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고향까지(9)

길 건너편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오늘 우리의 긴 여정이 끝날 것이다. 이틀째 낮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이레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대구에서 군 생활을 하는 친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화를 해 오고 나의 무모한 계획을 들은 몇 안 되는 친구들은 간혹 전화로 안부를 묻기도 하고 방해가 될까 봐 문자 메시지로 격려를 해 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걱정해 주고 격려해 주는 친구들이 고맙다.

해발 520m의 진부령은 백두대간의 동서를 잇는 최북단의 고개다. 미시령 한계령 대관령 같은 재보다는 높지 않지만 재의 맨 위부터 끝까지 하천을 끼고 길이 나 있어 경치가 좋은 곳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 고성군 간성읍 흘리이다. 내 고향 땅인 셈이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이 바로 간성 읍내니까. 그러고 보니 간성읍은 동서로 40여 km나 되는 셈이다. 어제 어둑어둑해질 때 진부령과 미시령이 갈라지는 용대 삼거리를 지나자마자 간성읍 경계로 들어왔는데 앞으로도 30km는 족히 가야 읍내에 닿을 수 있다. 읍내를 빼면 거의가 산지이기도 하다.

오늘 걸을 거리는 이정표 상으로 38km이다. 아마도 여드레의 일정에서 가장 많이 걸어야 할 듯하다. 다행히 가장 긴 진부령 구간이 내리막이니 걷기엔 편할 것 같다. 내리막이라고는 해도 등산할 때의 하산 길처럼 급경사가 아니니 쿠션이 좋지 않은 샌들을 신었어도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게다가 비가 억수로 쏟아져 길이 아니라 물 위를 걷는다. 물이 훌륭한 쿠션 구실을 하니 샌들의 딱딱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하늘은 작달비를 퍼붓고 계곡은 붉덩물을 토해 낸다. 비 때문에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데다 연방 천둥번개가 치고 빗소리에 계곡의 물소리까지 진동하니 귀마저 먹먹하다. 이레 동안 빗속을 걷고 있지만 어제까지 내린 억수 같았던 비는 오늘에 비하면 비도 아닌 듯이 느껴진다.

전화도 받기 어려운 상황인데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누가 전화를 한다. 할 수 없이 상체를 숙여 가며 전화를 받으니 서울에 있는 친구들한테 연락 받았다며 고향 친구들이 환영하러 오겠다고 한다. 그럴 필요 없다며 이따 도착하면 소주잔이나 기울이자고 했더니 이 친구들 이번엔 플래카드를 걸겠다고 한다. 못 말릴 녀석들이다. 누구한테 자랑하려고 하는 일도 아니고 광고할 일도 아니니 제발 참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자 물러선다.

고향의 품은 늘 아늑하다.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여유가 생기는 건 이 힘든 여정이 막바지에 다다랐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예가 고향 산천이어서 그럴 거다. 간성은 지도에서 보면 바닷가인 듯하지만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지역이다. 바로 북쪽에 있는 거진읍은 어업이 발달했지만 이상하리만큼 갯내가 풍기지 않는다. 내가 어릴 적에도 내 고향이 바닷가 마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소풍 때나 되어야 바닷바람을 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산촌이란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너른 들판이 있는 것도 아닌데. 뒷동산에 오르면 동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백두대간 준령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이다. 남과 북에는 각각 하천이 흐른다. 진부령과 나란히 흐르고 있는 하천은 바로 북천이다.

간성은 ‘3정(井) 4지(池) 5목(木)’의 고장이다. 세 개의 우물, 네 곳의 못, 다섯 그루의 나무가 있는 고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물터와 한 그루의 나무만이 남아 있다. 내가 아이디로 쓰고 있는 ‘3springs’는 바로 ‘3정’에서 따온 것이다. 우물을 영어로 ‘well’이라고 하지만 대개 우물이라는 것이 샘을 파서 나오는 것이라 샘을 뜻하는 ‘spring’을 쓴 것이다. 봄이란 뜻도 있으니 뭔가 샘솟고 희망찬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소원이 들어 있기도 하다. 예전에 아이들이 유니텔에 가입하게 됐을 때 큰아이에게는 ‘fourpond’를, 작은아이에게는 ‘fivetree’를 아이디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바로 ‘4지’, ‘5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녀석들은 그 의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젠 쓰지 않는다.

