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플루와 안티기독교

신종플루가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이광기의 아들이 그 증세로 사망한데 이어 아이돌그룹
샤이니의 종현과 온유,가비엔제이의 노시현,개그맨 정종철이 신종플루 확진판정을
받으면서 연예계에도 격상되었다. 이미 꽃보다 남자의 탈렌트 겸 가수 김현중과 케이윌,비
등도 신종플루 확진판정을 받은 바 있으며 얼마나 갈지 모른다. 항간에는 이 전염병으로
인해 노스트라다무스가 또다시 수면위로 부상하는 등 잠잠했던 종말론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어떤 종교단체에서는 이 질병으로 인해 2012년 14만 4000명만 살아남고
인류는 멸망하는 등 난세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안티 기독교가 행동개시에 나섰다. 신종플루의 확산은 괴덱교인들이선교라는
명목으로 해외를 내집 드나들 듯 한 것이 원인이라며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여야한다며
봉기를 일으킬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세계가 다 아닌 근거무성이자
조작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지나해부터 몰아닥친 경제대공황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자살을 하거나 일시 혹은 영구 귀국한 상태이다. 뿐만 아니라 최진실과 노무현의 자살도
예수쟁이들 때문이라며 모든 비관적인 일들을 예수쟁이들 탓 또는 현정부로 돌린다.
최진실씨 자살사건에 관련해서는 어리둥절했을 정도였다.

 

사체설을
유포한 당시 증권사 직원이 크리스찬인가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인기탈렌트 출신의 사업가
안재환씨의 자살과 연관시킨 것이었다. 경제살리라고 찍어주었는데 경제를 이지경으로
만든 예수의 종 맹바기때문이란다. 당시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방송가에까지 몰라닥치면서
졸지에 실업자가 된 안재환씨는 그동안 모은 출연료를 털어 창업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업도 안되어 은행대출을 받지 못해 사채를 빌려 쓴 것이 그의 몰락을 초래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도 예수쟁이정부의 강압적인 수사로 인한 정치적 타살이라고
박박우기니 더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황으로 인해 기존 교인
수도 줄고 있는 상황이라는 통계가 있었다. 그런데 신종플루의 입국 원인이 선교사때문이라는
억측은 어느정도 신빙성있는 주장이긴 하다.

 

신종플루
감염자가 제일 많은 미국에 이어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우리나라이다. 물론
아직까지 해외에 머무르고 있는 선교사들이 많긴 하지만 대부분 신종플루가 발병하기
전인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많은 선교사들이 귀국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들을 잡아
죽여야 한다느니 찢어 죽여야 한다느니 하는 저주스러운 댓글로 인해 인터넷 공간이
얼마나 타락할 대로 타락했는지를 보여준 본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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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금 타내려 부모살해한 정군은 억만장자였다

보험근
타내 강남에서 살고싶어했다는 정군의 집안은 과연 어떠했을까! 보험금 제도는

생활보호대상자
정도는 되야 혜택이 되는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정군의 집안은 기초

생활수급자
대상이 될 만큼의 빈민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운동부에 들어가려면 상당히

된이
드는데 이중 가장 돈이 많이드는 운동을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가 억만장자인

이유는
17살에 벌써 여자친구(필자는 내년에 마흔인데도 여자친구하나 없는데ㅠ.ㅠ)와

강원도로
휴양지를 가는 여유로움까지 보였다는 점이다. 그곳은 정선으로 카지노가 있는

지역인데
그렇다면 그에게는 도박전과도 있을 것이다. 걸 프렌드와 놀러다니느라 무직인

그는
여행이나 다니며 돈을 유흥비에 공기마시듯이 써대느라 항상 빠듯한 상태였다. 그

동안
강남에서 살아보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도 그것을 생각하기도 전에 돈을 탕진

했고
그래서 고안한 것이 보험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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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

필자가 고등학교시절이었다.
이렇게 삼시 세 끼 밥을 먹고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너희들은 행복한 세대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에도 북한은 하루
한 끼니도 걱정하는 나라였음을 알게 해 준 말씀이었던 것이다. 고등학생때였으니까 1980년대 후반쯤이었을
게다. 시대적으로는 김만철씨 일가가 북한을 탈출하여 북한의 실상을 상세히 알 수
있었던 시절이었거니와 우리나라가 홍콩,대만,싱가포르와 더블어 아시아의 세 마리 용으로
부상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90년대 초 그 대열에 탈락했고
90년대 후반에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자동 탈락했고 2000천년대 초에는 대만과
싱가포르가 탈락하면서 선두자리를 각각 중국,인도,베트남,러시아에 내주었다.

 

고딩시절
1회용 도시락이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시기에도 밥 따로 반찬 따로 싸오는 학생들은그야말로
‘신의 자녀’의 계층에 속했다. 지금이야 급식을 하는 시대인지라 아무리 결식학생이라도
구분을 하지 못하였으나 내가 학창시절때는 도시락을 싸오느냐 못 싸오느냐를 떠나
반찬종류나
그 수에따라 있는 집 학생 없는 집 학생을 파악하곤 했다. 당시에도 양은 도시락이
대부분이었기에 1회용 도시락은 거의 관광상품이었다. 왠만큼 살던 아이도 보온도시락이
밥 따로 반찬 따로 있었는데 플라스틱으로 된 물체로 원통형 밥그릇에 그 위로 플라스틱
반찬통이따로
된 동절기에도 뜨끈하게 먹을 수 있었다.

 

주요
반찬은 겨란말이에 양반김이 있었는데 이름대로 양반들만이 먹는 김이 아닌 일반국민들도
많이 먹던 김이었다. 그 밖에도 닭강정,미역줄기,덴마크소시지,호박부침,게맛살 등이
매뉴였던 걸로 기억한다. 80년대 최초로 1회용 도시락을 선보인 신화(!)를 창조한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 중에는 IMF라는 희대의 경제난으로 결식아동을 키우는 이들도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격세지감을 느낄만도 했다.

 

이제는
흔해서 그마저도 추억의 명물이 되어버린 1회용품은 재활용이 가능토록 해야 한다.
1회용품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나무젓가락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말로 와리바시라고도하는
이 나무젓가락이 우리나라에 보급된것은 일제가 태평양 전쟁으로 수저 및 놋그릇
등의 생활용품을 군수물자로 변환시키기 위해 가져간 대신 사용한 것이 나무젓가락이었다.
소지지들도 다양하여 치즈소시지.야채소시지,땅콩소시지,참깨소시지 등도 있었다.
도시락 하나에 야채소시지였다.

 

대게
젓가락은 은으로 된 쇠젓가락이이었다. 물론 젓가락 대용으로 나무젓가락을 보편화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나무심기가 시작된 이후부터였다. 나무조차 흔치않았던 6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나무젓가락이 일반화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때 학교마다
체변검사제도가 있었고
똥을 누고 그것을 체변봉투에 담은 것이 나무젓가락이었다. 그것도 재사용했었지
요즘처럼 한 번 쓰고 버리는 일이 없었다. 나의 고등학교때까지만 해도 체변검사가
있었는데 나무젓가락을 이용해 그것을 옮긴 뒤에는 버리기 일쑤였다.

 

이제는
그런것들은 남아 도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다고 1회용품을 1회만 사용하고 버리기에
는 거시기한
면도 있다. 도시락이 1회용이라 그런시 음식을 먹다 남기는 일도 많이 본다. 필리핀
빈민가에서는 사람들이 먹고 버린 음식물 찌거기를 먹으며 살아간다고 한다. 필리핀
경제가 우리나라의 60년대 수준으로 후퇴했다지만 빈부격차는 오늘의 우리나라 정도인
것인다. 그런 필리핀도 한편에서는 그렇게 낭비하는데 우리나라야 얼만한가 말이다.
그러나 법적으로 남은 음식을 재사용을 하는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있다. 남겨진
음식들이 쓰레기장으로 실려가는 것은 아깝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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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에 비하면 박정희의 친일은 애국적이었다

물론 박 대통령이 친일을
했다고 보기에는 거시기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 그런데 박정희가 만주군을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했다는 내용은 왜 다루지 않는것인가! 박정희는 일분군에 충성하는
척 하고는
일본군들을 안심시킨 뒤 광복군으로 들어가 일본군부대를 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가 상해 임시정부를 찾지않고 만주국을 찾았다는 것이 그런데 이 모두 뜻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상해로
건너가기에는 시기적으로 불리했고 당시의 상해는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독립군
토벌작전에 투입된 박정희 장교는 이에대해 좋다고까지 하면서 일본군 진영을 빠져나가
일본군을 철저하게 속인 셈이었다.

 

이후
박정희는 정권을 잡은 뒤 대일청구권으로 8억불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이승만도 장면정권에서도
하지 못했던 과업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직접 방일하여 이케다 총리와 대면하였을때
사무라이가 백제의 사울아비에서 유래되었다며 일본 정치가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기도
했다.

 

이에
자존심이 뭉게질대로 뭉게진 일본은 한국의 박정희 정권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1974년 광복절 행사과정에서 한 청년이 발사한 총탄에 육영수여사가 쓰러졌고 끝내
절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하고 만은 날 중에 왜 하필이면 남북이 공동으로 경축할 날인 광복절을
이용했느냐는 의혹이다. 범인은 재일교포 문세광임이 드러났고 그는 조총련소속이기도했다.

