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블로그에 돌아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그동안 동아일보 인턴기자로 인사드렸던 조동주입니다.   제가 작년에 동아일보에 입사하게 돼서 동아일보 조동주 기자가 됐습니다.   제 학창시절에 많은 분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장인 이 곳을 다시금 꾸며보려고 합니다.   오랜만에 오니 많은 것들이 바뀌었네요. 저널로그가 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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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등록금 다 날린 유학생 도박꾼

  신정환 씨가 필리핀 세부에서
도박빚으로 인해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는 뉴스가 화제인데요.

 

해외도박 뉴스를 보니 2009년 호주에서 교환학생할 당시 봤던 유학생 도박꾼이 생각납니다.

 

내국인은 강원랜드 외의 카지노를 출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 학생들은 주로 외국에서 카지노를
처음 접하는 경우가 많지요.

 

첫 도박은 호기심에서 시작하고, 보통 그 호기심을
채우려 강원랜드까지 가지는 않으니까요.

 

이제 제가 봤던, 아마 아직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유학생 도박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호주에는 일반 술집에도 도박할 수
있는 슬롯머신이 있을 정도로 도박을 접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큼직한 호텔 카지노에서 큰 돈
걸고 하는 도박만은 못하지요.

 

짜잘한 슬롯머신만 있는 술집과는 달리 카지노엔
정말 다양한 도박들이 많습니다.

 

처음 시작은 슬롯머신으로 하다가도 어느새 블랙잭에
손대는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 많습니다.

 

제가 도박은 잘 몰라 종류는 상세히 모르지만,
순식간에 패가망신할 수 있다는건 압니다.

 

 

시드니 스타시티 카지노. 시드니에서 가장 큰 카지노입니다. (사진=구글 이미지)

 

 

  제가 알던 이 유학생도 가벼운
슬롯머신에서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선 접하기 어려운 카지노가 처음엔 꽤나
신기하고 재밌었던 모양입니다.

 

1, 2달러씩 걸다가 잃을만 하면 따고, 딸만하면
잃는 긴장이 계속되니 애간장이 녹았나봅니다.

 

잠깐 재미로 해보겠단 초심은 어디가고 어느새
1달러에서 10달러, 100달러로 판돈이 커졌지요.

 

게임도 슬롯머신에서 블랙잭으로, 블랙잭에서
더 큰 판돈이 걸린 게임으로 바뀌어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등록금에 손을 대게 됩니다.

 

 

 

  제가 다녔던 호주 대학교는 등록금을
안 내도 학기말까지 다닐 수 있었습니다.

 

다만 등록금을 내지 않으면 학기말까지 다녀도
성적을 열람할 수 없었지요.

 

이 학생은 학기 마지막날이라도 등록금을 내면
성적을 볼 수 있고 재학처리 됨을 이용했습니다.

 

1학기에 내야 할 등록금을 카지노로 날린 이 학생은
돈을 안 내고 학기 말까지 버티다가,

 

부모님이 미리 보내주신 2학기 등록금을 끌어다
1학기 등록금을 냈습니다.

 

급한 불은 껐지만, 부모님이 보내주는 생활비는
진작에 도박으로 날렸기에 돈이 없었지요.

 

일반유학생보다 나이가 많았던 학생은 형의 지위를
이용해 동생들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합니다.

 

돈 빌리는덴 남녀 없습니다. 남자동생이건 여자동생이건
일단 손 벌리고 봅니다.

 

순진한 동생은 ‘곧 돌려준다’는 형의 사탕발림에
속아 부모에게 받은 생활비 일부를 빌려주지요.

 

언제 돌려받을지 기약도 없이.

 

 

 

  등록금은 이미 끌어다썼고, 생활비는
동난지 오래고, 동생들에게 돈까지 빌린 이 학생.

 

하지만 도박에 빠진 사람이 정신차리는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닌가봅니다.

 

주변에서 빌린 돈으로 또 도박을 합니다.

 

혹여나 따는 날엔 동생들에게 술 한잔 사주며
‘한방 크게 쳐서 곧 갚는다’ 합니다.

 

동생들은 돈을 받고 싶지만 나이 차도 많이 나는
형이라 쉽사리 돈 달란 말을 못합니다.

 

그러다 이 학생은 인맥을 동원해 돈을 빌리는
것조차 힘들어질 때가 왔습니다.

 

 

 

  이미 갈 때까지 간 상황. 학생은
‘통 큰 결단’을 합니다.

 

"이걸 갚는 법은 큰 거 한방 밖에 없어.
한번만 더 땡기자"

 

학생은 결국 3학기 등록금까지 끌어다 도박자금으로
사용합니다.

 

등록금 안 내고 학기말에 돌려막을 생각으로 다닌
2학기는 결국 무효처리 되버립니다.

 

하지만 그동안 안 되던게 더 붓는다고 되나요.

 

결국 그 학생은 다음 학기 등록금까지 탕진하고
맙니다.

