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미스테리의 인물 가운데 가장
연구대상 중 한 사람인 듯 싶다. 한 세대가
지나며 이제는 그에대한 평가가 완화되었다는 것에대해 부정할 수는
없지만 김일성 만큼이나
베일에 싸여진 인물도 드물 것이다. 사실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는 당시 그와 가족들이 섬기던 교회를 다닌 사람이
있었거나 지금까지 생존했던 사람들이
증언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외조모님을 모시고
살때 들려주셨던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내용이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에는 교회가 없었기때문에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평양이나 타 교회가
세워진 지역으로 초빙되거나 청빙되어갔다.
나의 외증조부님이 1914년부터 1938년까지 숭실학교
교사로 평양에 체류하던 때였다. 당시 외조모님(2005년 작고)이 주일학교에 갓 입학하던 해 김일성은 졸업반이었다. 그후로 나의 외조모님과 그는
그때부터 악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때 전대미문의 악인 김일성이라는 존재를 알게되었고, 따라서 자신의 부친과는 다른 평가를 한 것이다.
아버지는 그를 친 자식처럼 잘 대해주셨지만 자신은 몹시 불쾌했다고 한다. 이에 대놓고 항변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우락부락한 체구와 한 성격하는
이미지때문에 섣불리 그를 건드리지 못하였다. 교인들이 모두 성주에게만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것에 대한 시기심이 아니라 이로 인해 그의 오만함과
거만함이 나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는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그의 선친인 김형직 장로가 의문사로 교회가 떠들썩했으나
그는 문상중에도 태연한 모습에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상객들은 그를 천국의 대한 소망으로 생각하였으니 자신이라고 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철주의 입관식때에도 둘째인 영주는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했으나 성주는 덤덤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정작 자신조차도
반신반의했을 정도였다. 헌화를 한 뒤 영주와 성주에게 맞절을 했는데 두 형제의 표정이 사뭇 달랐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악연은 그 후 6.25때까지 악연은 계속되었다.
김일성은 남침전에
이미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고 한다. 처형대상자와 납북대상자를 구별하였고 이 중 종교인과 고학력자, 고래등
같은 집에 사는 지주들이 해당되었다. 무속인이나
불교인들은 경우에 따라 납북대상자로 선정했지만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처형대상이었다. 당시 외증조부님은 숭실학교시절 인연을 생각하여 그에게 전도가
통할 것이라며 북한군 점령하에서 보위부로 향했으나 그렇지 않아도 처형대상 1호로 지목된 가족들인데 무모한 짓이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당시
외조모님은 고보출신에 여당 국회의원으로 갓 당선된 재력가를 남편으로 둔데다 일가족 모두 기독교인이라는 점이 북한당국의 사냥감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김일성은 숭실학교시절 자신을 시기한 자들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태생인 그의 집안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봉건계급사회에서
근대화의 물결속에 자율경쟁체제로 진입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 부부는 몸에 벤 근검절약으로 인해 성주에게 상당한 재산을 물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 부부가 오로지 교회와 자식밖에 모르던 외골수는 아니었다.
김형직은 성주가 태어나기 넉 달 전 이른바 105인
사건이라 불리는 당시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가석방 된 상태에서 또다시 기미독립선언에 동참한 뒤 만세운동을
벌이다 재수감되었다. 강반석의 모친은 딸이 출산을 앞두고 있으니 그 과정만 지켜보게 해 달라고 교도관에 사정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들의
기독교신앙은 대대로 이어져 왔다. 친가는 물론 외가며 친인척들이 모두기독교인들이었고 증조부인 김응수는 셔먼호가 대동강에 표류했을때 주민들과 함께
현장에 있었다. 그러나 김응수는 주민들이 셔먼호와 선원들에게 돌을 던거나 셔먼호를 전소시키는데 동참하지않고 숨어서 이를 지켜보다 비밀리에 예수를 접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형직 장로와 강반석 권사는 평양 대부흥집회를 통해 만났다. 당시
강반석의 선친 강돈욱은 창덕학교장으로 엘리트였고 김형직은 시무장로였다. 본명이 김성주인 김일성은 주일학교를 통해 성장했고 외조부인 강돈욱이