 

그때
정작 일본정부는 침묵했으며 이에 대노한 박 대통령은 일본영사를 방문해 항의하기까지했던
일화는 제4공화국에서도 방영되었다. 일본이 북한의 도움(!)으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을때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였다. 미국의 원조로
근근히 성장해가는 것 같았으나 지도층의 부패와 기회주의적인 행각으로 인해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지기 시작해 북하는 우리나라의 70년대 초반수준의 소득이 되었을때
우리나라는 두자릿 수에 불과한 소득을 자랑하고 있었다.

 

1950년대
전재로 인해 인구가 많지않은 시점에서 극심한 굶주림에 저출산현상이 심각하자 유일한
자원이던 사람조차 줄어드는 추세로 총체적 난국에 부딪혔다. 결국 박장희 당시 소장은 군대를
동원해 국가재건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우피적 시각에서는 혁명이라
불리고 좌파적 시작에서는 쿠테타라고 불렸으며 최근에는 중도적 시각으로 정변이라
부른다. 이후로 본격적인 경제개발을 시작하여 교육,의료 등 많은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유치원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한 국민들이 대부분이었던 50년대와 달리
60~70년대를 지나 80년대 들어선 이후부터는 하버드대학원까지 나오는 초고학력자들이
늘어났다. 이처럼 교육도 돈이 있어야 받을 수 있다.

 


8억불로 우리나라는 자동차 만들고 고속도로 많들고 공장 짓고 아파트 짓고 지하철
1호선에서 9호선뚫고 거기에 경전철,고속철도까지 만들고 신용카드제 도입하고
인터넷 설치하고 해저터널까지 만드는 수준까지 된 것이다. 이 모든것이 당시 지도자들의
전략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면
우리민족끼리의 시조인 김일성을 보도록 한다. 그는 훌륭한 그리스도임과 동시에
교육자,항일운동가의 아들이었다. 그는 줄곧 그 아들과 손자를 포함에 자손대대로
자주를 외치며 민족통일을 바라는데 이바지하려했던 인간이었다. 인간이라고 부리기에는
너무나도 죄악이 많은 그였기에 차마 그러지 못하겠으나 김정운이 살아있는 한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는
자신의 이상과 욕망을 위해 항일운동가도 무차별 학살한 자였다. 비록 제3자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긴 하지만 직접 살인보다 살인교사가 더 나쁘다는 것은 세상이 아는
사실이다. 그는 해방 후 더 활개를 치게 된다. 일본이 조선에서 출수하면서 산업시설과
발전소 등을 38선 이북지역에 집중되었기에 북한은 그야말로 손대지 않고 코푼 겪이었다.
그런데 저들이 미군이 남한지역을 점령하던 때에 남침한 것이 아닌 미군이 완전히
철수한 뒤 공격개시를 했으므로 북한의 목표는 미군을 몰아내는 게 아닌 남한을 집어삼키려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해방
전부터 증오하던 미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었음에도 김일성은 일본이 아닌 우리민족인
남한을 쳐서 동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었다. 오히려 일본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자져다 준 꼴이 되어버렸다. 많은 이들이 일본이 다시 일어서려면 빨라야 50년
혹은 100년이 걸린다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일보는 불과 10년만에 경제가 부흥한 것이다. 이미 50년대 후반 일본은
우리나라의 80년대 수준의 경제력,풍경,시설,환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에 거만해진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동족상잔의 피터지는 싸움이 한창이던 52년 일본은 순시선을
보내 독도를 탐닉하려다 우리경비대에 발각되자 퇴각하였다. 세울이 흘러 금년 4월
북한이 로켓을 발사하여 전국민들의
분노가 불길처럼 타오를때 일본의 한 우익인사는 그때의 은공을 잊지않았는지 일본경제
회복을 위해 북한이 남한을 공격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망언을 해 마침 어느 재일교포와
몸싸움을 벌인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의 속내를 여지없이 보여 준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이렇듯 좌우 연타를
맞고있는 대한민국이 너무 불쌍하다. 그러한 설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맛있는 거 많이 먹어여 한다. 그렇게 영양보충을 해서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해져서 일본이 함부로 개기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가 성장해야만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인혁당
사건은 이념대립이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이 모든 것이 분단을 초래하고 그것을
고착화시킨 김일성의 책임인 것이다. 그것도 그렇거니와 요즈음 필자가 믿는 기독교의
비난 여론이 유래없는데 그런 김일성이 기독교집안이라는겅에 대해서도 비난의 요인이
되고 있다. "당시 기독교가 어떻게 가르쳤기에"라는 식으로 이유를 내세워
기독교를 공격하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의한 최대 피해자는 기독교였다. 단지 김일성이 기독교집안이라는 이유로 기독교를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일본을 능가하거나
남북통일이 되어 일본을 견제할 정도가 되면 일본에 대한 보복을 우려해 일본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 이유일 것으로 상기된다. 일본이 그때까지 과거사에 대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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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주일학교시절2

맑스는
법조인이던 부친과 네덜란드 귀족가문의 모친사이에서 출생당시부터 억만장자소리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부모님들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 유복한 생활을 하던 그는 사회인이
되었을 무렵, 바깥세상은 자신의 환경과는 너무나도 다른 세상을 보았던 것이다. 그가
활동하던 19세기 중엽의 구라파는
한창 산업혁명의 전진으로 번영을 이루던 시기였으나 한편에서는 그 혜택이 자신과
같은 억만장자들의 소유물일 뿐 진정한 주역인 농민과 노동자들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만큼의 황폐화 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임금은 멸치꼬리 수준밖에 안되었으므로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받기도 했다. 농민들의 삶은 더 말 할 것도 없었으며 특히 농노들의 경우는
1년 내 *빠지게
모내기하여 거뒤들인 농작물들은 모두 지주의 몫이었고 이들은 인근의 풀뿌리나 그것으로
죽을 끊여 먹는 이른 바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칼은 열 안받을
리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억만장자인 칼이 뭘 믿고 농민,노동자 계층들을 생각했는지 궁금해 한다.
대게 억만장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피해만 준다는 고정관념이 팽배해 있다는
것이 인간세상의 병폐이기도 하다. 산업혁명시대의 칼의 생각을 보면 억만장자들이
모두 그런게 아니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면
정녕 그의 외침대로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이 빈부격차 없는 더블어 잘 사는 세상을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칼 마르크스의 사후 100년이 되어서야 레닌에 의해 창당된 공산당은
기존의 칼이 부르짖던 사상과는 매우 상이하게 진행되었던 셈이다. 사회주의 사상은 가난한
사람들을 오히려 더 바보 병신만드는 사상이 된 것이었다. 해방직후 미소 양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당시 38선 이북지역은 남한에 비해 훨씬 소득수준이 높았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서민들이 공산당의 꾐에 넘어가 월북했는지 모른다. 억만장자들이야
더 욕심을 부리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월북자들은 끼니걱정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세월의 흐름속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거나 지팡이를 짚고 목숨 건 탈북을 강행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농노로 살던 과거때문에
초기에는 김형직-강반석 부부도 사회주의사상에 호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가입한
곳이 기독교
항일사회주의 운동단체인 <조선국민회>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활동과 더블어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형직은 1917년 3월 23일 기성
독립운동가인 장일환을 의장으로 하여 배민수, 백세빈 등과 함께 조선국민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돌입하였다. 조선국민회는 기독교 항일운동단체로 당시 한국의 젊은 기독교인들이 전국적으로 모이는 평안장로신학교 개교일을 전후하여 많은
조직원을 확보함으로써 막강한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0년도 채 안되어 없어선
안되었던
김형직이 불순분자에 의해 암살되자 눈물의 해체를 하게 된다. 김형직 부부가 사회주의를
혐오하게 된 계기는 레닌의 극악무도한 행위를 알고 난 후부터였다. 레닌 사후에
권력을 물려받은 스탈린도 마찬가지로 때문에 김형직은 사회주의사상이 이런줄을
몰랐다며 광복회를 탈퇴하려하자 동지들은 지금은 사상을 가릴 때가 아니라 민족이
힘을 모아 일본 침략자들을 물리쳐야 한다며 극구 만류하기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둘째 아들 철주도 이건 아니라며 사회주의의 환상을 버렸다.

 

그러나
유독 성주만은 이 사상에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따라서 부모님과의 노선갈등으로
잦을 마찰을 일으키곤 했다. 그런데 철주마저 부모님의 신앙을 따르려고하자 성주의
입장에서는 난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주는 사회주의사상보다 기독교사상을
불신하게 된 것도이
무렵이었다.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스탈린도
어린시절
기독교집안에서 자란 스키였다. 그의 아호는 구약시대 선친과 교인들의 총애를 받은
요셉으로 훗날 에굽의 총리가 되어 나라를 잘 다스린 인물이었다. 그 성스러운 이름을
인류역사상 최악의 폭압독재자의 이름에 사용되었다는 점이 요셉의 명예에 똥칠을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김성주가
어린시절 가족들과 함께 출석하던 교회는 송산장로교였으며 1935년 철주의 장례식

이후
교회를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혹자들이 말하는 그의 기독교신앙에 회의를 느낀 결정적인
이유가 동심에 맞지 않는 엄숙한 종교의식과 목사의 단조로운 설교에 싫증을 느꼈다기보다인류가
흙에서 탄생했다는 창조론과 예수가 죽은 뒤 살아나서 승천했다는 만화같은 이야기에허구성을
느꼈을 가능성에 기인한다고 본다. 김일성은 국민학교 5~6학년 2년동안 외조부댁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강돈욱과 강양욱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강돈욱은 김일성에게 성경을 가르쳤고 강양욱은 김일성의 담임을 맡기도 하였다. 강양욱은 강반석의 아버지 강돈욱의 육촌동생으로 해방전까지
감리교 계통인 평양 암정교회 목사로 활동했다. 그가 5학년때는 필자의 외증조부님이
담임이었고 6학년때 강양욱이 담임을 맡았다. 그러나 이후 김일성의 간교환 굄에
빠져 해방 후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그의 아들 강양섭은 평양시내에 짜가교회들을
세워 선전용으로 이용하고 있다.