 

그래도 다행인건 사채 끌어다 쓸 만큼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 사채까진 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 학생의 부모님은 이런 상황을
꿈에도 모릅니다.

 

아마 아들이 외국에서 고생하면서 착실하게 학교
생활하는 줄 알겠지요.

 

늦깍이에 공부한다고 이역만리까지 간 아들
생각하며 그리워하실 그 부모님이 불쌍했습니다.

 

적어도 저에게 교훈은 하나 줬습니다.

 

‘나는 절대 도박하지 말아야지.’

 

이상 제가 호주에서 1년동안 있으면서 본 한 유학생
도박꾼의 1년 생활기였습니다.

 

 

 

  제가 한국에 오고 1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아마 그 유학생 도박꾼은 아직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학교를 졸업해야 돌아올텐데, 등록금이 송금되는
족족 도박비로 날려버렸으니까요.

 

20살 배기 어린 애들에게 빌린 돈은 다 갚았나
모르겠습니다.

 

돈이라는게 나잇값도 못하게 만드는 무서운 힘이
있더라구요.

 

Chip이 인생을 Cheap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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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제차와 외국인노동자, 우리의 이중적 외국관

우리에겐 두 가지 ‘외국(外國)’이 있다.

 

 

하나는 ‘외제차’로 대표되는 ‘외국’이다.

 

여기서의 외국이라는 관념은 ‘우리보다 좋은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과거 일제 전자제품에의 일방적 선호와 같은 외국관은 각종 제도를 논할 때도 나온다.

 

‘외국은 이런데 우리는 왜 이러냐’는 성토 등에서의 외국이 바로 그렇다.

 

이런 외국관의 대상은 주로 서유럽, 미국 등의 서구국가다.

 

외제차의 우수한
성능에 기반한 ‘외국’의 이미지는 선망을 담고 있다. (사진=구글 이미지)

 

 

또 하나의 외국은 ‘외국인 노동자’로 대표되는 ‘외국‘이다.

 

여기서의 외국은 ’우리보다 못한 것‘이란 의미를 함의한다.

 

공단지역에서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한국으로 오는 동남아 국가 노동자이 그 대상이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이라는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쓰이는 몇 안되는 사례다.

 

 

외국인 노동자의
‘외국’은 외제차의 ‘외국’과는 달리 낮잡아보는 ‘외국’이다. (사진=구글 이미지)

 

 

 

이처럼 우리의 외국관은 이중적이다.

 

서구권과
동남아권 국가 모두 우리에게 외국임에도 각기 다른 뉘앙스의 ‘외국’으로 표현된다.

 

차라리 외국의 사례를 들 때 미국이면 미국, 스웨덴이면 스웨덴 딱 대상을 지목해서 말하면

 

이런 이중적 외국관이 없을텐데 이를 전세계 200여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외국’이라는 간단한 단어로 대체하다보니 생긴 폐해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외국관은 아직도 대부분 ‘외국은 좋은 것’이란 인식이 지배적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외국’이란 단어의 이미지는 다분히 서구적이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학생인 ‘유학생’이란 말을 들을 때도 우리는 서구권 국가를 떠올린다.

 

우리나라 유학생들은 서구권 국가 뿐만 아니라 인도, 중동, 동남아 등 각지에 퍼져있음에도

 

‘유학생’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서구권 국가의 학생들이다.

 

‘외국’이란 이미지에 선망이 묻어있기에 가능한 사고다.

 

 

 

세계화 시대에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건 유창한 영어도 아니고 서구문화 따라잡기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건 객관적인 외국관이다.

 

‘외국은 좋은 것’이란 무의식적 사고는 우리의 상대적 후진성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과거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의 가보지 못한 외국에 대한 선망은
어쩔 수 없다 쳐도

 

1981년 이후 해외여행 자유화 이래 20년이 지났다.

 

이제는 객관적 외국관을 가질 때다.

 

타국의 좋은 제도 중 받아들일건 받아들이고 반면교사 삼을건 삼더라도,

 

‘외국은 좋은 것’이란 무의식적 인식은 벗어야 한다.

 

외국을 논할 땐 구체적 국가를 지목해서 논해야지 두루뭉술한 ‘외국’으로
대체해선 안된다.

 

 

 

사실 우리의 외국관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같은 미국인이더라도 백인은 선호하고 흑인은 무시하는 인종차별적 풍토나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폴 등을 ‘동남아’라는 한 굴레로 싸잡아 무시하는 무의식,

 

‘아프리카’라고 하면 그저 못 사는 흑인들이 몰려사는 열등한 땅이라는 선입견 등은

 

우리가 세계시민의식을 갖추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또한 세계적 강대국인 중국과 일본을 민족감정에 휩쓸려 “짱깨”니 “쪽발이”라고

 

애써 저평가하는 나라는 전세계에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본다.

 

정작 중국과 일본은 우리를 경쟁상대로조차 생각하지 않는데 말이다.

