.

 

성에 대한 이러한 양성차별적 이중적 잣대는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 본다.

 

‘성적 문란함’이라는 의식 자체도 여성의 혼전순결에 대한 강압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태동된 말이다. 이곳 호주에서는

 

성이란 남녀가 동등한 주체로서 동등하게 다루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자가
먼저 성에 대한 얘기 자체를 꺼내기가 어렵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사회적 관용(사실 관용이라는 말 자체도 웃기지만)이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가야 하지 않을까.

 

조선시대 성리학의 의식적 사슬을 끌러내 진정한 의식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새 시대를 짊어진 젊은이들의 사명 아닐까.

 

 

  이야기가 잠깐 삼천포로 빠졌는데, 다시 돌아오자. 유학생들에 대해
가장 많이 가지는 고정관념은 ‘서양남자에 대한 동경’과

 

‘동거’이다. 우선 서양남자에 대해 말해보자. 서양남자,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솔직히 같은 남자가 봐도 잘 생긴 사람들 많다.

 

우리 사회에서 미의 기준으로 삼는 오똑한 코에 날카로운 턱선,

 

이국적인 푸르른
눈에 금발머리는 여성들의 마음을 혹하게 할만하다. 잘생긴거 인정한다.

 

남자들 역시 이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것처럼
여자들도 잘 생긴 남자 좋아하는 것은 자명한 진리.

 

이들을 욕할 수 있을까. 물론 영어를 배우려고 사귀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것은
해외거주인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 온 외국인 강사들이 한국 여자들만큼 유혹하기 쉬운 대상이 없다며 남기고
간 "KFC"라는 말이 이를 증빙하지 않나.

 

비난의 대상을 ‘유학생’에 한정짓는 것은 너무나 편파적이다.

 

 

다음으로 동거. 유학생들은 홀로 이국 땅에 오다보니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로움에 시달린다.

 

이는 사실이다. 그래서 눈 맞은 남녀들이 동거하는 경우도 분명 있다.

 

한국에서 가족들과 살았으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혼자 있다보니 외로움을 달래고자 이성에게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경우는 분명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
유학생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한국 대학가 근처만 가더라도 우편함을 같이 쓰는 동거남녀가 넘쳐난다. 하지만 주 공격타겟은
항상 유학생들이다.

 

개인적으로 동거에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 비난의 화살이 모두 유학생에게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유학생이라고

 

하면 일단 ‘동거했을 수도 있겠군’ 혹은 ‘외국 남자들이랑 놀아났을 수도 있겠네’하는
선입견 자체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이 곳에 와서 절실히 느낀다. 왜 ‘대학생’과 ‘유학생’이 다 같은 대한민국 20대지만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야 하는지 개탄스럽다.

 

 

사실 성에 대한 개방화는 현재 우리 사회의 흐름이다. 아니, 사실은 그 전에도
음성적으로 있어왔던 일들이 수면으로 드러나는

 

과도기적 상황이다. 70년대 통금이 있던 시절에도 젊은 남녀는 서로를 갈구해왔다.
하물며 수많은 모텔, DVD방, 멀티방들이

 

만연한 오늘날은 어떠하겠는가. ‘요즘 애들은 참…’이라며 혀를 차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이러한 기괴한 ‘방’들 속에서

 

한국의 20대들은 ‘성적으로 문란’해지고 있을 것이다.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지만 말이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아간다. 이런 사람이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혼전순결의 가치를 고수하는

 

사람들도 있고, 소위 ‘문란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유학생이라고 해서 특정한
딱지가 붙는 사회적 풍토를 보고 있자니

 

참으로 답답했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일반화의 오류’가 무엇인지를 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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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3대 포털 성향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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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3대 포털이라 하면, 네이버, 다음, 네이트&싸이월드를 들 수 있다.(네이트와 싸이월드는

 

같은 SK커뮤니케이션이 운영하는 포털로, 뉴스 역시 공유한다.) 최근 포털이 언론으로서의

 

책임을 갖는다는 판결도 나올 만큼 포털은 단순 게제자가 아닌 기사선택의 힘을 가진 또다른

 

‘언론기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만 봐도 주로 네이버나 다음 뉴스를 통해 세상과

 

접하지 신문을 정독해서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아는 젊은이들은 그리 많지는 않다고 본다.

 

 

  들어가기 앞서, 미리 전제해야 할 명제가 있다.