김일성은 아버지가
기독교학교인 숭실 중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아버지 주위에 교인들이 많았고 자연히 교인들과 많은 접촉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한 가정환경 덕분에
항일운동시절 여러 기독교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그는 회고하였다. 특히
김형직-강반석부부는 교회 지도자의 위치에까지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훗날 많은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신앙의 선배로 추앙받고 있다. 그 영향력이
아들에게까지 미쳐 남한의 목회자들이 봉수교회 방문 당시 그(김성주)의 동상에 머리를
조아리고 헌화하고 과기대를 세움과 동시에 그의 영생탑을 세운 것도 연민의 전을
느꼈기때문이라는 설이 그것이다. 가령
그러한 마음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미 죽은 사람의 동상앞에 절을 하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라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을텐데 말이다.

김일성의 외숙부인 강진석은
독립 운동가였으며 이러한 집안의 민족주의 정서는 아버지 김형직의 뜻에 따라 1926년 3월 천도교도인 민족주의자 최동오가 숙장으로 있던 만주의
화전현 소재 정의부 소속 화성의숙 입학으로까지 이어졌다. 그가 공산주의사상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으로 소련과 만주를 넘나들던 한 지인의 소개로 접하게 된 것이다.
선친보다 공산주의사상을 늦게
접하였으나 그때는 선친이 공산주의사상을 버리고 <조선 광복회>를 탈퇴한
뒤였다.

그런데
그와 같은 교회에는 또다른 김일성이 존재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항일운동을
하던 김일성은 당시 집사로 섬겼다는 것이다. 그러다 순종임금이 승하하면서 다시금
의병들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자 만주로 건너갔다. 김일성이 손정도 목사의 도움을 받으며 만주에 거주하였을때 만주 한인교회를
섬기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농노의 아들이었음에도 공산주의를 극도로
싫어했고 소련군의 한반도 입성을 경계하려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였던 것이다. 그가
평소에도 공산주의를 비판했던 것에 대해 김성주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을 도용해 정치활동을 시작한 김성주는
목사인 강양욱을 1946년 2월 결성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서기장으로 발탁하여 김성주의 초기 정치활동을 도왔다.

 

김일성은
귀국하여 완전히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과정에서 "예수쟁이새끼들은 죽음을
영광으로 생각하고있으니끼리 예배당에 있는 종자들은 모두 잡아 족치라우"라고
명령했기에 1945년 9월 이후 평양지역의 교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평양교회들은 일제의 신사참배강요로 이에 동참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양 송산교회를 포함한 숭실학교,창덕학교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평양교회들이
신사참배에 동참하면서 내분을 겪기에 이르렀고 이중 장대현교회는 이문제로 목회자가
파면되기도 했다. 노회측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이었다.

 

일부교회는
교역자의 파면조치로 일제의 수사망을 피할 수 있었으나 김형직과 강양욱이 시무하던 교회들은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여 교회는 물론 직속 교육기관인 숭실학교가 폐교되고 매큔교장은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교인들과 직분자들은 출감하였으나 이어 소련군의
횡포와 한 젊은이의 명령으로 교인들은 처참하게 학살되고 만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문은 만일 김형직-강반석 부부와 둘째 아들이던 김철주가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였더라도
훗날 그들은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김정숙,김영숙,김성애,김영주,성혜림,고영희,이한영
등의 전례를 볼때 그는 권력을 위해서 핏줄도 저버린 자였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진짜교회의 교인들이었고 김성주의 딸이자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는 오라버니 김창일을
만났을때 신앙을 접하였다. 김정일의 세 명의 전 처 모두 기독교신앙을 신실하 게
가지고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목이다. 만약 김정일에게 발각되면 사돈의 팔촌은 말 할것도 없고
9대가 멸족되기에 비밀리에 창일과 접선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지난
2000년대 초반, 중국식 개혁개방 발언으로 눈밖에 난 첫째 아들 김정남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매제인 장성택을 지방으로 좌천시키자 아내인 김경희도 자동 밀려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몰래 지상에서 전도를 하던 김창일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김창일이 목사로 시무하는 교회의 성도출신의 탈북자에 의해 알려졌다.

 

이처럼
김성주가 독립운동가와 기독교의 혜택을 많이 받았음에도 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이유는 그에게 맘몬이라는 우상이 포위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련군의 한반도
입성을 무척 고대했다고 한다. 때문에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김좌진과 김일성은 그에게
있어 눈엣가시였는지도 모른다. 당시 소련군은 만주와 연해주를 통해 한반도 상륙을
준비하고있었고 미군은 오키나와를 통해 한반도에 상륙할 계획이었다. 미군이 먼저 상륙할 경우 자신이 바랬던 이상을 실현할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해서였던
것이다.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박성식과 친분을 맺게 된 것은
청산리 대첩이 일어나던 해 전이었다. 물론 언더그라운드 가수 <빛과 소금>의
박성식도 있다. 그런데 강반석의 가문이 기독교를 접한
것은 아주 오래되었다고 전해진다. 김형직의
증조부인 김응수가 셔먼호 사건을 보았을때 함께있던 이가 강반석의 증조부였다.
김형직은 평양 대부흥회 당시 열성적으로 기도를 하던 강반석에게 뿅 갔으나 자신의 신분으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강반석도 농노출신이었으나 일찌기 기독교를 받아들인 덕분에 선교사의
도움으로 창덕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생활이 나아진 것이다. 물론 김형직이 처음 강반석을 만났을 때도 선친이
창덕학교장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던 때였다. 생활이 나아지면서 이들은
결혼에 골인하고 자비로 혼수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피죽조차도
제대로 먹지못하던 이들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삶의 질이 향상된 것이다. 당시 송산교회는
평양지역에서 신도수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두 부부는 교회에 시무하면서 착실하게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김성주는 태어날때부터 황금을 물 수 있었던 것이다. 좌우지간 예나
지금이나 돈이 인간의 심성을 파괴시키는 교훈이었다. 많은 돈으로 인해 김성주가의
비극을 초래한 원인이었다.

 

두산그룹
부회장이던 박용오가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계 톱이었던 현대도 마찬가지였고
이 모두 형제간의 경영권 분쟁을 일으킨 바 있던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돈은 가족간의
사이를 원수로 갈라놓는 피조물이다. 심하면 정몽헌 회장이나 박용오 전 회장처럼
극단적인 상황으로도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억만장자를 일컬어 유복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뜻은 유난히 행복하다는 말이다. 과연 가족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이 유난히 행복한
삶인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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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주일학교시절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미스테리의 인물 가운데 가장
연구대상 중 한 사람인 듯 싶다
.
한 세대가
지나며 이제는 그에대한 평가가 완화되었다는 것에대해 부정할 수는
없지만
김일성 만큼이나
일에 싸여진 인물도 드물 것이다. 사실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는 당시 그와 가족들이 섬기던 교회를 다닌 사람이
있었거나 지금까지 생
존했던 사람들이
증언을 통해 알게 되
는 것이다. 필자가 외조모님을 모시고
살때 들려
주셨던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내용이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에는 교회가 없었기때문에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평양이나 타 교회가
세워진 지역으로 초빙되거나 청빙되어갔다.

 

나의 외증조부님이 1914년부터 1938년까지 숭실학교
교사로 평양에 체류하던 때였다. 당시 외조모님(2005년 작고)이 주일학교에 갓 입학하던 해 김일성은 졸업반이었다. 그후로 나의 외조모님과 그는
그때부터 악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때 전대미문의 악인 김일성이라는 존재를 알게되었고, 따라서 자신의 부친과는 다른 평가를 한 것이다.
아버지는 그를 친 자식처럼 잘 대해주셨지만 자신은 몹시 불쾌했다고 한다. 이에 대놓고 항변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우락부락한 체구와 한 성격하는
이미지때문에 섣불리 그를 건드리지 못하였다. 교인들이 모두 성주에게만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것에 대한 시기심이 아니라 이로 인해 그의 오만함과
거만함이 나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는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그의 선친인 김형직 장로가 의문사로 교회가 떠들썩했으나
그는 문상중에도 태연한 모습에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상객들은 그를 천국의 대한 소망으로 생각하였으니 자신이라고 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철주의 입관식때에도 둘째인 영주는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했으나 성주는 덤덤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정작 자신조차도
반신반의했을 정도였다. 헌화를 한 뒤 영주와 성주에게 맞절을 했는데 두 형제의 표정이 사뭇 달랐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악연은 그 후 6.25때까지 악연은 계속되었다.