 

 

드넓은 세계에서
인정받는 일원이 되려면 우리부터 객관적 외국관을 가져야 한다. (사진=구글 이미지)

 

 

영어를 잘 배워 세계인과 소통한다고 해서 세계화가 되는건 아니다.

 

소통과정에서 묻어나는 외국에 대한 인식과 무의식이 잘못돼있다면

 

아무리 세계인과 소통한들 소용없는 일이다.

 

우리는 ‘외국’이란 단어 자체에 묻어있는 무의식적 선망과 이중성을 벗고

 

세계 각 국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관념을 가져야 한다.

 

동남아라 싸잡아 무시하고, 아프리카를 그저 ‘야만의 땅’으로만 바라봐선 우리 역시 발전이 없다.

 

흑인은 우리보다 못하고 백인은 우리보다 낫다는,

 

미국에선 범죄인
인종차별적 사고에 경각심을 가져야 우리자신이 세계무대에서 당당할 수 있다.

 

 

 

해외여행 자유화 20년, G20 정상회의 개최국.

 

두 개의 외국관은 역사의 유물로 남겨주고 객관적 외국관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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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욕하는 10대에게 보내는 편지

  내 10대 시절, 또래집단 사이에선 정치를 욕하는게 ‘멋’이었다.

 

10대 또래집단에겐 현 정치는 왠지 ‘나쁜 것’이고 정치인은 ‘나쁜 사람’이라는 무의식이 있었다.

 

국회의원을 욕하면 왠지 ‘뭘 아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 같아 신랄하게 욕하던 친구들도 있었다.

 

10대 시절 정치는 주 관심사가 아니었지만, 정치 얘기만 나오면 욕으로 시작해 욕으로 끝났다.

 

왜 욕하는지는 모른 채.

 

 

 

  사춘기엔 주류와 기성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정의’이자 ‘멋’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기성 제도권이 금하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이유가

 

‘난 사회가 못하게 하는걸 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과시가 없다고 할 순 없다.

 

그래서 소위 ‘잘 노는’ 무리에 끼려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셔야 한다.

 

그런 공동의 ‘범죄행위’를 통해 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해나간다.

 

정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가 뭔진 잘 모르지만 뉴스를 보니 정치인은 자기 뱃속 챙기느라
돈이나 받아먹는 사람이다.

 

욕하고 봐야한다.

 

정치인의 역할이나 정치공학적 역학관계 따위는 관심없다.

 

일단 정치, 특히 현 정치 주류에는 무조건 반발심리를 가져야 ‘멋있는’거고
재밌다.

 

같이 정치를 욕하는 ‘동질감’을 통해 또래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해나간다.

 

 

 

10대에 정치와 정치인을 욕하는건 쉽다.

 

원래 내가 아닌 타자에게 나쁜놈이라 욕하는건 쉽다.

 

게다가 나라는 사람을 모르는 타자를 욕하는건 더 쉬운 일이다.

 

연예인은 잘 생기기라도 했는데 정치인은 생긴 것도 별로다.

 

게다가 잘은 모르지만 정치인이 하는 일은 뇌물이나 챙기고 국회에서 싸움박질하는 것뿐이란다.

 

욕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도 정치인이 하는 일이 그저 싸우고 돈 받는 일이 아닐진대,

 

정치인의 존재이유와 역할은 관심이 없다.

 

게다가 10대 나이에 정치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면 좀 폼나 보인다.

 

10대에게 정치인을 욕하는건 ‘멋’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에의 무조건적 비난과 냉소가 멋이라는 관념은 책임의식이 결여된 비겁한 생각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욕먹는 국회의원을 해야 민주주의가 삶 속에 들어온다.

 

 

 

 

정치인은 자신과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10대가 그렇게 욕하는 정치인도 지지세력이 있으니 정치인을 하는 것이다.

 

또래집단의 세계가 절대 전부가 아니다.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가치를 우선시하며 살아간다.

 

인터넷에서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인터넷에서 90%의 지지를 얻는 후보가 현실에선 5%도 못
얻는 걸 보고 비분강개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대한민국에는 ‘나와 다른 사고’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아간다.

 

그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10대는 학교라는 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정치를 욕하는건 20대 때 넓은 세상을 보고 해도 늦지 않다.

 

한번 형성된 정치의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중히 공부해본 후에 가져도 결코 늦지 않다.

 

자신이 정치를 왜 욕하는지, 정치인이 왜 싫은지에 대해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에 기반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때 자신만의 정치의식을 가져라.

 

그리고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하면 된다.

 

투표권도 없는 10대에 미리 그렇게 정치를 욕할 필요 없다.

 

난 2008년 촛불시위 취재 당시 만난 여고생과의 인터뷰를 잊을 수 없다.

 

“왜 촛불시위에 나왔어요?”라는 질문에 그 여고생은 주저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이명박이 싫어서요”.

 

이런 대답을 안 할 수 있을 때 자신만의 정치의식을 가져도 늦지 않다.