그제부터 아프던 왼쪽 무릎이 재를 내려가려니까 더욱 신경 쓰인다. 가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엊그제 거니고개에서 배수로에 처박힐 때 무릎에 충격이 갔나 보다. 이틀 동안은 특별히 내리막을 걸은 적이 없어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오늘은 제법 아파 자꾸 절뚝거리게 된다. 발바닥은 물집 잡히고 무릎마저 성치 않으니 최악의 상황이다.

여태까지는 차를 마주 보고 걸었지만 오늘은 반대편으로 걸었다. 길의 오른쪽에 갓길이랄 수는 없어도 약간의 여유가 있는 데다 왼쪽은 길을 내느라 산을 깎아 내는 바람에 생긴 절벽이 이어져서 언제 돌이라도 굴러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진부령을 거의 다 내려와 광산리를 지날 때 길 건너 비닐하우스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를 부른다. 세찬 빗속이라 뭐라는지 알 수 없다. 걸음을 멈추니 옥수수를 들고 흔들며 먹고 가라신다. 쉬었다 다시 출발하려면 발이 더 아프니 그냥 가기로 한다. 아주머니에겐 고맙다고만 소리치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대대리에 이르니 북천 너머 남쪽으로 멀리 간성읍내가 보인다. 지금은 들를 여유가 없다. 아쉽지만 북쪽으로 향한다. 오른쪽으로 검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하다.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간성, 대진, 속초에서 자랐다. 모두 바다와 산이 함께하고 있는 곳이다. 이보다 더 좋은 자연환경이 어디 있으랴. 고향에서 보낸 세월보다 서울에서 보낸 세월이 훨씬 길지만 느낌은 항상 그 반대다. 아마 고향의 추억이 세파에 찌들어 사는 나날의 어려움이 낳은 기억보다 강렬하기 때문이지 싶다.

거진 어귀를 지나니 날이 벌써 어두워진다. 화진포 호수를 지나지만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화진포는 숫자 8과 같은 형태로 생겼는데 둘레가 16km에 이르며 자연호로는 남한에서 가장 크다. 예전엔 군사지역이라 호수의 남쪽 부분은 폐쇄돼 있었다. 광복절이나 돼야 하루 제한적으로 개방해 주곤 했다. 지금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이곳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 별장이 있고 6·25전쟁 전 세워진 김일성 별장도 있다. 당대의 권력자들 별장이 몰려 있는 것만으로도 이곳의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짐작하고 남으리라.

 

화진포 호수의 북쪽 부분. 호수 수면의 왼쪽 중간쯤에 있는 구조물이 이승만 별장으로 향하는 다리다.

다리가 있곳이 숫자 8처럼 생긴 호수의 가장 잘록한 부분이기도 하다.

바닷가에 깎아지른 듯 솟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김일성 별장은 ‘화진포의 성’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돼 공개되고 있다. 8자형 호수의 잘록한 부분의 건너편 야트막한 언덕에 있는 이승만 별장은 안보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산 중턱의 하얀 건물이 바로 화진포의 성이라고 불리는 김일성 별장이다.

산과 호수만으로도 아름다운데, 게다가 망망대해까지 펼쳐져 있다. 이 수려한 그림의 마무리라도 짓듯이, 바다엔 한 점의 자그만 섬이 외로이 떠 있다. 더 무얼 바랄 것인가. 지금은 이 아름다운 곳을 감상도 못 한 채 어둠 속을, 빗속을 걷고 있으니 그게 섭섭할 따름이다.

화진포 앞바다에 자리잡은 무인도 금구도(金龜島)이다.

그러나 요즘의 화진포에는 아쉬운 점도 있다. 해수욕장 편의시설이 자연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양박물관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앞에 넓게 펼쳐진 주차장은 정말 꼴불견이다. 백사장이던 곳에 아스팔트를 깔아 주차장을 만들다니 어이없다. 그 너른 백사장을 없애 가면서 바다 바로 앞까지, 호수 옆구리까지 차를 끌고 오도록 주차장을 만들어야만 할까? 기왕 자연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에게 그 고운 화진포 백사장을 즐길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백 번, 천 번 낫다는 생각이 든다. 100~200m 차를 타고 편히 오는 것과 마치 눈밭인 듯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며 곱디고운 모래밭을 걷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관광객에게 화진포를 더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일인지를 정녕 모르는 걸까?