 

김일성은 남침전에
이미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고 한다. 
처형대상자와 납북대상자를 구별하였고 이 중 종교인과 고학력자, 고래등
같은 집에 사는 지주들이 해당되었다.
무속인이나
불교인들은 경우에 따라 납북대상자로 선정했지만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처형대상이었다. 당시 외증조부님은 숭실학교시절 인연을 생각하여 그에게 전도가
통할 것이라며 북한군 점령하에서 보위부로 향했으나 그렇지 않아도 처형대상 1호로 지목된 가족들인데 무모한 짓이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당시
외조모님은 고보출신에 여당 국회의원으로 갓 당선된 재력가를 남편으로 둔데다 일가족 모두 기독교인이라는 점이 북한당국의 사냥감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김일성은 숭실학교시절 자신을 시기한 자들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태생인 그의 집안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봉건계급사회에서
근대화의 물결속에 자율경쟁체제로 진입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 부부는 몸에 벤 근검절약으로 인해 성주에게 상당한 재산을 물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 부부가 오로지 교회와 자식밖에 모르던 외골수는 아니었다.

 

김형직은 성주가 태어나기 넉 달 전 이른바 105인
사건이라 불리는 당시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가석방 된 상태에서 또다시 기미독립선언에 동참한 뒤 만세운동을
벌이다 재수감되었다. 강반석의 모친은 딸이 출산을 앞두고 있으니 그 과정만 지켜보게 해 달라고 교도관에 사정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들의
기독교신앙은 대대로 이어져 왔다. 친가는 물론 외가며 친인척들이 모두기독교인들이었고 증조부인 김응수는 셔먼호가 대동강에 표류했을때 주민들과 함께
현장에 있었다. 그러나 김응
수는 주민들이 셔먼호와 선원들에게 돌을 던거나 셔먼호를 전소시키는데 동참하지않고 숨어서 이를 지켜보다 비밀리에 예수를 접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형직 장로와 강반석 권사는 평양 대부흥집회를 통해 만났다. 당시
강반석의 선친 강돈욱은 창덕학교장으로 엘리트였고 김형직은 시무장로였다. 본명이 김성주인 김일성은 주일학교를 통해 성장했고 외조부인 강돈욱이
그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그는 성경말씀에 어두웠지만 자라서 누구못지않은 크리스찬이 될 것으로 믿고있었던 것이다. 김형직과 강반석은 각각
1926년과 1932년에 사망했는데 이에대한 의혹이 꼬리를 물고있으나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다. 철주 또한 해방 전인 1938년도에 의문사 했고
얼마 후 외조모님의 식구들은 평양을 떠나 고향 인천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김일성은 당시 조선에서도 자라기 시작한 마르크스 사상에 빠져 예수
신앙을 좇으려던 부모형제는 물론 친지들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형제인 철주도 부모님 뜻을 따르게 되자 성주와의 마찰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대대로 빈농
출신이던 김형직부부는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하게되면서 가계를 일으켰다. 김형직은 평양 대부흥 집회를 통해 강반석을 만났고 어린나이였으나 기도만큼은
누구보다도 뜨거웠다며 그러한 모습에 끌려 강반석이 성년이 되던 해 결혼하였다. 김형직은 강반석보다 한 살 터울로 강반석 베드로는 결혼 후 집사로
봉직하다 30세때 권사가 되었다. 대대로 빈농의 자녀들로 내세울 것 없는 가문이었지만 예수님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이라며 성주에게 말해주곤
했다.
출생당시
그의 몸무게는 5kg이나 되었으나 산모인 강반석이 그를 임신할 당시에는 36kg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아이를 낳는 기쁨에 전혀 힘들어하는 내색 없이 하늘이 준 옥동자를 낳았다고
감사했다. 대식가로 자라던 그에게 항상 고기를 먹고싶어했기에 항상 가축들의 씨가
마르곤 했다.

 

이로
인해 생태계 파괴가 심각해지면서 총독부에서는 사슴,토끼,닭,소,돼지,고등어의 남획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아무리 억만장자라고는 하지만 대일본제국의 항국신민도
자주먹지 않는 고급요리를 일개 조센진따위가 함부로 먹는다며 불쾌한 심기였던 셈이다.
때문에 국내에서 양식을 구할 수 없게되자 이들은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고기를
구해오곤 했다.

어렸을때 부터 감기약 한 번 먹지않았을 정도의 건강체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형직 부부는 결혼하기 전 잔병치례가 많았기에 이제 병원도 쉬어야하지 않은가 하며 자식과 그들 부부의 건강관리를 철저히 했다. 그러나
워낙 활달한 성격이었던 그는 다람쥐 챗바퀴 돌아가듯이 번복되는 일상에 매우 싫증을 느꼈다고 한다. 집과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거의 매일
반복되었기때문에 그는 늘 새로운 것을 찾으려 했다. 자신만의 이상을 찾으려 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공산주의사상이었고 이는 그의
교만함의 부산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철주의 죽음에 대해서도 조작된 것이 많다. 그는 1926년 선친의 죽음 이후 성주와 함께 혁명조직을
결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조직이 워낙 허무맹랑한 조직임을 파악한 철주는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기독교 잡지를 발행하였으나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뒤늦게서야 그가 만주군과의 전투에서 옥사했다는 소식으로 일관한
것이다.
따라서 성주 가문의 위대함을 전국 도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끼니걱정을 하던 이들 부부는 강 베드로 권사의 부친인 강돈욱 장로가 창덕학교장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차츰 가계를 일으켰다. 그럼에도 이들 부부는
이게 모두 주님의 은혜라며 겸손함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성주를 낳던 해 김형직 장로는 105인의 일원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수감되어있었다.
이후 가석방 될 때까지 매년 성주를 데리고 면회를 하였고 뒷바라지와 함께 성주에게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시는 분이라며 존경심과 동시에
반일감정을 심어주었다. 옥중에서 김형직은 동료 재소자이던 백범을 전도하기도 했는데 백범은 한때 승려생활을 했으며 1896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일행 중 한 명인 일인을 시해하자 일경을 피해 공주 마곡사에 은신했던 백범을 존경했다며 그분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김 장로의 신앙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김형직은 가석방 이후 또다시 3월1일 기미만세운동에
동참하다 재투옥 되었고 징역5년을 언도받은 뒤 출옥했지만 1년도 채 안되어 의문사하였다. 김형직 장로의 장례식을 치른 뒤 강반석은
성주,영주,철주 등 세 아들을 데리고 만주로 떠났다. 그런데 이들이 만주로 떠난 지 6년만에 강반석 마저 한 줌의 흙이 되어 돌아왔고 얼마
후에는 철주마저 주검이 되어 시신으로 귀국했다. 사안은 병사로 알려졌지만 그 부분에서 의혹이 없지않다.
이에 교인들은 고생고생하다 이제 겨우 살만해졌는데 허무하게 흙으로 돌아갔다며
애통해하는 이들도 있던 반면, 이들부부의 신앙심이 워낙 신실하여 하나님께서 좀
더 일찍 천국으로 초청하신것이라고 생각하라며 유족들을 위로해주는 이도 많았다.

 

주일학교 시절
성주의 행동을 당시 필자의 외조모님은 매우 못마땅히 여겼고 한다.  그런데 20년이
자나서 그에 의한 군대에 일가족들이 죽임을 당했으니 더욱 그에 대한 증오심이 얼만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해방후 독립적인 국가를
세운 뒤 선친과 형제의 이름을 딴 사범대학교와 행정구역,철강소의 이름을 사용했다. 이때문에 셋째아들 김창일이 가짜교회의 목사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김일성은 주일학교시절 못말리는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하루는 용변을 보던 목사님을 향해 새총으로 명중시키는가하면 여전도사의
치마를 들추어내 봉변을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교인들은 백범 김구선생도 어렸을때 무척 개구쟁이였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선조들 가운데에도 어린시절 대부분 개구쟁이였다면서 성주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김성주는 태어날 때부터 아니 출생하기 전부터 우람한 체격이어서 강반석은 그를 낳을때 무척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좀처럼 아이가 나오지
않자 동료집사님은 서양의술을 동원해 제왕절개를 해야한다는 말을 했으나 자칫 산모는 물론 아이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거절하였다. 재왕절개
과정에서 신경이 손상될 수 있고 그렇다고 힘을 너무 주어도 신경손상의 가능성이 높아 아이가 기형아 또는 저능아로 나올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강반석은 ‘나는 잘못되어도 상관없지만 내 아이만은 정상적으로 자라야 한다’고 했으니 아이에 대한 모정이 얼만했는가를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김일성은 1912년 4월15일 교우들의 축복 속에 태어났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아주 건강하고 똘똘한 아이로
성장하였다.
김형직 부부의 헌신적인 신앙에 하나님께서도 감동하여 이처럼 듬직한 아들을
선물로 주신것이라며 감사하였다. 강반석은 아이를 정성을 다해 키우고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성경을 읽어주었고 때문에 동화보다는 성경을 많이
읽어주었을 정도였다. 그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도 외증조부였고 성인군자의 ‘성’자와 주님의 종이라는 뜻의 ‘주’라로 붙여주었다. 그는 다섯살 때
주기도문을 통독하자 교사들은 깜짝 놀라 기뻐하였고 교인들은 그를 총애하게 되었다. 이어 여섯 살 때는 사도신경은 통독하면서 그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이러한 슬하에서 부족한것 없이 완구류는 물론 먹어보지 않은 음식이 없었을 정도로 풍요롭게 생활했다. 우여곡절 끝에 낳았기에 그
누구보다도 애지중지 했던 김일성이었기에 젊었을 때부터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10살 생일때 선물로 받은 장난감총으로 늘
골목대장 노릇을 하였다. 그러나 성주는 마지못해 외운 것이고 장성할때까지도 성경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다.