그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그는 성경말씀에 어두웠지만 자라서 누구못지않은 크리스찬이 될 것으로 믿고있었던 것이다. 김형직과 강반석은 각각
1926년과 1932년에 사망했는데 이에대한 의혹이 꼬리를 물고있으나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다. 철주 또한 해방 전인 1938년도에 의문사 했고
얼마 후 외조모님의 식구들은 평양을 떠나 고향 인천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김일성은 당시 조선에서도 자라기 시작한 마르크스 사상에 빠져 예수
신앙을 좇으려던 부모형제는 물론 친지들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형제인 철주도 부모님 뜻을 따르게 되자 성주와의 마찰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대대로 빈농
출신이던 김형직부부는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하게되면서 가계를 일으켰다. 김형직은 평양 대부흥 집회를 통해 강반석을 만났고 어린나이였으나 기도만큼은
누구보다도 뜨거웠다며 그러한 모습에 끌려 강반석이 성년이 되던 해 결혼하였다. 김형직은 강반석보다 한 살 터울로 강반석 베드로는 결혼 후 집사로
봉직하다 30세때 권사가 되었다. 대대로 빈농의 자녀들로 내세울 것 없는 가문이었지만 예수님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이라며 성주에게 말해주곤
했다. 출생당시
그의 몸무게는 5kg이나 되었으나 산모인 강반석이 그를 임신할 당시에는 36kg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아이를 낳는 기쁨에 전혀 힘들어하는 내색 없이 하늘이 준 옥동자를 낳았다고
감사했다. 대식가로 자라던 그에게 항상 고기를 먹고싶어했기에 항상 가축들의 씨가
마르곤 했다.
이로
인해 생태계 파괴가 심각해지면서 총독부에서는 사슴,토끼,닭,소,돼지,고등어의 남획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아무리 억만장자라고는 하지만 대일본제국의 항국신민도
자주먹지 않는 고급요리를 일개 조센진따위가 함부로 먹는다며 불쾌한 심기였던 셈이다.
때문에 국내에서 양식을 구할 수 없게되자 이들은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고기를
구해오곤 했다.
어렸을때 부터 감기약 한 번 먹지않았을 정도의 건강체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형직 부부는 결혼하기 전 잔병치례가 많았기에 이제 병원도 쉬어야하지 않은가 하며 자식과 그들 부부의 건강관리를 철저히 했다. 그러나
워낙 활달한 성격이었던 그는 다람쥐 챗바퀴 돌아가듯이 번복되는 일상에 매우 싫증을 느꼈다고 한다. 집과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거의 매일
반복되었기때문에 그는 늘 새로운 것을 찾으려 했다. 자신만의 이상을 찾으려 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공산주의사상이었고 이는 그의
교만함의 부산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철주의 죽음에 대해서도 조작된 것이 많다. 그는 1926년 선친의 죽음 이후 성주와 함께 혁명조직을
결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조직이 워낙 허무맹랑한 조직임을 파악한 철주는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기독교 잡지를 발행하였으나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뒤늦게서야 그가 만주군과의 전투에서 옥사했다는 소식으로 일관한
것이다.따라서 성주 가문의 위대함을 전국 도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끼니걱정을 하던 이들 부부는 강 베드로 권사의 부친인 강돈욱 장로가 창덕학교장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차츰 가계를 일으켰다. 그럼에도 이들 부부는
이게 모두 주님의 은혜라며 겸손함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성주를 낳던 해 김형직 장로는 105인의 일원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수감되어있었다.
이후 가석방 될 때까지 매년 성주를 데리고 면회를 하였고 뒷바라지와 함께 성주에게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시는 분이라며 존경심과 동시에
반일감정을 심어주었다. 옥중에서 김형직은 동료 재소자이던 백범을 전도하기도 했는데 백범은 한때 승려생활을 했으며 1896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일행 중 한 명인 일인을 시해하자 일경을 피해 공주 마곡사에 은신했던 백범을 존경했다며 그분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김 장로의 신앙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김형직은 가석방 이후 또다시 3월1일 기미만세운동에
동참하다 재투옥 되었고 징역5년을 언도받은 뒤 출옥했지만 1년도 채 안되어 의문사하였다. 김형직 장로의 장례식을 치른 뒤 강반석은
성주,영주,철주 등 세 아들을 데리고 만주로 떠났다. 그런데 이들이 만주로 떠난 지 6년만에 강반석 마저 한 줌의 흙이 되어 돌아왔고 얼마
후에는 철주마저 주검이 되어 시신으로 귀국했다. 사안은 병사로 알려졌지만 그 부분에서 의혹이 없지않다.