어쨌든 화진포를 지나, 밤바다를 끼고 30분여를 더 걸어 드디어 우리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할 자그만 고개를 오른다. 이 언덕 위에는 우체국이 있다. 안도현의 시 ‘바닷가 우체국’처럼. 우체국에서 바다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앞 길 건너편에 서면 저 아래로 쪽빛 동해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언덕을 지나 내리막에 우리의 목적지인 고향집이 있다. 갑자기 아들 녀석의 발걸음이 빨라지더니 성큼성큼 집으로 들어선다. “어매야, 야가 누구니? 어떻게 된 거니? 손님이 온다더니 야네구나.”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어머니 눈이 휘둥그레지신다.

어제 도착한 여동생 내외는 시치미를 떼고 오늘 저녁에 손님이 올 테니까 맛있는 음식을 좀 해 놓아야 한다고 했단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어떤 손님인데 밤 9시가 넘도록 오지 않느냐며 조바심을 내셨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손자 녀석이 빗속에서 불쑥 나타났으니 놀라실밖에. 그것도 서울서부터 걸어서 왔다니.

이리하여 8월 2일 오전 7시에 시작된 우리의 긴 여정은 9일 밤 9시 30분에 끝을 맺었다. 여드레 만이다. 비 때문에 제대로 보고 느끼고 즐기지는 못했지만 길고 긴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이겼다.
오늘은 모두 5만6932걸음을 걸었다.

#기선(其線)?

진부령자락, 그러니까 간성읍내와 거진 대진으로 길이 갈라지는 대대리 근처에 이르자 좀 생소한 표지판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몰라도 교통과는 관련이 없는 표지판이라 눈길조차 준 기억이 없다.

한글과 한자, 로마자까지…. 국제화가 아주 잘된 표지판이다. 그런데 한자 표기가 영 이상하다. ‘其線’이 문제다. 사실 한글만으로는 ‘기선’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한자가 이해를 도와줘야 할 텐데 더욱 헷갈리게 만든다. ‘其’는 ‘그 기’니까 ‘其線’은 ‘그 선’이라고 옮길 수 있다. ‘간성 그 선’이라. 도대체 어떤 선이란 말인가. ‘토지조사사업 그 선’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마지막 줄 영어를 보니 드디어 의문이 풀린다. ‘Base Line’이란다. 그러니까 ‘기준선(基準線)’이란 뜻이다. 기준선을 줄여서 ‘기선’이라고 하려면 한자는 ‘基線’이라고 해야 할 테다. 그걸 세워 놓은 주체가 어느 기관인지 알 수 없으나 하루빨리 바꿔 주면 좋겠다. 기선이란 말이 측량 관련 전문용어로 쓰이기는 하는 모양이지만 한글 표기는 일반인이 알기 쉽게 ‘기준선’ 정도로 해 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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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고향까지(8)

창밖을 내다보니 빗발이 여간 세찬 게 아니다. 고모는 이 빗속을 어떻게 가겠다는 거냐며 하루 더 묵어 비가 그치면 가든지, 차를 타고 가든지 하라신다. 애 힘들게 이게 무슨 짓이냐고 거의 야단을 치신다. 아직 정정하시긴 해도 80대 중반의 노인이시니 우리 꼬락서니가 기가 막히는 모양이다.

때마침 여동생 내외가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배낭 속에 든 물건을 절반 넘게 꺼내 놓았다. 책이며, 카메라 충전기며 불요불급한 물건들을 몽땅 내놓고 나니 배낭이 한결 가볍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을 검색할 때 배낭은 될 수 있는 대로 가볍게 해야 한다는 글들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실제로 걸으면서 배낭이 무거워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해 본 적이 없기도 하다. 아무튼 이제 이틀이면 계획대로 여행을 마칠 수 있게 되고 카메라 휴대전화도 충분히 충전해 두었으니 충전기는 필요 없게 됐다. 책도 어디 그늘에서 쉬게 되기라도 하면 틈틈이 읽으리라 마음먹었지만 빗속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고, 숙소에 들면 씻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지곤 했으니 독서는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던 셈이다.

인터넷에서 본 또 하나의 정보는 신발은 쿠션이 좋은 운동화를 신으라는 것이었다. 이건 철저히 지켰다. 하지만 연일 내리는 비 때문에 흠뻑 젖은 신발을 고집스레 신는 바람에 발바닥은 물집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결국 아침 일찍 시장으로 나가 아직 문도 열지 않은 가게 문을 두드려 가며 스포츠샌들을 하나씩 사 들고 왔다. 쿠션은 좋지 않아도 운동화처럼 발이 죄이지 않으니 훨씬 나을 것 같다.