 

한번
형성된 정치의식은 평생을 좌우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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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하나?'를 '동거한대'로 바꾸는 말의 힘

  호주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던 때다.

 

한국인 친구 C를 통해 한 소문을 들었다.

 

21살 한국인 동갑내기 커플인 A와 B가 동거한다는 것이었다.

 

남자인 A와 친분이 있던 나는 그들이 동거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런 소문을 듣게 됐냐고 C에게 묻자 대답이 맥빠졌다.

 

“내 친구가 저번에 쟤네가 손잡고 집에 들어간다고
들었대. 동거하는거 확실하대”

 

 

 

 

  단서는 그저 그 커플이 손잡고 집에 들어갔다는 것 뿐이었다.

 

처음엔 ‘동거하는거 아냐?’라는 의문이
말에 말을 거쳐 어느새 ‘동거한다’로 말이 바뀌었다.

 

구성원이 제한적인 한인 유학생 사회는 항상 ‘소재고갈’에 시달린다.

 

그래서 특히 남 얘기하길 좋아한다.

 

타인에 대한 소소한 가십은 무료한 생활의 활력소가 되기 때문이다.

 

소재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

 

그 희생양이 이번엔 A와 B 커플이었다.

 

 

 

말이 말을 낳고 키운다. (사진=
구글 이미지)

 

 

 

사람들은 남 말 하길 좋아한다.

 

남 말이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전하는 정보전달의 기능도 있고,

 

대화의 소재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 말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남 말’의 대상이 되는 제 3자가 대화주체간의 유대감을 공고히 해주기 때문이다.

 

‘너와 나’에 대해 서로 안 좋은 얘기를 하는건 아무래도 불편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없는 ‘남’ 얘기 하는건 편하다.

 

안 좋은 얘기도 서슴지 않을 수 있다.

 

갑과 을은 그 자리에 없는 병을 흉보면서 ‘서로 속을 털어놓는 사이’가 된다.

 

‘남을 흉본다’는 ‘나쁜 짓’을 함께 하는 공범이 되어 둘 사이의 유대감은 더 강해진다.

 

 

 

 

  남 말하면서 서로의 유대감을 강화시키는 것까진 좋은데,

 

문제는 그 ‘남 말’이 입에 입을 탈수록 왜곡된다는데 있다.

 

A가 B에게 한 말을 B가 C에게 전할 때는 무언가 빠지거나 더해진다.

 

위의 사례도 ‘동거하는거 아냐?’라는 말이 ‘동거하나 봐’를 거쳐 ‘동거한대’로 변했을 것이다.

 

이런 추측성 의문이 ‘진실’로 변하는건 얼마나 많은 ‘입’을 거치느냐에 달렸다.

 

유명인일수록 그를 말하는 입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연예인에 대한 추측성 루머가 많은 것이다.

 

‘제3자’라는 희생양은 ‘한 때의 즐거운 시간’을 위해 소비될 뿐이다.

 

하지만 그 말은 또 다른 이에게 전달되고, 그 왜곡의 정도가 커진다.

 

 

 

예로부터 이런 시조가 있어온
걸로 봐선 ’남 말’은 인간본성인가보다. (사진= 직접 촬영)

 

 

 

  ‘나와 A’가 있을 땐 B가 남이지만, ‘A와 B’가 있을 땐 내가 남이다.

 

내가 A에게 B에 대해 얘기하면 A는 B와 있을 때 나에 대해 얘기한다.

 

말은 계속 돌고 돌며 커지고 변한다.

 

작은 콩이 어느새 수박이 된다.

 

그게 입에 입을 거쳐 만들어지는 ‘남 말’의 힘이다.

 

남 말을 할 때 항상 잊지 말길.

 

나도 언제나 누군가에게 ‘남’이 될 수 있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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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이 20대에게 외면받지 않을려면

  소통, 변화, 개혁을 외치던 한나라당
최고위원 경선이 안정을 택하며 끝났다.

 

젊은층을 수용하겠다는 외침들은 안정론에
묻혀버렸다.

 

이번만은 변화하는 한나라당을 보고싶었던 20대 지지자인 나는 실망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요즘 또래사이에서 한나라당 지지자라고
말하는 자신감이 조금씩 떨어지던 차였기 때문이다.

 

 

변화보단 안정을 택한 채 끝난 한나라당 최고위원
경선. (사진=구글 이미지)

 

 

  나는 보수의 가치를 믿는다. 개인의
자유가 최우선이며 경쟁을 통한 발전을 믿는다.

 

자유와 평등 중 하나를 택하라면
자유를 택하겠다.

 

평등한 자는 불평등을 원하고, 불평등한 자는 평등을 원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믿기 때문이다.

 

만인의 평등을 추구했던 공산주의의 몰락이 그 역사적 증거다.

 

그래서 주위에서 ‘뉴또라이’, ‘딴나라당’이라 한나라당을 비난해도 한나라당을 지지했다.