 

"인류가 흙에서
창조되어 에덴동산에서 죽지않는 존재였다고!" "예수가 죽은뒤 3일만에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니, 세상에 그런 엽기가 어디있는가!"

 

이랗게
성주는 교인들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신앙에 대한 허망함을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의 부친이던 김형직은 3.1운동의
핵심인물 중 한 명으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르기도했으며 그가 의문사했을때 교인들은 고생고생하다 이제 겨우 살만했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며
애석해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교인들은 김형직 장로와 강반석 권사가 워낙에 신앙심이 깊어 하나님께서 좀 더 일찍 천국으로 초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라며 유족들을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부친과 모친의 장례 때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태연한데 대해 조문객들은 내심 슬프기는 해도 부모님이 천국에 갔다고 생각하며 기뻐하고
있을것이라는 생각에 영특했다고 한다. 강반석은 성주가 링컨과 같은 인물이 되어주기를 바랬다. 출생 당시의 환경은 달랐어도 신앙심 만큼은 그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를 바랬다. 이러한 경우 대게 현대인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김일성은 링컨처럼
남북전쟁(6.25를 자칭)을 일으켜 남북통일(북측에서는 북남통일)을 꾀했으며 노예해방 (김일성이 공화국 집권 당시 부르짖던 식민지 해방과 같은
맥락)을 이루려 했다고 말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링컨은 남북통합을 이룩했고 김일성은 이 전쟁으로 오히려 분단을 더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강반석은 성주에게 자장가 대신 성경을 읽어주며 잠이 들 때까지 성경을 놓지않았으며 성주를 갖았을 때 이와 같은 기도를
드렸다.
강반석은 틈틈이 집에서도 성주에게 성경을 읽어주었고 교회 지도자가 되든
국가 지도자가 되든 반드시 성경말씀대로 이행하길 바랬다. 그는 성경말씀에 어두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고 좀 더 자라면 못지 않은
크리스찬이 될 것으로 믿었다. 강반석은 늘 그를 위해 기도했고 링컨 등 위인전도 읽어주며 그와 같은 인물이 되기를 바랬다. 그가 마르크스 사상에
눈을 뜬것은 만주에서 마르크스에 관련된 저서를 구독하고 그에대한 사상을 읽고 그에 매료된 것이었다. 어느 날 성주는 이와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식구들과 교인들이 모두 그에게 절을 하는 꿈이었다.

 

막내로 태어난
요셉은 선친 야곱으로부터 편애를 받았다. 하지만 위의 두 형제는 이를 무척 못마땅히 여겼다. 하루는 요셉이 선친과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하자 형제들은 그를 더욱 시기했으며 급기야 요셉을 매장시켜버렸다. 그러나 요셉은 그곳에서 살아나오자 이번에는 형제들은 동생 요셉을
아예 노예로 팔았다. 에굽의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그래도 형제들을 원망하지 않고 에굽의 보디발 장군의 노예로 일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느꼈던
것이다. 그후 요셉은 노예생활을 했던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어 7년 간 이집트와 이웃나라를 위해 헌신하였다. 반면 성주는 선친은 물론
형제들에게도 사랑을 받았고 그를 시기, 질투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를 따르고 시중을 들기까지 했으니 그는 자라서 더욱 교만하고 거만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도 어느 날 꿈속에서 요셉이 꾸었던 것처럼 선친과 형제들이 모두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고 이에 교우들은
장차 그가 요셉과 같은 인물이 될 것이라며 확신했다고 한다. 따라서 성주는 진짜 요셉을 만났는데 그는 바로
스탈린이었다.
요셉은 스탈린의 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요셉처럼 노예생활을 하다
총리가 되지않고 해방이 되자마자 곧바로 한반도 북쪽의 주인이 된 것이다. 지금은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오고 있으며 외교적으로도 대승을 거둔 바
있다. 파산보호신청을 했던 미국의 금융기관 BOA가 북한에 달러를 제공한 것을 보면 알 수있다. 그렇지않아도 적자였던 뱅크오브아메리카는 북한이
핵을 폐기하는 조건으로 제공한 달러로 인해 북한은 더욱 기세등등해져 미사일 발사위협은 물론 2차 핵실험도 강행하였다. 당시 부시행정부는
‘통미봉남’을 통해 철저히 이용당한 셈이었다. 북한에 10억달러를 투자한 결과 미사일(인공위성이라고 하지만)을 발사하고 세월이 흘러 영변
냉각탑을 폭파하는 ‘생쑈’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해방 후 그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는데 그
또한 본명을 도용한 것이었다. 그가 진짜 보천보전투의 주역
김일성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지껏 논란이 되어 왔고 지금도 되고 있다.

 

그러면
보천보전투에서 전승을 올린 진짜 김일성에 대해 알아본다. 성주와 같은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으로 1888년 태어난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결코 조국을 증오하지 않았고 애국심이 투철했다. 성주의 집안처럼 모태신앙은 아니었지만 소년시절 새총으로 일본순사를 린치한 혐의로 이를 체포하려는
일경에 당시 손정도 목사의 도움으로 수사망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후 손 목사와 인연이 되어 기독교인이 되었고 독립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해방되기 전에 의문사 했으며 이에대한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다.
1943년
얄타회담을 통해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뉘는 의견을 접한 미,소 연합군의 움직임을 파악한 김일성부대는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자 그들보다 먼저
일본군을 일망타진하기위해 청진일대에서 대대적인 작전개시에 돌입했지만 돌연 김일성이 사망하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름을 도용한 주일학교출신
김일성은 한자로 金日成이지만 진짜 독립투사 김일성은 金一聖으로 불렸다. 김일성(성주)이 만주에 체류하던 그 시기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도
당시 공산주의자였던 박성식에 의해 시해되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역사는 일본 100만대군을 물리친 김일성보다 3000명을 물리친 김좌진을
기억한다. 보천보전투로 유명해진 전설의 항일투사 김일성은 이에 앞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기도 한 그는 이름때문인지 북한의 종신총통 김일성에 가려져
그의 명성은 빛을 보지 못하여왔다. 혹자들 중에는 일본군 100만명을 물리친 사람이
조선인 한명에게 당했다는 건 말이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만큼 전략적인면에서 어떻게
승부를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김형직은 1926년 6월10일 그의 나이 34세로
불순분자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의 죽음으로 평양사회는 가히 공황적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면서
국장일을 전후하여 대규모 만세운동이 벌어진 날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은 김형직의 죽음을 일제에 의한 것으로 뒤집어씌우기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김형직이 두 차례나 투옥되고 가석방 되었음에도 계속 항일운동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에 무척 분개했다고 한다. 그래서 또다시 체포되면
종신형으로 다스리겠다고 벼르던 것이다. 일본정부도 그를 인재로 생각했기때문에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같은 조선인에게
암살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5년 뒤 김좌진 암살사건때도 그랬고 보천보 전투의 주역이던 김일성이 암살되었을때도 마찬가지로 일본정부조차
의문을 품었다.

 

김형직-강반석
부부는 자수성가했어도 만경대에서 검소한 삶을 살았다. 대부분 재산을 교회에 봉헌하거나 임정에 송금하거나 자식을 위해 저축을 해 두었던 것이다.
반찬 수도 보리밥에 김치와 약간의 해물을 넣은 된장국, 나물 등으로 세 끼를 때웠는데 그것은 자라서 결혼 할 때까지 보리밥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주는 보리밥을 무척 싫어했고 강반석은 아들을 위해 특별히 쌀밥을 짓기도 했다. 하루는 그가 고기가 먹고싶다며
조르자 강반석 권사는 집사를 시켜 쇠고기를 구입하였다.
하지만 정작
이들에게 고기는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 성탄절에만 먹었을 정도로 고기는 늘 성주의 몫이었다. 그래서 그는 권좌에 오르고 죽을때까지 식탁에
고기가 없지않았을 정도였다. 그것도 종류별로 다양했으며 특히 염소고기는 그의 아들에게도 별미로 제공되고 있다. 그런 교우들은 항상 김형직
장로부부를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볼 때가 많았다. 처음 김-강 부부의 구역예배에 참가했을때 그들의 소박한 식단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안쓰러워 하루는 쇠고기 한 근을 가지고 김형직 장로댁을 방문하기도 했으나 역시 고기는 아들 성주를 먹였다는 것이다. 당시 소 한마리 값이
오늘날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하니 외가가 상당한 자산가였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성주는 이때부터 표적을 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은 적응력이
강하다지만 예외도 있는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암소스테이크에 입맛이 길들여졌다면 나물 등 재래음식이 입맛에 맞지않고 나물만을 먹어 온 사람들은
고기맛을 모르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먹고싶어도 자식을 위해 참는 것이 부모이듯이 그들도 고기맛을 알고싶었으나 아들 성주를
위해 양보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따라서 김형직 부부도 고기를 먹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적응력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후로 교인들은
성미대신 헌금예물로 대신하라며 말을 건네기도 했다. 교우들은 자신은 굶어도 자식만은 배불리 먹이려는 김형직 부부에 감동하였다. 그럼에도 김형직
부부는 자신들은 쌀밥이 필요없다며 꾸준히 성미를 드릴 것을 약속했고 자식 몫을 빼고 절반 만 성미를 바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그러자 성주의
거만함은 주일학교 졸업반이 되면서 더욱 극에 달했다. 거만함은 교만함으로 발달했고 그 교만함은 하늘을 뚫을 정도였다. 당시 일본정부는 김형직의
단기선교를 위한 출국을 독립운동을 하러가는 것으로 판단하고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았다. 그는 가석방 이후 일본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면서 더욱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항일투쟁의 본거지 만주였기때문에 더욱 의심을 하였다. 그러나 김형직부부는 증거를 제시하면서 만주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는 교회 신앙생활보다 세상사에 더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중등부 과정을 밞으며 가족들과 함께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역사 인물전을 두루 습득했고 이 과정에서 마르크스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김형직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6년 뒤, 강반석도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그것이 성주의 일생을 360도 바꾸어 놓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신앙서적이나 기독교인물사 외에 철학과 인문학도 두루 구독했는데 이 중 <공산당 선언>을 특히 감명깊게 읽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식구들은 ‘공산당’이라는 의미에 대해 무지했기때문에 그 저서의 내용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레닌이 성경을 소설로 치부하고 볼셰비키혁명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숙청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성주에게 충고해 주곤 했다. 그러는 사이 성주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지인을 만나게 된다.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박성식이었는데 그는 평양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접한 영수의 아들로 제럴드 셔먼호 사건 당시 토머스
목사로 부터 성경을 건네 받고 기독교인이 된 영수 출신 박춘권의 손자였으나 자신의 이상을 좇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되었다.