배낭 무게도 줄이고 신발도 바꿔 신고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데 고모께서 이 비에 어딜 가려고 하느냐며 야단을 치신다. 엿새 가운데 닷새를 비 맞으며 왔노라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물집 때문에 절뚝거리는 모습을 보고 노인이 안쓰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긴 할 거란 생각은 든다. 할 수 없이 주저앉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본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고, 시간은 가고, 안절부절못하다가 고모에게 사정사정하다시피 하며 출발한다. 벌써 10시 반이다. 많이 늦었다. 오늘 목적지는 진부령 정상이다.

한계 삼거리를 지나 진부령 쪽으로 접어들어 길가 노점에서 옥수수를 하나씩 먹고 있는데 동생 내외가 조카들과 함께 나타났다. 조카들의 재롱에 잠시 웃음꽃을 피워 본다. 요 녀석들에게 외삼촌 봤다는 얘기 할머니 할아버지께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손도장까지 찍어 본다. 하지만 이제 겨우 세 살, 다섯 살배기인 녀석들에게 약속을 지켜 주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일 테고 다만 잊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어른들에게 말씀드리면 괜히 걱정들 하실까 봐 그러는 것뿐이다. 아까 원통에서 출발할 때도 집에 알리지 마시라고 당부하고 온 터이다. 오늘도 출발이 늦었으니 날 밝을 때 닿기는 어려울 것 같아 동생에게 진부령에서 민박집을 예약해 놓으라고 일렀다.

 

여행하는 동안 한번도 둘이서 사진을 찍을 기회가 없었다.

찍어 달라고 부탁할 사람도 만날 수 없었고

만나더라도 비가 오니 카메라를 꺼내 들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마침 동생네를 만났을 때 비도 잦아들어 처음으로 부자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동생네와 헤어진 뒤 잠시 걷노라니 뒤에 건장한 하이킹족 두 명이 자전거를 끌고 우리를 따른다. 이들은 친구 사이로, 한 명은 광주에서 교사를 하고 있으며 한 명은 서울에서 사법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교사를 하는 이는 속초를 거쳐 동해안 남해안을 끼고 다시 광주까지 가고 사법시험 준비생은 속초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갈 거라고 한다. 왜 자전거를 타지 않고 끌고 가느냐고 물었더니 길은 좁고 차는 많아 자전거를 타고 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 걷는 것도 자전거를 타는 것도, 좀 과장하자면 이 땅에서는 목숨 걸지 않고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백담사 입구인 용대리 못미처서부터 차가 좀 적어지자 두 사람은 다시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고 한다. 서로 무사히 장정을 마치라고 격려의 말을 주고받으며 헤어졌다.

만해마을 건너편 식당에서 요기를 하면서 큰길로 걷기가 참 위험스럽다고 불평을 했더니 만해마을부터 진부령과 미시령 갈림길인 용대 삼거리까지 갈 수 있는 샛길이 있다면서 자세히 알려준다. 그 덕분에 두어 시간은 차 걱정 없이 걸을 수 있게 됐다. 오락가락하기는 하지만 빗발도 좀 약해졌다.

모처럼 한적한 길을 걸으면서 아들에게 출발할 때 던졌던 물음을 상기시켰다. ‘왜 걷느냐?’ 역시 묵묵부답인 이 녀석에게 말한다. 이 여행을 출발할 때 과연 그 먼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 우리 스스로가 확신하지 못했지만 이제 몇 시간만 더 걸으면 진부령이다. 내일이면 우리가 걸은 한 발짝 한 발짝이 쌓여 250km가 넘는 어마어마한 거리가 된다. 무슨 일이든 의지를 갖고 도전해라. 결코 포기하지 마라.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훌륭한 자산이 된다. 지금 실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아직 1년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다. 1년이 긴 시간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짧은 시간은 결코 아니다. 네가 하기에 따라서는 충분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용대리에서 모처럼 한적한 길을 찾아들었다.

걷기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런 길에 대한 정보를 모아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대 삼거리로 나와 진부령으로 접어드니 벌써 날이 어두워진다. 빗발도 다시 굵어진다. 이따금 빗속을 질주하는 차를 향해 안전봉을 흔들며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 다가간다. 정상에 다다르니 벌써 8시 반이 됐다. 동생이 예약해 둔 민박집은 음식점을 겸하고 있는데 벌써 불이 꺼졌다. 문을 두드려 방에 들고 주인에게 늦은 저녁을 부탁한다. 그런데 관광지의 민박집이라 그런지 좀 비싸다. 여태까지 오면서 묵은 모텔들의 갑절이 넘는다. 깨끗하긴 해도 여러모로 불편한데 말이다. 고지대인 데다 비가 와서 8월이라도 추위가 느껴진다. 이 집 방바닥까지 대리석으로 깔아 놓아서 방이 매우 차건만 오늘따라 보일러가 고장 났다고 한다. 이 밤에 다른 집을 알아볼 수도 없는 형편이다. 두꺼운 요를 깔았어도 한기가 느껴진다.