 

 

 

 

  하지만 요즘 한나라당 지지자 해먹기
참으로 힘들다.

 

서민을 위한다 외치지만 부자정당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부권력투쟁 파열음이 전국에 울리고 있다.

 

‘무상급식’같은 정책아젠다 주도권은
야당에 빼앗긴지 오래다.

 

선거 프레임은 어느새 ‘MB 대 반MB’로 고착화됐다.

 

6/2
지방선거로 혼쭐이 나고서도 변화를 택하는 용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래선 젊은층을
끌어들일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젊은 층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이유 중 하나도 도덕적 우월성이다.

 

도덕성은 돈으로 대표된다.

 

능력의 유무를 떠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도덕성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정치판 변화 희망을 줬다.

 

02년 대선 당시 ‘차떼기당’과 ‘돼지저금통’은 극명히
대비됐다.

 

도덕과 능력은 별개지만 그래도 도덕성이 높아보이면 정당성을 얻기 쉽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젊은 지지자들이 돼지저금통을
들고 환호하는 모습. (사진=구글 이미지)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에서 젊은층의
지지를 받은 이유는 ‘이명박 매직’을 믿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 평직원에서
시작해 사장이 된 능력, 버스전용차로와 청계천에서 보여준 추진력이

 

국가경제를
발전시켜 자신을 잘 살게 해주리라 믿었다.

 

그래서 BBK로 대두된 도덕성 논란은 큰 변수가
되지 못했다.

 

도덕은 ‘잘 먹고 잘 사는’ 가치에 우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명박 매직은 없다.

 

젊은이들은 주가7000이 되는 날을 꿈꿨지만
그런건 없었다.

 

취업은 여전히 힘들다.

 

 

 

  한나라당이 20대에게 외면받지 않으려면 도덕이나
경제 중 하나라도 잘 키워야 한다.

 


노무현식으로 도덕성을 부각시키거나 대선 때 이명박식으로 경제의 괄목성장을
내세워야한다.

 

그리고 부자정당 이미지를 벗어야 한다.

 

도덕과 경제 둘 다 있으면 이상적이지만 둘 중 하나라도 확실히 키우면 젊은층은
돌아온다.

 

하지만 부자정당 이미지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

 

20대 또래집단은
감성에 많이 좌우된다.

 

가난과 소수가 무조건 선인건 아님에도 감성은 ‘가난한 소수’를
옹호한다.

 

20대는 개인적으로는 부자를 좋아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부자를 싫어한다.

 

부자정당 이미지는 한나라당 최대의 족쇄다.

 

 

  

  20대의 문화에 적극 개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젊은 세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젊은층의 한나라당에 대한
고정적 이미지를 깨는 ‘파격적 복안’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한나라당 의원이 주최하는 ‘클럽파티’는
어떨까.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은 10-20대가 열광하는 e스포츠를
통해 긍정적 이미지를 이끌었다.

 

자신과 같은 문화를 즐기는 정치인을 좋아하는건
당연하다.

 

한나라당은 이미 야당에게 트위터라는 젊은
세대 아이콘을 선점당해 따라가기 바쁘다.

 

더이상 야당에게 젊은 문화를 선점당한다면
수구꼴통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다.

 

 

 

젊은 세대의 문화인 e스포츠에 적극 참여하는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 (사진=원희룡 의원 블로그)

 

 

 

  한나라당은 최고위원 경선에서
줄곧 변화를 외쳤다.

 

하지만 안정을 택했다.

 

이번 7/28 재보궐선거에서까지 참패하면
남은건 레임덕과 추락 뿐이다.

 

나는 한나라당의 추구가치인 자유와 경쟁을 믿는다.

 

건강한
보수적 가치를 믿는 ‘침묵하는 다수’를 붙잡고 젊은 마음을 되돌리려면 이대론
안된다.

 

안정적으로 앉아서 파국을 지켜보든 몸을 일으켜
현상을 변화시키든 선택은 한나라당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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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전용'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사는 것

  얼마전 MBC TV ‘여자가 세상을 바꾼다’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한 여대생이

 

20대를 위한 정책으로 ‘여성전용 계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논란이 됐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계단을 오르면 아래에 있는
남성들의 시선이 불편하니

 

여성전용 계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MBC TV ‘여자가 세상을 바꾼다’의 장면. (해당
여성 얼굴은 신상을 위해 보호처리함)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발언이 공중파를 타 ‘루저’가 유행어가 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남자의 자존심인 ‘키’ 못지 않게 ‘계단’ 문제도
민감한 문제다.

 

인터넷의 유명한 한 진보논객도 ‘계단에서의 똥꼬치마’
운운하다가 뭇 비난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부쩍 우리 사회에 ‘여성전용’이 많아졌다.

 

여성전용 주차장, 여성전용 택시, 여성전용 좌석까지.