 

하지만 조부라는 박춘권이 대동강변에서 이익현이라는
조사관을 납치, 감금한 미국놈들을 격퇴한 공로자라는 사실을 앞세우기도 했다. 그는 집회를 통해 만난 한창 나이가 어린 성주에게 ‘예수는 자신이
죽었다 살아난 하나님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주체사상의 원조’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성주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 너무도 같은 사상을 지녔다며
훗날 그를 무력부에 임용하였다. 이후 박성석은 6.25를 진두지휘 하는 등 당 간부로 호외호식하다 영양과다로 인한 성인병으로 사망했다. 그에
의해 김좌진 장군이 살해된 이후 독립투쟁은 다소 위축되었으나 7년 후 혜성처럼 등장한 무명 항일투사에 의한 보천보전투의 완승 소식은 또 하나의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을 뻔했던 사건이었다.

 

진짜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보천보 전투소식을 접한 언론사를 통해서였다. 독립운동사는 물론 기독교역사에 있어서도 김일성이라는 인물에대해서는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았다.
10년전 만 하더라도 김일성이라는 인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불이익을
당하던 시절이었기에 좀처럼 진위를 가리는데 순조롭지않았던 것만은 자명하다. 이를 두고 일본군 100만명을 물리친 사람이 조선인 한 명에게
당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않는다며 반문할 수 있지만 그만큼 전략에따라 다르다. 강반석이 사망하기 1년 전에는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김좌진
장군도 같은 조선인에 의해 암살되었다. 자손 대대로 권위를 누릴것이라고 했던 그의 사주는 완전히 빗나가 김일성의 아들은 북한땅에서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고 있으며 손자가족들은 고난의 행군때 굶어죽었다고 한다. 이것이 빈농출신의 독립군들이 우대받고 사는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공산당의
교활한 거짓 선전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본보기가 되어 준 셈이다. 그렇지만 김일성의 자손들이 모두 독실한 지하교회신자였다는 점에서 평안했을
것이라는 후문이다. 김일성은 김정숙과 결혼하면서 유모를 두엇는데 그녀 역시 김일성이 출석하던 평양교회의 교인이었다. 김일성이 주일학교시절부터
알고지내던 그는 이후로 김일성의 잔악성을 알게 되었고 김정숙이 창일을 낳자 그를 데리고 야반도주했다.
예상했던대로 김정숙은 창일을 낳고 얼마 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어떻게 자신의 이상과 욕망때문에 인생의 반려자까지 무참히 살해할 수 있는가 하며 치를 떨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모는
지하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으며 홀로 창일을 키워낸 것이다. 창일도 그를 어머니처럼 따르기 시작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목사가 되었다. 김일성은
슬하에 정일,영일,창일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전처인 김정숙의 아들이었고 넷째는 후처인 김성애의 딸이었다. 김경희로 현재 노동당
당수인 장성택의 아내로 한때 숙청된 경력이 있었다. 김경희는 지하교회목사인 창일과 접선하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이되었다. 평양의 교회들은 칠골교회와
봉수교회만이 존재하고 있다. 김형직 부부는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과 성주에게 물려 줄 헌금을 구분할 만큼의 자산을 늘릴 수 있었다.

 

에스더 기도운동본부의 김미영 한동대교수는 김일성이 일본군
100만 명을 무찌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을 세웠다지만 정작 김일성 스스로가 개선장군임을 내세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비교적 최근 강의를 통해 알려진 사실로 지난해 에스더 기도운동본부에서 청강한 것이 좋은 자료가 되었다. 만약 김일성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결국 김일성이 사망함에따라 조선은 외세에 의해 광복을 맞게되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6.25당시 북한과
우리나라의 전력을 비교해보면 경제, 군사력으로 매우 우위였다. 북한은 전함, 항공기, 전차, 잠수함 등으로 무장했지만 우리나라는 소총과 수류탄,
박격포가 고작이었다. 이 모두 소련의 무상원조로 제공되었다지만 당시 소련의 경제상황으로 볼때 무상원조할 만한 여유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사제를 털어 구입했다는 후문이다. 짝퉁 김일성은 해방 후 귀국하여 자신이 마치 보천보 전투에서 일본군 100명을 물리친 개선장군인 양
행세하였고 이를 기념하고자 수도 평양에 개선문을 세우기도 했다. 지금은 장대현 교회가 있던 자리에 금수산 궁전이 들어섰고 그곳에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되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5년만에 700만 동족을 죽이고 1천만 이산가족을
남기고 국토는 물론 한민족을 분열시킨 인류역사상 전후무후한 행적을 남긴, 지금도 남기고 있는 김일성이 기독교집안이었다는 사실에대해도 개신교가
비난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이것은 가정교육에서부터 제대로 되어야한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건장한 체격때문에 아이들로부터
늘 주인행세를 하였다. 식사때도 그는 어른보다 먼저 수저를 드는 것이 습관화되었는데 물론 이것은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자식부터 먼저 먹였던
부모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긴하다. 그럼에도 그의 자녀(김창일,김경희)가 진짜 기독신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조부인 김형직-강반석의
신앙심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김형직
부부는 다소 기복신앙적인 행보가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영광에 앞서 오로지 자식의 영광을 위한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던 사실도 묵과할
수는 없다. 물론 자식 위하지않는 부모가 어디있겠냐마는 지나침은 아니함 만 못하다는 말이 있듯이 그에게 최소한의 겸손함과 조연의식을
가르쳐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그는 시기, 질투, 불협, 아집, 독선으로 뭉친 바리새인과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한국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듯이 당시의 눈높이로 볼 때 그는 상당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상기한다. 이것은 망국병의 일환으로
이러한 악습은 지나친 과열로 상대를 존중하는 미풍양속이 아닌 상대를 밟고 올라야만 승리하고 성공 할 수 있는식의 병폐로 현대사회에도 이것은
만연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사랑이라는 헌신과 예수님의 진리에 위배되는 행위로 우리는 이러한 구습의 정신을 버리지 못하면 도태되고 말
것이다.
내가 에스더 기도운동본부에서 선교학교과정을 수료했을때의 일이다. 이
단체는 원래 하나의 사회단체로 풀타임이나 파트타임에(아니면 자원봉사라도) 신청하려 했으나 부름받지않아 온라인상에서만 활동하고 있다. 북한선교에
대한 강의를 들었을때 황장엽 前 노동당 비서가 초청된 바 있다. 주체사상의 근간을 놓은 분으로 알고있는데 그것을 탄생시킨것이 아니고 주체 철학을
만들었을 뿐이라고 하셨다. 즉 주체사상은 이미 일제시대때 김일성과 박성식에 의해 기반이 마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픈도어 선교회에서는
북한은 8년 연속 기독교 탄압국 1위라는 불명예를 기록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아니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 복음과 사상이 전파된 북한의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그곳은 이제 고대 로마를 능가하는 기독교 박해의 땅이 된 지 60년이 흘렀다.

 

필자의 외조모님이
청년시절 인천으로 돌아오면서 그를 꿈에서 다시 볼까 두려웠다고 했을 만큼 그의 망나니같은 행동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에게 애정을 가졌던 외조부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계시를 들먹여 어린시절은 다 그렇다며 그를 두둔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김형직 부부 가족들의
장례식때마다 성주는 너무도 이상하리만큼 태연했다. 남도 아닌 핏줄의 죽음을 보면서 꿋꿋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어느정도 이해가 갔어도 최소한의
격식은 차리는 것이 상주의 예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자신을 보는 눈빛이 싸늘하다 못해 음흉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차가웠다고 하셨다. 당시
성주의 부모와 철주의 입관,발인예배를 모두 참석하고 부모님과 함께 빈소를 지켰다. 물론 성주도 빈소를 지켰으나 표정만은 내심 표독스러웠다며
몸서리를 치신 바 있다.

 

해마다 6.25가 되면 너무 오랜세월이 흘렀기에
잊혀져가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아픈기억이기에 직접 경험을 하던 당사자들 조차 그때의 기억을 지우고싶어 한다. 하지만 그때의
참전용사들과 증언자이신 원로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이같은 참상이 후손들에게도 일깨워주기 전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시대의 상처로 남아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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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실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살아가는 이유

김정운은 최근 김정은으로 끝자락을 개명했다. 그런데 김정은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에 연예인 가운데에서도 많다. 우선 걸그룹의 대명사 주얼리의 김정은이
있는가하면 간드러진 웃음소리의 주인공인 탈렌트 김정은이 있으며 ‘칵테일사랑’을
부른 마로니에 멤버출신인 김정은이 있다.