오늘은 4만4837걸음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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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고향까지(7)

지난밤 너무 늦게 숙소를 정한 탓에 오늘도 출발이 늦다. 밖에는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비가 좀 잦아들기를 기다려 보지만 그럴 낌새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10시 반이 넘었으니 더 지체하기도 어렵다. 신남에서 또 어울참으로 때운다.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힘내라며 따끈따끈한 옥수수 두 개를 건네준다.

또 다시 빗속으로 나선다. 신남을 벗어나니 비가 오락가락하지만 걸을 만은 하다.

동갈보대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이 휴게소에서 쉬기로 한 이유는 휴게소 이름이 독특해서,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늘 이 길로 오가긴 했어도 이 휴게소에 들른 적은 없다. 아마 많은 사람이 뜻을 묻곤 하나 보다. 이름의 유래를 휴게소 문에 자세하게 써 붙여 놓았다.

동갈보대는 이 고장의 골짜기 이름이라고 한다. 갈나무와 소나무가 무성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라는데 소나무를 이곳 사투리로 ‘보데기’라고 한단다. 그런데 사전에선 찾아볼 수 없는 말이다. 6·25전쟁 이후 주민들이 땔감으로 쓰려고, 끼니를 잇기 위해 마구 잘라 내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으나 지금은 숲이 소생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옛 이름을 다시금 생각하고 되새기기 위하여 이곳에 동갈보대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는 설명에는 이 마을 사람들의 애향심이 깊이 배어 있음을 느낀다.

 

38선 푯돌을 지나면서 이 나라 분단의 역사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6·25전쟁 전에는 북녘 땅이던 곳을 지금 걷고 있다. 내 고향 역시 38선 이북이다. 그러니까 나의 부모도 모두 38선 이북인 고성과 양양에서 나고 자라셨다. 나의 삼촌 한 분과 외삼촌들은 북녘에 계신다. 물론 생사도 모르지만. 그분들의 거처를 모르니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도 감감 무소식이다. 이쪽의 주소를 알고 있을 그분들은 상봉 신청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전쟁 덕에 내가 지금 자유세계에서 숨쉬고 아들과 함께 이곳을 걷는다고 해야 할까? 아이러니다.

인제대교에 조금 못미처서부터 다시 폭우가 쏟아진다. 어차피 흠뻑 젖기는 했지만 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공사 현장사무소가 있다. 염치불고하고 문을 두드려 잠시 비 좀 피하자고 청하니 젊은 남녀 직원 둘이 어서 들어오라고 권한다. 물이 뚝뚝 떨어지니 사무실도 들어가기 미안하건만 굳이 비어 있는 소장실로 안내하고 커피까지 대접한다. 소파에 몸을 묻고 30분이 넘도록 기다려도 빗발은 가늘어질 줄 모른다. 아무래도 더 지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어나면서 혹시 인제쯤에서 안전봉을 살 수 있을지 물었다. 자세하게 약도를 그려 준다. 인사를 하고 몇 걸음 떼는데 남자 직원이 잠시 기다리라고 소리친다. 그러더니 사무실 앞에 세워 놓은 승용차로 달려가 트렁크를 열고 안전봉을 꺼내 건네준다. 비를 피하게 해 주고 따끈한 커피까지 대접 받았는데 안전봉은 인제에 가서 사겠다고 사양했지만 우산도 별무 소용인 빗속에서 얼른 받으라며 재촉한다. 엉겁결에 받아 들긴 했지만 고맙다는 말만 되뇌고, 비 오는데 어서 들어가라고 거꾸로 재촉해도 이 젊은이들은 어서 가라며 처마 밑에서 인사를 한다.

쌩쌩 달리는 차들을 향해 안전봉을 흔드니 차들이 제법 속도를 줄여 주고 약간이나마 길 안 쪽으로 피해 가는 듯하다.