이에 교인들은 고생고생하다 이제 겨우 살만해졌는데 허무하게 흙으로 돌아갔다며
애통해하는 이들도 있던 반면, 이들부부의 신앙심이 워낙 신실하여 하나님께서 좀
더 일찍 천국으로 초청하신것이라고 생각하라며 유족들을 위로해주는 이도 많았다.
주일학교 시절
성주의 행동을 당시 필자의 외조모님은 매우 못마땅히 여겼고 한다. 그런데 20년이
자나서 그에 의한 군대에 일가족들이 죽임을 당했으니 더욱 그에 대한 증오심이 얼만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해방후 독립적인 국가를
세운 뒤 선친과 형제의 이름을 딴 사범대학교와 행정구역,철강소의 이름을 사용했다. 이때문에 셋째아들 김창일이 가짜교회의 목사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김일성은 주일학교시절 못말리는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하루는 용변을 보던 목사님을 향해 새총으로 명중시키는가하면 여전도사의
치마를 들추어내 봉변을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교인들은 백범 김구선생도 어렸을때 무척 개구쟁이였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선조들 가운데에도 어린시절 대부분 개구쟁이였다면서 성주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김성주는 태어날 때부터 아니 출생하기 전부터 우람한 체격이어서 강반석은 그를 낳을때 무척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좀처럼 아이가 나오지
않자 동료집사님은 서양의술을 동원해 제왕절개를 해야한다는 말을 했으나 자칫 산모는 물론 아이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거절하였다. 재왕절개
과정에서 신경이 손상될 수 있고 그렇다고 힘을 너무 주어도 신경손상의 가능성이 높아 아이가 기형아 또는 저능아로 나올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강반석은 ‘나는 잘못되어도 상관없지만 내 아이만은 정상적으로 자라야 한다’고 했으니 아이에 대한 모정이 얼만했는가를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김일성은 1912년 4월15일 교우들의 축복 속에 태어났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아주 건강하고 똘똘한 아이로
성장하였다. 김형직 부부의 헌신적인 신앙에 하나님께서도 감동하여 이처럼 듬직한 아들을
선물로 주신것이라며 감사하였다. 강반석은 아이를 정성을 다해 키우고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성경을 읽어주었고 때문에 동화보다는 성경을 많이
읽어주었을 정도였다. 그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도 외증조부였고 성인군자의 ‘성’자와 주님의 종이라는 뜻의 ‘주’라로 붙여주었다. 그는 다섯살 때
주기도문을 통독하자 교사들은 깜짝 놀라 기뻐하였고 교인들은 그를 총애하게 되었다. 이어 여섯 살 때는 사도신경은 통독하면서 그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이러한 슬하에서 부족한것 없이 완구류는 물론 먹어보지 않은 음식이 없었을 정도로 풍요롭게 생활했다. 우여곡절 끝에 낳았기에 그
누구보다도 애지중지 했던 김일성이었기에 젊었을 때부터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10살 생일때 선물로 받은 장난감총으로 늘
골목대장 노릇을 하였다. 그러나 성주는 마지못해 외운 것이고 장성할때까지도 성경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다.
"인류가 흙에서
창조되어 에덴동산에서 죽지않는 존재였다고!" "예수가 죽은뒤 3일만에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니, 세상에 그런 엽기가 어디있는가!"
이랗게
성주는 교인들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신앙에 대한 허망함을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의 부친이던 김형직은 3.1운동의
핵심인물 중 한 명으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르기도했으며 그가 의문사했을때 교인들은 고생고생하다 이제 겨우 살만했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며
애석해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교인들은 김형직 장로와 강반석 권사가 워낙에 신앙심이 깊어 하나님께서 좀 더 일찍 천국으로 초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라며 유족들을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부친과 모친의 장례 때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태연한데 대해 조문객들은 내심 슬프기는 해도 부모님이 천국에 갔다고 생각하며 기뻐하고
있을것이라는 생각에 영특했다고 한다. 강반석은 성주가 링컨과 같은 인물이 되어주기를 바랬다. 출생 당시의 환경은 달랐어도 신앙심 만큼은 그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를 바랬다. 이러한 경우 대게 현대인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김일성은 링컨처럼
남북전쟁(6.25를 자칭)을 일으켜 남북통일(북측에서는 북남통일)을 꾀했으며 노예해방 (김일성이 공화국 집권 당시 부르짖던 식민지 해방과 같은
맥락)을 이루려 했다고 말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링컨은 남북통합을 이룩했고 김일성은 이 전쟁으로 오히려 분단을 더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강반석은 성주에게 자장가 대신 성경을 읽어주며 잠이 들 때까지 성경을 놓지않았으며 성주를 갖았을 때 이와 같은 기도를
드렸다.강반석은 틈틈이 집에서도 성주에게 성경을 읽어주었고 교회 지도자가 되든
국가 지도자가 되든 반드시 성경말씀대로 이행하길 바랬다. 그는 성경말씀에 어두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고 좀 더 자라면 못지 않은
크리스찬이 될 것으로 믿었다. 강반석은 늘 그를 위해 기도했고 링컨 등 위인전도 읽어주며 그와 같은 인물이 되기를 바랬다. 그가 마르크스 사상에
눈을 뜬것은 만주에서 마르크스에 관련된 저서를 구독하고 그에대한 사상을 읽고 그에 매료된 것이었다. 어느 날 성주는 이와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식구들과 교인들이 모두 그에게 절을 하는 꿈이었다.