 

일단, 인터넷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공간이다. 아무리 인터넷이 대중화되었다고는 하지만

 

Digital Divide는 명확한 사회 현상이다. 아무래도 노인보다는 젊은 층이 인터넷 사용빈도가 높다.

 

또한 장년층보다는 젊은 층이 진보적 성향이 강하다. 그래서 2002년 대선 당시 인터넷을 통해

 

선거운동을 펼쳤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젊은 층이 많아 2002년 대선은 한국의

 

고질병이었던 지역갈등보다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는 ‘세대갈등’이

 

두드러졌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인터넷이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고 시작하자.

 

국내포털 점유율 순위대로 네이버, 다음, 네이트(싸이월드) 순으로 분석해보자. 일단 기본적으로

 

네이버 VS 다음,네이트(싸이월드)의 구도이다.

 

 

  네이버는 명실공히 국내 최강의 포털이다. 지식인이라는 사용자참여형 시스템을 개발함으로써

 

까페열풍을 선도한 다음을 제치고 독보적 선두로 우뚝 섰다. 아무래도 가장 다양한 연령층이 가장

 

빈도수 높게 사용하는 포털일 것이다. 네이버는 진보적 성향인 인터넷을 기준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편이다. 이는 기사선정과 댓글의 성향을 보면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그나마 가장

 

‘객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편향성이 타 포털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편향성에 대한 얘기는 다음과 네이트 분석 때 자세히 쓰겠다.)

 

예를 들어,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의 ‘공중부양’ 사태에 대한 댓글을 보면 네이버에서는 칭찬보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크다. 물론 빨갱이라는 둥 다소 극단적인 반응도 있고 일부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대체적인 분위기가 부정적 성향이다. 하지만 같은 기사라도 네이트(싸이월드)에서는

 

‘강 의원 님 존경해요’ ‘강 의원님같은 분이 우리의 희망입니다’라는 식의 리플일색이다.

 

 

  포털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명언이

 

현세에도 유효하다는 확실한 증거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수적 성향의 사람이 네이트나

 

다음 아고라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자신과 너무나 다른 이질감에 유대감을 가지지 못한다. 반면

 

네이버의 리플을 보면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일치하는 글들이 많아 반가움을 느낀다. 따라서

 

보수적 논객은 자신이 동조할 수 있는 네이버를 주로 찾게 된다. 반대로 진보적 성향의 사람이

 

네이버의 리플들을 보면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아, 이게 아닌데’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싸이월드나 다음에 가보면 자신과 같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음을 확인하고, 그 곳에

 

정을 주게 된다. 포털을 통해 국민성향의 이분화가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네이버에

 

모인 사람들끼리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공유하면서 자신의 신념이 옳음을 재생산하게 되고,

 

그 신념은 비슷한 의견의 동조를 통해 더 확고해진다. 다음이나 네이트 역시 마찬가지다. 포털이

 

국민의 정치적 신념을 확대 재생산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다음은 ‘아고라’로 대표되는 포털이다. 그리스 시대의 ‘토론장’이라는 뜻을 가진 아고라는

 

‘그들만의 토론장’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아고라는 진보세력의 광장 같은 곳이다. 이 곳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사회의 한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지언정 국민전체의 목소리라고 보긴 힘들다. 물론

 

타당성을 가지는 주장도 많다. 하지만 이 곳에서 보수의 주장은 무참히 묵살되고, 일단

 

‘보수’라는 프레임에 걸려들면 이성적 주장을 해도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공간이 되어버렸다.

 

다음은 아고라를 통해 확고한 지지자를 얻었지만, 대중적 지지는 받지 못했다. 네이버에게

 

포털점유 주도권을 확실히 빼앗긴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마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TK(대구-경북)지역에 확고한 고정표 20%를 가지고 있지만, 전국적인 지지는 아직 얻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면 비슷하달까. 아무튼 진보세력의 확고한 지지를 얻고 있지만 ‘장사하는’ 입장에서만

 

보면 손해보는 장사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도 다음은 네이트에 비하면 이성적으로 훨씬 성숙한 공간이다. 아고라는 민주주의를

 

논할 때 논리정연하게 학문적 기반이 갖춰진 느낌이지만, 네이트(싸이월드)는 정말 너무 심각할

 

정도로 감성적이다. 이는 싸이월드의 이용객이 주로 10대~20대에 집중되고, 네이트가 자랑하는

 

‘판’(톡톡)이 10대~20대 여성 이용률이 압도적인데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기사 성향 역시

 

네이트-싸이월드가 가장 10대 여성 지향적이다. 이는 네이버와 네이트의 단순 분위기만

 

비교해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formal과 casual의 차이랄까. 아무튼 글자 하나 차이인 이

 

두 포털의 성향차는 완전 극과 극이다.