 

그렇지만
이들도 인류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몹시 불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과 김영숙의 암살교시혐의가 있는 전과자로 이대통령이
전과 14범 어쩌구 하는데 김일성에서 김정운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죄악으로 치면 그

전과 수는 가히 천문학적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러면 온갖 악행으로 그것으로 그런사람들은 최고의 지위까지
오르는 승승장구하고 성실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후 기약없는 고난을 예비해두셨기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허영과
쾌락을 주셨지만 이들은 사후 큰 상급을 예비해두셨기땜시 나그네로써의 삶을 고난의
연속을 주신것이다.

 

김정운은
또 지난 2004년 차남 김정철이 김정일의 후임 통치자로 지목되자 권력암투를 벌이기도
했던 암적 존재이다. 결국 심약하기로 소문난 김정철이 동생에게 밀려 권좌를 포기한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권력투쟁이 종지부를 찍었다고는 볼 수 없다.
150일 전투에 이은 100일 전투도 그가 착안한 정책이라고 한다.

 

더구나

북한당국을 비난하면서 김일성 동상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헌화를 하는가 하면 탈북자와 지교회를 외면한 채 김일성 영생탑을 세우는 사이비
목회자들의 태도는 하나님께 면목이 없을 따름이다. 이 모든 게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인 황금만능풍조에 포위된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만약에 김일성이
농노로 평생을 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자로 청년기를 보냈을 즈음에 공산주의나 사회제도를 몰랐을 것이고 그도
권력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인류에게는 원죄가 있었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고 생명과를
따먹으라는 창조주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셈이다. 때문에 인류는
땅을 개간하여 먹고 살게 되는 고난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일(농사)이 워낙
고된지라 인류는 다양한 꾀를 내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직업의 수가 수백여게에
이르렀다. 대신 인류최초의 직업은 박물관에서나 구경할 수 있게 될 날이 머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인류역사를 보면 가축을 사냥하여 먹고 사는 수렵사회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인류에게 주어진 농사일은 얼마 되지 않기때문이다.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아무런
기구도 없이 맨손으로 땅을 일궈야 하는 일이 막막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목축업을
시작했고 키워 사료를 만들게 된 것이다. 물론 아담 부부는 소를 이용해 논과 밭을
갈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낸 게 석기였고 구석기와 신석기로 나뉘면서 인류의
역사가 기록되었다. 그렇게 직업은 진보하면서 수렵화->농경화->산업화->정보화로
진화하게 된것이다.

 

이처럼
인류는 죄의 댓가로 고통들을 주셨지만 이것을 역 이용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가
기독교를 모르던 농경시대의 농민들이야말로 가장 성경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양반들이나 왕가에서는 엽색행각이나 벌이고 술판을 벌이며 살아갔다.
그것이 반만년 이 상 지속되었으니
농민층 사이에서는 공산주의사상은 달콤한 미끼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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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신종플루로 사망


신종플루 감염자가 1만 명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대로가면 이로 인해 인류는 2012년
예언대로 멸망할 가능성이 가깝다. 그것이 앞으로 1~2년 동안은 지속될 것이고 우리나라도
대다수가
감염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4월 멕시코에서 출발한 그 전염병은 4개월 뒤 한국까지
상륙했다. 황장엽님의 말씀대로 김정일은 김일성보다 더 악랄하다고 하셨다. 그런 김정일보다
더 악랄하다는 김정운이라는데 그러면 그의 아들은 김정운보다 더 악랄할테고, 그렇게
북한주민들은 김씨일가 4대를 세습테제하에서 신음하게 될 것이다. 신의주시청에
태극기가 펄럭이지 않는 한 그렇게 될 것이다. 아직 김정일이 북한사회의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지만 군권을 완전히 장악한 김정운이 실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한다.

 

때문에
아버지 김정일 조차도 그를 엄하게 추궁할 정도로 월권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김정일의 방외할동마다 대동하면서 잘난척을 하고 다닌다. 특히 군부대를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수시로 방문하면서 신종플루감염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다. 또한 150일 전투에 이어 100일 전투를 지휘하면서 12년 강성대국 등극에
한 발짝 다가섰다. 경제도 그때까지
연 평균 20%성장을 목표로 하고있으며 이 역시 달성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김정운한테
김정일이 함부로
개기다 봉변당하면 어쩌려고 그랬는지 모른다.

 

부전자전이라고
했듯이 김일성이 김형직을, 김정일이 김일성을 독살했을것이라는 의혹이 있듯이 김정일이
김정운을 간섭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측근이 큰형인
김정남을 암살하려다 뽀롱나서 중국과의 외교마찰을 일으킨 바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김정일도 안심할 수 없다는 추측이다. 친형을 살해하려다 실패하자 대신 그의 생모인
성혜림을 쥑이려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망명했다는 후문이다. 그러자 대남공작원을
통해 망명지에서 살해되었다.

 

어떤이는
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만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징징대곤 한다. 시각장애인으로
백악관 차장보인 강영우 박사도 억만장자였던 부친덕에 세상을 모두 가진 것처럼
살았다. 그러나 6.25때 지주라는 이유로 북괴군에 의해 학살되면서 가세가 기울게
되면서 이후 극심 한 생활고를
겪었다. 쇠고기 스테이크를 먹던 강영우의 어린시절은 부친을 여읜 뒤 물구죽이나

나무껍질 등을 먹으며 살아오다 영양실조로 인해 시력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그런상태에서
중학교때 축구를 하다 그 공에 양쪽 눈 가운데를 맞아 영구실명한 것이다.

 

그 충격으로
모친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고 누나는 서울의 한 봉제공장에서 일하다 과로로 세상을
떠나고 몇 년 후 막내동생도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졸지에 생고아가 된 강영우 박사는 고아원에 보내졌으나
지속된 원장의 학대와 원생들의 이지메 속에서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독학한
끝에 미국에 유학하게 된다. 그래서 성공했으나 결코 순탄치만은 않은 청년기를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주가
돌아왔다 역시 드라마일 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드라마보다 더한 현실이라고 한다. 지난
주 결말을 보니 도경의 남편이 인기가수로 회귀하면서 새집을 장만하자 고모와 그
자녀들이 아버지인 나봉희와 함께 같이 살아가는 내용인데 결국 도경 혼자 남는 셈이었다.
도경의 부모가 과로로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뒤의 우여곡절을 그렸다. 아무리
막장드라마라지만 유산을 노려 부모를 살해하는 억만장자 패륜아도 있는데 저런 엽기가
없다.

 

이후
재벌2세인 찬우가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도경과 연예를 시작하자 찬우 아버지가
고아에 평범한 교사신분이라며 찬우와의 결혼을 결사반대하면서 찢어지게 된다.
물론 부모세대가 재산을 종교에 봉헌하거나 사회에 환원하는
것에따라 다르다. 대표적인 무신론 철학자였던 니체는 종교에 빠지는 것은 도박을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이 그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형직 부부나 조용기 목사와
같이 종교활동을 통해 부를 얻은 이들도 있지만 종교로 인해 가산을 탕진한 이도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례는 대략두
가지 추측으로 나눌 수 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자동차를 5대나 소유한 억만장자였던
최춘선 할아버지와 같은 세상의 물욕을 버리고 청빈한 삶을 사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재산을 천국은행에 저축해두고 빈 손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을
법하다. 레닌은 또 종교는 주식투자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 것은 현실을 잘 반영해주는
발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헌금을
하는 액수만큼 하나님께서 그 몇 배로 되돌려주신다는 목회자의 꾐에 넘어가 이 말에
현혹되어 헌금하기 경쟁을 벌이듯 하는 식인 것이다. 주식투자에 비유한 것도 주식투자를
하면서 몇 배의 순익을 올리는 경우도 있지만 재수없으면 몇 만원은 기본이고 수
십억씩 날리는 이도 허벌나게 많다. 그러니까 그들의논리는
도박은 주식투자요, 이는 곧 기독교 신앙이라는 뜻으로 풀이된 것이다. 6.25때
북한군에 잡혀 고문받고 사망하신 필자의 외조부님께서도 50년 자유당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셨으나 당선축하금과 입당축하금을 모두 교회에 헌금하셨기에 남겨주신 유산이
없었다고 한다. 강영우 박사의 부친도 마찬가지로 자유당2대
국회의원으로 양평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강영우 박사가 미국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경력이
뒷받침 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자녀세대들은 빈털터리가 되는 경우도 허벌나게 많지만 재산을 물려받은 사례는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억만장자들이 재산상속에 혈안인 것도 이러한 우려땜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이유는 억만장자 부모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억만장자의 삶을 이어올 수 있었는지
그시대에 따른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대부분의
억만장자들은 6.25때 지주라하여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전란에서 무사한
쉑키들은
홀라당 점령군에게
협조하여 그 댓가를 받고 목숨과 재산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융통성이
있었던 것이라며 장점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훗날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날이 속히오리라. 비록 수복이 되어 정부가 상경하면서 부역자들에 대한 숙청이 있었다는데
무전유죄유전무죄가 절정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돈도 없고 인간관계도
없어 피난가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6.25때 지주라는 이유로 북괴군에 의해 학살되면서 가세가 기울게
되면서 이후 극심 한 생활고를
겪었다. 쇠고기 스테이크를 먹던 강영우의 어린시절은 부친을 여읜 뒤 물구죽이나

나무껍질 등을 먹으며 살아오다 영양실조로 인해 시력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그런상황에서
중학교때 축구를 하다 그 공에 양쪽 눈 한가운데를 맞아 영구실명된 것이다. 그 충격으로
모친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고 누나는 서울의 한 봉제공장에서 일하다 과로로 세상을
떠나고 몇 년 후 막내동생도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졸지에 생고아가 된 강영우 박사는 고아원에 보내졌으나
지속된 원장의 학대와 원생들의 이지메 속에서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독학한
끝에 미국에 유학하게 된다.