막내로 태어난
요셉은 선친 야곱으로부터 편애를 받았다. 하지만 위의 두 형제는 이를 무척 못마땅히 여겼다. 하루는 요셉이 선친과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하자 형제들은 그를 더욱 시기했으며 급기야 요셉을 매장시켜버렸다. 그러나 요셉은 그곳에서 살아나오자 이번에는 형제들은 동생 요셉을
아예 노예로 팔았다. 에굽의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그래도 형제들을 원망하지 않고 에굽의 보디발 장군의 노예로 일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느꼈던
것이다. 그후 요셉은 노예생활을 했던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어 7년 간 이집트와 이웃나라를 위해 헌신하였다. 반면 성주는 선친은 물론
형제들에게도 사랑을 받았고 그를 시기, 질투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를 따르고 시중을 들기까지 했으니 그는 자라서 더욱 교만하고 거만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도 어느 날 꿈속에서 요셉이 꾸었던 것처럼 선친과 형제들이 모두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고 이에 교우들은
장차 그가 요셉과 같은 인물이 될 것이라며 확신했다고 한다. 따라서 성주는 진짜 요셉을 만났는데 그는 바로
스탈린이었다.요셉은 스탈린의 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요셉처럼 노예생활을 하다
총리가 되지않고 해방이 되자마자 곧바로 한반도 북쪽의 주인이 된 것이다. 지금은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오고 있으며 외교적으로도 대승을 거둔 바
있다. 파산보호신청을 했던 미국의 금융기관 BOA가 북한에 달러를 제공한 것을 보면 알 수있다. 그렇지않아도 적자였던 뱅크오브아메리카는 북한이
핵을 폐기하는 조건으로 제공한 달러로 인해 북한은 더욱 기세등등해져 미사일 발사위협은 물론 2차 핵실험도 강행하였다. 당시 부시행정부는
‘통미봉남’을 통해 철저히 이용당한 셈이었다. 북한에 10억달러를 투자한 결과 미사일(인공위성이라고 하지만)을 발사하고 세월이 흘러 영변
냉각탑을 폭파하는 ‘생쑈’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해방 후 그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는데 그
또한 본명을 도용한 것이었다. 그가 진짜 보천보전투의 주역
김일성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지껏 논란이 되어 왔고 지금도 되고 있다.
그러면
보천보전투에서 전승을 올린 진짜 김일성에 대해 알아본다. 성주와 같은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으로 1888년 태어난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결코 조국을 증오하지 않았고 애국심이 투철했다. 성주의 집안처럼 모태신앙은 아니었지만 소년시절 새총으로 일본순사를 린치한 혐의로 이를 체포하려는
일경에 당시 손정도 목사의 도움으로 수사망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후 손 목사와 인연이 되어 기독교인이 되었고 독립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해방되기 전에 의문사 했으며 이에대한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다. 1943년
얄타회담을 통해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뉘는 의견을 접한 미,소 연합군의 움직임을 파악한 김일성부대는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자 그들보다 먼저
일본군을 일망타진하기위해 청진일대에서 대대적인 작전개시에 돌입했지만 돌연 김일성이 사망하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름을 도용한 주일학교출신
김일성은 한자로 金日成이지만 진짜 독립투사 김일성은 金一聖으로 불렸다. 김일성(성주)이 만주에 체류하던 그 시기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도
당시 공산주의자였던 박성식에 의해 시해되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역사는 일본 100만대군을 물리친 김일성보다 3000명을 물리친 김좌진을
기억한다. 보천보전투로 유명해진 전설의 항일투사 김일성은 이에 앞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기도 한 그는 이름때문인지 북한의 종신총통 김일성에 가려져
그의 명성은 빛을 보지 못하여왔다. 혹자들 중에는 일본군 100만명을 물리친 사람이
조선인 한명에게 당했다는 건 말이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만큼 전략적인면에서 어떻게
승부를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김형직은 1926년 6월10일 그의 나이 34세로
불순분자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의 죽음으로 평양사회는 가히 공황적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면서
국장일을 전후하여 대규모 만세운동이 벌어진 날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은 김형직의 죽음을 일제에 의한 것으로 뒤집어씌우기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김형직이 두 차례나 투옥되고 가석방 되었음에도 계속 항일운동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에 무척 분개했다고 한다. 그래서 또다시 체포되면
종신형으로 다스리겠다고 벼르던 것이다. 일본정부도 그를 인재로 생각했기때문에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같은 조선인에게
암살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5년 뒤 김좌진 암살사건때도 그랬고 보천보 전투의 주역이던 김일성이 암살되었을때도 마찬가지로 일본정부조차
의문을 품었다.