 

  네이트는 ‘감성’으로 대표되는데, 같은 진보적 성향인 다음과의 차이는 촛불시위를 두고

 

설명하면 적절할 것이다.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부류에는 여러 부류가 있는데, 이 중 두드러지는

 

것이 10대청소년들의 참여이다. 네이트야 말로 이들의 본거지다. 난 아직도 작년 6월 촛불시위 때

 

시위에 나온 여고생과의 인터뷰를 잊을 수 없다.

 

"여기 왜 나왔어요?" 라고 묻자 고 3이라던 10대 소녀 둘은 쭈뼛쭈뼛 아무 말도 못하다가

 

"그냥요…" 혹은 "이명박이 싫어서요"라는 말 밖에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선 어떤 이성적 논리나

 

정치적 신념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고, 그저 학교에서 어설프게 배운, 뭔가 그럴싸해 보이는

 

‘민주주의’를 내세우지만 민주주의가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냥 무조건

 

‘민주주의는 좋은거다’라고만 알고 있을 뿐, 왜 민주주의가 좋은건지조차 모른다. 하긴 민주주의가

 

어떤 정치체제이며, 어떤 장단이 있고, 어떻게 보완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10대 청소년들에게 그런걸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도 있지만 이 어린 감성적 목소리를

 

‘국민의 목소리’ 혹은 ’10대의 정치적 각성’으로 포장하는 보도행태는 분명 문제가 있다.

 

 

 

반면 다음은 어느정도 사회에 진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거리로 나온 20대 중반의 대학생이나 그

 

이상의 연장자들이 주된 촛불시위 참여자다. 이들은 논리정연한 자신들만의 논리가 있고, 설득력을

 

지닌다. 쉽게 말하면 진보적 대학교수는 다음엔 어울릴지언정 절대 결코 네이트에는 안 어울린다.

 

보수우익이 흔히 말하는 ‘선동’이란 다음에서보다는 네이트적 행태를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다음 입장에서는 자신의 논리정연함이 있는데 선동으로 매도당하니 화가 날 법 하다. 하지만

 

네이트는 정말 ‘선동’이라는걸 만약 한다면 정말 쉽게 그 대상이 될만한 곳이다. 감성과 눈물에

 

호소하는 소녀적 감상주의가 만연한 이 곳에서 이성이란 정말 찾기 힘들다.

 

 

 

  앞서 말한 편향성이라는 것은 이를 두고 말했던 것이다. 네이버는 보수 70에 진보 30의 비율로

 

사용자가 존재한다. 반면 다음은 ‘합리적’ 진보가 주를 이루고 있고, 네이트는 ‘감성적’ 진보?(이를

 

정치신념의 성향의 일종인 ‘진보’라고 불러야 할지도 굉장히 망설여진다.)가 주를 이룬다. 난 정말

 

10대들에게 정치적 신념이라는게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물론 시대가

 

아무리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감성에 휩쓸리기 십상인 사춘기 시절 냉정하고 이성적이어야 하는

 

‘정치판’이라는걸 바라볼 수 있는 ‘시각’ 자체가 존재하기 힘들다고 본다.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인 만큼 이말 저말에 휩쓸리기도 가장 쉬울 것이다. 난 아무래도 이 분야는 부정적이다.

 

아무튼, 앞서 네이버가 그나마 ‘객관적’이라고 했던 이유는 보수, 진보의 목소리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가 주되긴 하지만 압도적이라고까지는 보기 힘들다. 이는 앞서 전제한

 

‘인터넷의 진보적 성향’에 기인한다.

 

  이상으로 국내 3대 포털에 대한 분석을 해 보았다. 여러분들도 같은 사건을 두고 각 포털 별로

 

달리는 댓글들의 성향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상기 언급된 것과 유사한 현상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포털을 선택하느냐도 자신의 정치적 프레임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친다. 이처럼 사소한 일개 부분이 사회적 현상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가져보는 것도 사회를 넓게 보는 또다른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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