 

 

 

최근엔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전용 주차장 (사진=구글 이미지)

 

 

최근 경지 지역 일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여성 전용 좌석 (사진=구글 이미지)

 

 

  ’여성 전용’의 기본 취지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배려하고자 하는 의도일 것이다.

 

(내가 여성이라면 ‘사회적 약자’라는 말이 불쾌할
것 같지만)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차에 ‘서툴다’는
인식이 있어 이를 배려하는 취지는 알겠다.

 

야밤에 탄 택시에서 벌어진 성범죄들의 희생자는
거의 여성이므로 이도 마땅하다.

 

허나 이번에 경기도에서 실시한다는 ‘여성전용
좌석제’는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다.

 

진정한 ‘약자’인 임산부와 노인을 배려하는 좌석이
있는 상태에서 ‘여성 전용’까지 생긴다니.

 

남자도 다리가 있고, 서 있으면 그 다리는 똑같이
아프다.

 

 

 

 

  여성전용 좌석이 생긴 이유 중 하나가
 

 

‘버스에서 짧은 치마 입고 앉았을 때 옆 남성
시선 때문’이란다.

 

‘여성전용 계단’의 설립 취지와 일치한다.

 

남성들이 마치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 받는다고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성범죄자들이
언론에 집중조명되고 있다.

 

이 때문인지 요즘들어 더욱 모든 남성이 성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잠재의식이 커진 모양이다.

 

오죽하면 이런 대자보도 있다.

 

 

 

 

 

 

  사회에는 분명 극악무도한 성범죄자들이
많다.

 

하지만 그 범죄자로 인해 모든 남성이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 받는건 새로운 형태의 억압이다.

 

허나 ‘어차피 보라고 짧은 치마 입은거 아니냐.
신경쓰임 아예 입지마라’고 하면 안된다.

 

패션은 자유다. 하지만 모든 남성을 ‘성범죄’와
연관시켜 의식하면 부당한 피해가 생긴다.

 

‘여성전용 계단’을 보고 느낀 남성들의 분노는
이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남성이 계단을 오르면서 앞의 여자를 보고 적어도
‘죄의식’은 느끼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아무 죄 없이 괜스레 눈을 어디 둘지 몰라 당황스러워하진
말아야 하지 않는가.

 

앞에 가는 여성이 치마를 가리면 괜히 ‘내가 나쁜
놈인가’라는 생각은 들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자신이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 받는 느낌이 좋을리
없다.

 

이런 이유없는 ‘죄의식’이 부당한 피해다.

 

과도한 ‘여성 전용’은 남성들의 이런 ‘원인 모를
죄의식’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다.

 

 

 

  물론 안전을 위한 여성전용 택시같은
‘사회적 배려’는 필요하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려가 양성평등의
지름길이 아니다.

 

사실 과도한 배려는 여성을 ‘배려해줘야 할 약자’로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내가 여성이라면 자존심 상하는 말이다.

 

진정한 양성평등은 이런 배려로 이뤄지는게 아니다.

 

루저 논란을 일으킨 KBS ‘미녀들의 수다’의 한
외국여성에게서 진정한 양성평등의식을 봤다.

 

‘그래도 자기보다 더 좋은 조건의 남자와 만나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남자가 나보다 못 벌면 내가 먹여 살리면
되지 않느냐. 그정도 자신도 없나’

 

 

 

  남성이라 혹은 여성이라는 의식적
구분없이
똑같은 ‘사람’으로서 양성의식을 갖는 것.

 

이게 진정한 양성평등 아닐까.

 

양성평등의 첩경은 ’의식의 변화’지, 여성전용의
과도한 확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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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선생'이 졸업 후 잊혀지지 않는 이유

  내가 A 선생님을 만난건 2002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껄렁거리기 좋아하던 고2 시절 담임이었던 A 선생님은
전형적인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지각하거나 명찰을 안 달면 가차없이 ‘엎드려
뻗쳐!’를 외쳤다.

 

집에서 학교가 보이는 거리임에도 지각하기를
즐겨했던 나는 선생님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지각횟수가 누적될 때마다 ‘스윙’ 수가 늘어났는데,
최대 15대까지 맞아봤다.

 

교무실에 끌려가서 엎드려 뻗쳐 15대를 맞는 동안

 

주변 선생님과 애들이 날 바라보던 애처로운 눈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풀스윙 15대는 참으로 견디기 힘들다. 그래도
지난 고교생활동안 강인한 맷집을 얻었다. (사진=구글이미지)

 

  

 

  그렇다고 A 선생님이 몹시 수업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사실 아주 못했다.

 

수학선생님이었는데, 그다지 좋은 대학 출신도
아니었다.

 

심지어 어려운 문제는 자기 대신 우리 반 1등에게
풀어보라고 할 정도였다.

 

고등학교 2학년 당시 수학시간은 학문적으로는
배울게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A 선생님은 때리는덴
신통방통했지만, 가르치는건 신통찮았다.