김형직-강반석
부부는 자수성가했어도 만경대에서 검소한 삶을 살았다. 대부분 재산을 교회에 봉헌하거나 임정에 송금하거나 자식을 위해 저축을 해 두었던 것이다.
반찬 수도 보리밥에 김치와 약간의 해물을 넣은 된장국, 나물 등으로 세 끼를 때웠는데 그것은 자라서 결혼 할 때까지 보리밥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주는 보리밥을 무척 싫어했고 강반석은 아들을 위해 특별히 쌀밥을 짓기도 했다. 하루는 그가 고기가 먹고싶다며
조르자 강반석 권사는 집사를 시켜 쇠고기를 구입하였다.하지만 정작
이들에게 고기는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 성탄절에만 먹었을 정도로 고기는 늘 성주의 몫이었다. 그래서 그는 권좌에 오르고 죽을때까지 식탁에
고기가 없지않았을 정도였다. 그것도 종류별로 다양했으며 특히 염소고기는 그의 아들에게도 별미로 제공되고 있다. 그런 교우들은 항상 김형직
장로부부를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볼 때가 많았다. 처음 김-강 부부의 구역예배에 참가했을때 그들의 소박한 식단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안쓰러워 하루는 쇠고기 한 근을 가지고 김형직 장로댁을 방문하기도 했으나 역시 고기는 아들 성주를 먹였다는 것이다. 당시 소 한마리 값이
오늘날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하니 외가가 상당한 자산가였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성주는 이때부터 표적을 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은 적응력이
강하다지만 예외도 있는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암소스테이크에 입맛이 길들여졌다면 나물 등 재래음식이 입맛에 맞지않고 나물만을 먹어 온 사람들은
고기맛을 모르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먹고싶어도 자식을 위해 참는 것이 부모이듯이 그들도 고기맛을 알고싶었으나 아들 성주를
위해 양보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따라서 김형직 부부도 고기를 먹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적응력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후로 교인들은
성미대신 헌금예물로 대신하라며 말을 건네기도 했다. 교우들은 자신은 굶어도 자식만은 배불리 먹이려는 김형직 부부에 감동하였다. 그럼에도 김형직
부부는 자신들은 쌀밥이 필요없다며 꾸준히 성미를 드릴 것을 약속했고 자식 몫을 빼고 절반 만 성미를 바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그러자 성주의
거만함은 주일학교 졸업반이 되면서 더욱 극에 달했다. 거만함은 교만함으로 발달했고 그 교만함은 하늘을 뚫을 정도였다. 당시 일본정부는 김형직의
단기선교를 위한 출국을 독립운동을 하러가는 것으로 판단하고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았다. 그는 가석방 이후 일본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면서 더욱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항일투쟁의 본거지 만주였기때문에 더욱 의심을 하였다. 그러나 김형직부부는 증거를 제시하면서 만주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는 교회 신앙생활보다 세상사에 더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중등부 과정을 밞으며 가족들과 함께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역사 인물전을 두루 습득했고 이 과정에서 마르크스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김형직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6년 뒤, 강반석도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그것이 성주의 일생을 360도 바꾸어 놓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신앙서적이나 기독교인물사 외에 철학과 인문학도 두루 구독했는데 이 중 <공산당 선언>을 특히 감명깊게 읽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식구들은 ‘공산당’이라는 의미에 대해 무지했기때문에 그 저서의 내용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레닌이 성경을 소설로 치부하고 볼셰비키혁명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숙청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성주에게 충고해 주곤 했다. 그러는 사이 성주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지인을 만나게 된다.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박성식이었는데 그는 평양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접한 영수의 아들로 제럴드 셔먼호 사건 당시 토머스
목사로 부터 성경을 건네 받고 기독교인이 된 영수 출신 박춘권의 손자였으나 자신의 이상을 좇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되었다.