인제터널 앞에서 다시 옛 고갯길로 접어드니 초입에 길이 폐쇄되어 차도 사람도 갈 수 없다는 안내판이 길을 막는다. 차야 터널을 이용하면 되지만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터널 안을 들여다보니 가장자리에 뚜껑이 덮여 있는 배수로가 있다. 그리로 가는 수밖에 없다. 넉넉지는 않아도 한 사람이 걷기에는 별 무리가 없다. 하지만 크고 작은 자동차들이 스칠 듯이 내달린다. 소리는 맴돌고 조명 또한 스산한 데다 차 한 대 지날 때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리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고갯길을 오르면 합강정에서 잠깐이나마 한가로움을 누릴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스름이 내리는 가운데 인제체육관 앞에서 잠시 쉬고 길을 재촉한다. 교통정리를 하던 경찰관이 조심하라며 걱정해 준다. 8시가 되자 어느새 사위가 어둡다. 원통으로 향하는 옛길로 접어들기 직전에 순찰차 한 대가 서 있더니 경찰관이 내려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다. 아까 지나면서 보니 하도 위험스러워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차로 데려다 줄 테니 타란다. 이제 옛길로 접어들면 괜찮을 거라며 사양하니 이 길 역시 폐쇄됐다고 알려준다. 난감하다.

옛길로 가야 아들이 말한 막국수 전문 식당엘 들를 수 있는데…. 경찰관은 읍내에서도 9시면 식당들이 모두 문을 닫는데 외딴곳에 있는 식당은 더 일찍 닫을 것이라고 한다. 250km를 가는 중에 겨우 500m만 차를 타고 가는 셈 아니냐며 빨리 차에 오르라고 한다. 그건 반칙이다. 문제는 반칙을 하지 않으면 아들이 먹고 싶다는 막국수는 포기해야 한다. 이 고행 길을 따라 나선 아들이 먹고 싶다는데… 못 이기는 척 눈 질끈 감고 순찰차에 올랐다.

8시 반쯤 도착한 식당에선 이미 마무리 청소에 바빴다. 이곳은 8시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경찰관까지 합세해 이곳에서 막국수를 먹으려고 서울서부터 걸어왔노라고 너스레를 떠니 주인아주머니 난감해한다. 다시 준비해 막국수를 내오려면 한 시간은 걸릴 거라고 한다. 하릴없이 다시 빗속으로 나선다. 원통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경찰관에게 재삼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9시 반쯤 원통에 도착해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당숙 댁으로 향했다. 당숙 내외분은 이곳에서 당고모와 함께 사신다. 10시를 넘겨 한밤에 들이닥친 조카를 맞고 영문을 몰라 하는 숙모께는 대충 말씀드리고 벌써 주무시는 고모나 숙부는 내일 아침에 뵙겠노라며 서둘러 잠자리에 든다.

오늘은 4만4972발짝을 떼었다.

#선착장

신남을 지나다 보니 ‘빙어마을 신남선착장’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이곳은 겨울이면 빙어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한겨울 얼어붙은 소양호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빙어낚시를 하는 곳이다. 낚시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차를 타고 지나면서 언뜻 보기만 해도 장관이다. 그런데 ‘선착장’이란 낱말이 영 거슬린다.

예전에 서울에서 한강시민공원을 ‘한강 고수부지’라고 부르던 때가 있었다. 유람선이 처음 한강을 오르내리던 그 시절, 배가 닿던 곳을 선착장이라고 했다. 뜻있는 사람들은 고수부지와 선착장이 일본어라며 고치라고 서울시에 항의하곤 했다. 결국 서울시는 고수부지라는 국적 없는 이름 대신에 ‘시민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시민공원이 들어선 강가의 터는 둔치라는 우리말로 바꿔 부르게 됐다. 아울러 선착장은 나루 또는 나루터로 바꿔 부르고 있다. 여의나루, 이촌동 거북선나루, 마포나루 같은 것이 그 결과물인 것이다.<br

그런데 다른 지방의&nsp;나루터는 여전히 선착장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으니 이처럼 한심스러운 일이 또 있으랴 싶다.

하긴 서울시 홈페이지에도 선착장이란 말을 쓴 웹 문서가 한둘이 아니다. 선착장을 없애고 나루를 쓰기로 한 것이 한두 해 전이 아닌데도 말이다.

서울시도 기껏 잘 고쳐 놓고도 아직 오래전의 잘못을 답습해선 안 될 테고 각 지방자치단체들도 선착장이라고 써 놓은 표지판이나 간판을 하루빨리 ‘나루(터)’로 고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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