 

 

 

 

  하지만 졸업 후 이름이 생각나는건
A 선생님 뿐이다. 스승의 날 찾아뵌 것도 A 선생님 뿐이다.

 

졸업 후 같이 술 한잔 하고 싶은 선생님도 A 선생님
뿐이다. 나 뿐만 아니다.

 

당시 2학년 때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너도나도
A 선생님을 ‘가장 좋은 선생님’으로 꼽는다.

 

나를 비롯해 수많은 친구들에게 피멍을 안긴 A
선생님이 왜 가장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될까.

 

 

 

일단 이 당시엔 잘못했으면 맞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허벅지에 든 멍을 보면서도 ‘경찰에 신고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내 잘못에 대한 업보려니 생각했다.

 

요즘에는 선생님들이 신고가 무서워 거의 안 때린다고
하는데,

 

이 당시만 해도 선생이 학생을 때린다고 해서
경찰에 신고하는건 뉴스에서만 봤던 일이다.

 

  

 

  A 선생님은 항상 인성을 강조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인성이 안되면 다 쓸모없다고 했다.

 

당시 남녀분반이어서 남자만 있던 우리 반에게
‘남자는 의리다. 단합이 중요하다’는걸 강조했다.

 

반의 단합을 위해 주말에 학교 강당에서 텐트
치고 합숙도 했다.

 

촛불 켜고 부모님 생각하는 그런 ‘정례적 행사’말고
‘선생님 표 진짜 합숙’이었다.

 

야밤중에 우리끼리 몰래 맥주 한캔 씩 사와서
먹어도 눈감아주셨다.

 

수학여행 외엔 다같이 밤 샐 기회가 없는 고등학생에게
강당텐트합숙은 ‘굿아이디어’였다.

 

그래서 유독 고2 때 친구들만큼은 7년이 지나도
계속 만난다.

 

 

 

  A 선생님은 소위 ‘문제아’들이 담배
피웠다고 때리긴 했어도 공부를 놓게 방치하진 않았다.

 

아마 이 친구들이 가장 많이 맞았을거다. 그래도
A 선생님은 이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맞았어도 졸업한 후 이 친구들이 같이
당구치고 술먹는건 A 선생님이다.

 

 

 

  요즘 고등학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학교에서의 체벌이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하긴 학생들이 학교에 경찰을 부르는게 무서워서라도
못 때릴 것 같다.

 

‘학생인권’ 차원에서 보면 바람직한 일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씁쓸하다.

 

‘체벌 교사는 나쁜 교사’라는 단순한 등식이 왠지
아쉽다.

 

물론 그냥 ‘매’도 있겠지만 ‘사랑의 매’는 분명
있다.

 

당시는 아프더라도 훗날 떠올리면 ‘그럴 때도
있었지’하며 슬며시 미소지어지는 매도 있다.

 

지금 생각해봐도 만약 그 때 경찰에 신고했더라면
지금 내게 ‘보고 싶은 스승’이 있겠나 싶다.

 

 

 

 

  ’학원 강사’는 학생 인격 형성과는
관계없다.

 

그저 성적만 올리면 된다. 정이 없다.

 

우리 공교육이 사교육에 비해 경쟁력이 없다지만
이는 학업에 국한된 말이다.

 

학교의 경쟁력은 아이에게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인성을 가르칠 수 있다는데 있다.

 

이는 학원 강사가 하지 못한다. 학교 선생이 할
수 있다.

 

선생이 학생을 ‘제자’가 아닌 ‘고객’으로 대하여
학생의 잘못을 꾸짖을 수 없다면

 

선생과 강사는 다를게 없다.

 

선생은 강사가 아니다. 스승이다.

 

 

 

여러분은 어떤 선생이 기억에 남나.

 

무지 잘 가르치지만 학생 인격에는 관심 없는
선생이 기억에 남나,

 

무지 때리긴 했어도 속마음의 온기가 느껴지는
선생이 기억에 남나.

 

정말 ‘체벌은 무조건 나쁜 것’일까.

 

고교 졸업 후 7년이 지났지만 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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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이란 이름의 덧없는 악세사리

  고등학교 3학년, 소위 ‘명문대’를
가면 인생이 활짝 피는 줄 안다.

 

‘대학가면 인생 결정된다’는 선생들의 당근을
먹으며 경마처럼 질주한다.

 

열심히 달려 명문대 커트라인을 통과한다. 이제
화려한 인생의 서막이 열릴거라 기대한다.

 

20살. 대학생. 기대대로 그 서막이 열린다.

 

 

 

  대학교 초년생인 20대 초반에는 그
학벌이 자신을 규정하는 가장 큰 정체성이 된다.

 

‘우리는 너희와 달라’, ‘우리는 앞으로 성공할
사람들이야’라는 의식 따위가 은연중에 생긴다.

 

버스에서 일부러 학교이름이 새겨진 폴더를 슬쩍
내비치거나,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요구에 민증이 있음에도
일부러 학생증을 꺼내기도 한다.