 

위와
함께 강영우 박사는 몰락한 억만장자 집안이었지만 양극화는 그시대에도 존재했음을
보여주었다. 앞서
개제했듯이 빈부격차는 보릿고개 시절에도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산업화가 되면서
빈부격차가 늘었다지만 오히려 중산층이 늘어난 시기가 아니었는가. 비록 그시절
못지않은 삶을 살고있는 오늘날의 빈민층도 있긴 해도 그때에 비할까 싶다. 스테이크
먹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풀죽 먹는 사람이 있었던 게 식민지와 자유당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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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얽힌 에피소드

나폴레옹이 한 전쟁터에서 전투를 앞두고 어느 소년병 한 명이 겁을 먹고 전선을
이탈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문에 그 탈영병은 군법재판으로 회부되었는데 그러한
경우 대부분 사형이 집행되었던 시대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 소년병이 어린나이였기에
마음이 약해졌는지 그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좋은 말로 타이르기만 했다. 그리고는 나폴레옹은
그의 이름을 묻자 소년은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소년의 이름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고 이에 나폴레옹 장군은 다소 분노섞인
표정으로 변하더니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호통을 친 것이었다. ‘그렇게 용기가
없으면 성격을 고치거나 이름을 바꿔라’고 다그쳤다. 소년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과
똑같자 분을 참지 못한 것이다. 이렇듯 용맹함의 기상으로 군림하던 나폴레옹의 위상이
자신과 동명이인의 나약한 행동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이름값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정죄였다.

 

역사적으로도
위인의 이름을 도용하여 그 이름에 똥칠을 한 사례가 있다. 1937년 보천보 전투소식은
청산리 전투를 능가하는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한 승전고였다. 그러나 그 이름 석자
는 해방
후 60년 동안 북한지역주민들을 억압한 한반도 분단의 원흉이자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사악한 독재자의
이름으로만 기억해 온 것이다. 일각에서는 그가 항일운동가 겸 송산교회 집사로 각광받던 김일성을 너무나도 존경한 나머지
그가 사망하자 이름을 도용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추측일 뿐이고 불순분자에
의해 의문사한 그로 인해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라는데 문제가 제기되고있다는데
있다.

 

이렇듯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엉뚱한 인물에 의해 사용된 것이라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한 시대의 영웅이 인간의 탐욕과 심망에 의해서 잘못된
영웅관으로 비춰져 왔던 셈이다. 이처럼 이름에 얽힌 사연이나 에피소드는 허벌나게
많다. 김성수라는 이름을 동아일보 창간인으로 알면 기성세대고 쿨의 멤버로 생각하면
신세대이듯이 말이다. 요즈음에 가장 이슈가 되고있는 시사는 김정운의 북한총통
세습이다. 그런데 그의 명함은 김일성때처럼 주석이라 불리게 될지 김정일의 국방위원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될지 총 통치자라는 의미로 총통이라 불리게 될지는 확정되지 않은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총통이라는 이름은 성향이 다른 대만의 최고 지도자에게 쓰여지고
있어 이 또한 희박할 것으로 본다.

 

그런데
김정운이라는 이름이 본지의 문화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님도 있다. 필자가 본 사이트에서
연일 김정운을 까는 글을 올리는 것은 북한의 샛별장군(!)을 말하는 것이지 본지
칼럼니스트를 지목한 것은 아님을 밝힌다. 그렇지만
세계가 존경할 정도의 훌륭한 위인의 이름이 전대미문의 악인의 이름과 동명이인이라면
기분이 거시기할 것이다. 위인의 이름과 같으면 덩달아 빛이 나지만 악인의 이름과 같으면
이 또한 거시기하기 일쑤다. 김정일의 장자 김정남이 있는가 하면 댄스그룹 터보의
김정남이 있다.김정일은
우리나라에도 있는데 작곡가이자 ‘엔젤리나’의 가수 김상아의 부친의 이름이다. 또S-TV에서
오후 2시에 방송되는 뉴스아나운서의 이름이기도 하다. 내 이름이 이상철인데
탈렌트 중에도 이상철이 있다. 본명은 이상훈인데 그 역시 90년대 초 ‘사랑은 기다림으로’를
불렀던 가수가 있었다.

 

독립운동가면서 임시정부의 공로자였던
정치인
백범 김구가 있었는가하면 혼성그룹 코요테의 김구가 있었다. 김정운의 할아버지이자
김정일의
아버지이고 국토 및 민족분단의 원흉임과 동시의 동족상잔의 비극 6.25의 주범이었던
김일성은 본명이 김성주로 스포츠뉴스를 진행하는 김성주가 있기 마련이다. 그
외에도 이름가지고 패러디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인들의 흔한 성씨가운데에는 조지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에 대해 남성만이 지닌 신체부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가수 서태지도
이름땜시 소돼지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요즘에는 경기불황의 여파로 역술같은
성명학
신드름이 대단하다.

 

이를
두고 특정 종교에서는 미신이라하여 배척하는데 혈안이 되기도 했는데 오늘날 처럼
이름으로 인한 운세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폭증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스포츠신문
중에 톱을 자랑하는 스포츠S의 구독율 비결은 단연 김모씨의 성명학이 있다. 문제는
이름만 가지고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기대에 부푼 나머지 허황된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때로는 이름이
불길하다며 개명을 권유하는 이에게 거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돈을 마련하기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고사로 위장에 가족들을 해치워버리는가 하면
복권을 구입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성명학 광풍은 몇 년전 대한민국을 강타한
로또를 능가하고있다.

 

김성주가
김일성의 이름을 도용한 것은 그의 이름이 성명학으로 뛰어났다는 것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허황된 영웅심리였다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도 주일학교 유치부때만 해도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가족들의 영향으로 성명학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가 장성해서도 성명학을
부정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름도용이 성명학과는 무관했다고 본다. 성명학이 맞지
않다는 부작용을 접하는 경우도 있다.

 

개명하려다
가산을 탕진한 사람들의 이야기 등이 자주 매스컴에 오르내리곤 한다. 나폴레옹 장군의 이름과 같았던 그 소년병은 훗날
이름을 개명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전장으로 향했듯이 이름이 인생을 좌우하는 게 아니다. 제 아무리
천지를 개벽시킬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도 이름에 좌절 했더라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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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위기의 대안

타고난
사람은 없습니다. 불모지였던 우리나라가 불가능할 것이라며 여론만 믿고 포기했었더라면 지금도 우리는
1950년대 수준의 농경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문제도 없지 않지만 시대상황에
잘 적응해 나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쇠락하는 직종은 농업인데 5천 년 단군신화로부터
시작 한 농사일은
전통으로 유지해가야 합니다. 이제 60대도 젊은층에 속하는 농촌인구는 서서히 세월의
무정함속에 하나 둘 흙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유전공학을 발달시켜
쌀 한 톨을 겨란크기로 만들거나 소를 코끼리만하게 만들어 대체식량을 개발하거나
기존 식량의 대량복제기술을 개발하지
않으면 머지않은 장래에 인류의 대부분은 기아선상에서 헤매게 될지도 모릅니다.

 

대중교통
역시 초창기에는 증기기관차로 시작했으나 소음,분진문제로 인해 대체된 것이
디젤기관차였음니다. 그러다 21세기들어 또다른 대체교통기관인 전기기관차가 늘어났습니다.
다음에는 전자기관차가 등장할 차례일 것입니다. 이에 발맞추어 전기자동차와 전기항공기,
전기배 등이 생산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석유에너지가 한계에 도달한 만큼
이에 대체하는 재생에너지 개발도 중요합니다. 직업의 변화에도 아직까지는 지속되어야하는
분야는 군수산업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북한과 탈레반이 붕괴되지 않는 이상 군수산업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군은 지난해 국제유가가 베럴당 100달러를 돌파한 이후 군사훈련을
절반가까이 축소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북한은 그동안 원조받은 비료와 식량을 가공하여 군사무기를 만들어 군사훈련을 강화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존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연료를 사용해 군사력을 증강해야
합니다. 그러면 전기 미사일이나 전자포를 만들어 친환경 군사훈련으로 대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대 주변의 민가에서도 소음이나 매연으로 인한 민원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고 누이좋고 매부 좋은
것입니다. 시대의 변화와 더블어 직업군도 진보한 것이랍니다. 하지만 유지해야될
것은 전통양식입니다. 농사일만 주어졌던 인류는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 다양한
직업을 형성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역효과를 초래하여 오늘날의 식량대란을
촉발시켰던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앞으로 환경문제에 앞서 식량문제가 우리인류들의
앞날을 불안정하게 만듭니다. 저들은 식량무기를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 우리가 보낸 세제로 생화학 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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