 

이성을 만날 때도 ‘내 학벌이면 분명 여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겠지’라는 생각을 한다.

 

누구를 만나도 당당하다. 주변의 치켜세움도 그
정체성 강화를 돕는다.

 

자신의 미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안정적일거란
확신을 갖는다.

 

자신이 앞으로 뭘 할지는 잘 모르지만, 고액연봉을
받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질거라 믿는다.

 

사람을 만나는데 있어 무엇보다 폼나는 악세사리다.
하지만 그저 악세사리일 뿐이다.

 

 

 

 

  남자는 군 제대 후 취업 시즌이 되면
자신의 ‘학벌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환상임을 깨닫는다.

 

20대 후반이 되면 ‘너 학교 어디 다녀?’란 질문이
‘너 회사 어디 다녀?’로 바뀐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사람들은 ‘학벌’보다 ‘능력’을
중시한다.

 

능력이란 곧 돈을 말한다.

 

 

 

 

  사람들은 ‘고학벌=고연봉’이라 생각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학벌은 가능성의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

 

성공의 ‘가능성’을 조금은 높여 줄 수는 있을
수 있지만, 절대 이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20대 초반에 학벌이 주는 환상을 딛고
이를 깨닫기는 쉽지 않다.

 

고학벌이 20대 초반에 선호되는 이유는 그
학벌이 고소득으로 이어진다는 기대심리 때문이다.

 

사회적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20대 후반의
학벌은 20대 초반의 학벌과 다르다.

 

학벌 그 자체는 20대 초반에나 반짝 빛날
뿐, 성과가 따라오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주변에서 이런 푸념을 많이 듣는다.

 

‘내 학벌이 SKY가 아니라서 떨어졌어’ 혹은 ‘나도
SKY였으면 붙었을텐데’라고.

 

하지만 이는 비겁한 변명이다.

 

자신의 내적 역량 문제를 학벌 탓으로 돌리면
그 순간 마음은 편해진다.

 

원래 개인보단 ‘구조’를 탓하는게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학벌때문에 취업이 안된다’는 말은 역량의 부족을
인정하기 싫은 자의 변명이다.

 

학벌과 역량은 정비례 관계가 아니다.

 

단지 학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고학벌=고역량’일거라는
허상을 만들 뿐이다.

 

 

 

  요즘 삼성그룹 신입사원들의 학벌을 보면 아주
아주 다양하다.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다양한 대학 출신들이 ‘삼성’의
이름으로 일한다.

 

학벌이 채용요소로 작용했다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다.

 

학벌과 사회적 성공의 연관관계는 인식이 만든
허상일 뿐이다.

 

명문대학 출신 사회지도층도 있지만, 고졸출신
사회명망층도 많다.

 

우리나라 대통령 중 명문대 출신이 있기나 하던가.

 

중요한건 개인의 역량이지, 학벌이 아니다.

 

학벌은 그저 젊은 시절의 폼나는 악세사리일 뿐이다.

 

그것도 유효기간이 4년도 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어쩌면 지금 바뀔 수 없는 학벌을 탓하며 바뀔
수 있는 자신을 가로막는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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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대한 오만과 편견


신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집 앞에 배달되어왔다.

 

요즘엔 신문구독하면 구독료도 할인해주고, 각종 경품도 주는데도 구독율은 점점
떨어진다.

 

이 원인을 단지 변하는 세태만을 탓해선 안된다.

 

이는 신문이 대중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신문마다 정반대의 기사를 쓴다.

 

어느샌가 대중들에게 신문은 정보전달의 매개가 아닌 이념갈등의 도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신문에 나오는
기사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대중의 비율이 점차 감소하고 있다.

 

대중은 신문의 본연 목적인 ‘정보전달’은 어느샌가 퇴색되고 있다고 여긴다.

 

특정 신문에 특정 프레임을 갖게 된 대중들은 자신의 이념성향과 일치하지 않는
신문은

 

무조건 배척한다.

 

일단 자신의 성향과 반대된다고 ‘여겨지는’ 신문은 애시당초 보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따라서 편견은 점점 증폭된다.

 

 

 

  나도 예전에는 그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내 생각과 다른
기사를 쓰는 신문을 보면 솔직히 화가 났다.

 

‘이건 아닌데 왜 이렇게 쓰지? 사실을 왜곡하는구나!’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의의 척도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오만이었다.

 

세상엔 다양한 가치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간다. 나와
‘다른’ 사람 참 많다.

 

하지만 말로는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정작 민주주의의 근간인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했다.

 

이런 신문이 있으면 저런 신문도 있어야 다양한 대중들의 가치지향을 기사로 담아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한가지 성향만을 가질 수 없기에, 다양한 성향의 신문은 필연적이다.

 

특정 신문의 논조가 내가 생각하는 정의와 맞지
않는다 하여 배척하는건 오만이다.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민주적 인간이라면 이를 존중해야 한다.

 

자신의 정의가 모두의 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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