하지만 조부라는 박춘권이 대동강변에서 이익현이라는
조사관을 납치, 감금한 미국놈들을 격퇴한 공로자라는 사실을 앞세우기도 했다. 그는 집회를 통해 만난 한창 나이가 어린 성주에게 ‘예수는 자신이
죽었다 살아난 하나님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주체사상의 원조’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성주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 너무도 같은 사상을 지녔다며
훗날 그를 무력부에 임용하였다. 이후 박성석은 6.25를 진두지휘 하는 등 당 간부로 호외호식하다 영양과다로 인한 성인병으로 사망했다. 그에
의해 김좌진 장군이 살해된 이후 독립투쟁은 다소 위축되었으나 7년 후 혜성처럼 등장한 무명 항일투사에 의한 보천보전투의 완승 소식은 또 하나의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을 뻔했던 사건이었다.
진짜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보천보 전투소식을 접한 언론사를 통해서였다. 독립운동사는 물론 기독교역사에 있어서도 김일성이라는 인물에대해서는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았다.
10년전 만 하더라도 김일성이라는 인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불이익을
당하던 시절이었기에 좀처럼 진위를 가리는데 순조롭지않았던 것만은 자명하다. 이를 두고 일본군 100만명을 물리친 사람이 조선인 한 명에게
당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않는다며 반문할 수 있지만 그만큼 전략에따라 다르다. 강반석이 사망하기 1년 전에는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김좌진
장군도 같은 조선인에 의해 암살되었다. 자손 대대로 권위를 누릴것이라고 했던 그의 사주는 완전히 빗나가 김일성의 아들은 북한땅에서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고 있으며 손자가족들은 고난의 행군때 굶어죽었다고 한다. 이것이 빈농출신의 독립군들이 우대받고 사는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공산당의
교활한 거짓 선전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본보기가 되어 준 셈이다. 그렇지만 김일성의 자손들이 모두 독실한 지하교회신자였다는 점에서 평안했을
것이라는 후문이다. 김일성은 김정숙과 결혼하면서 유모를 두엇는데 그녀 역시 김일성이 출석하던 평양교회의 교인이었다. 김일성이 주일학교시절부터
알고지내던 그는 이후로 김일성의 잔악성을 알게 되었고 김정숙이 창일을 낳자 그를 데리고 야반도주했다.
예상했던대로 김정숙은 창일을 낳고 얼마 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어떻게 자신의 이상과 욕망때문에 인생의 반려자까지 무참히 살해할 수 있는가 하며 치를 떨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모는
지하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으며 홀로 창일을 키워낸 것이다. 창일도 그를 어머니처럼 따르기 시작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목사가 되었다. 김일성은
슬하에 정일,영일,창일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전처인 김정숙의 아들이었고 넷째는 후처인 김성애의 딸이었다. 김경희로 현재 노동당
당수인 장성택의 아내로 한때 숙청된 경력이 있었다. 김경희는 지하교회목사인 창일과 접선하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이되었다. 평양의 교회들은 칠골교회와
봉수교회만이 존재하고 있다. 김형직 부부는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과 성주에게 물려 줄 헌금을 구분할 만큼의 자산을 늘릴 수 있었다.
에스더 기도운동본부의 김미영 한동대교수는 김일성이 일본군
100만 명을 무찌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을 세웠다지만 정작 김일성 스스로가 개선장군임을 내세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비교적 최근 강의를 통해 알려진 사실로 지난해 에스더 기도운동본부에서 청강한 것이 좋은 자료가 되었다. 만약 김일성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결국 김일성이 사망함에따라 조선은 외세에 의해 광복을 맞게되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6.25당시 북한과
우리나라의 전력을 비교해보면 경제, 군사력으로 매우 우위였다. 북한은 전함, 항공기, 전차, 잠수함 등으로 무장했지만 우리나라는 소총과 수류탄,
박격포가 고작이었다. 이 모두 소련의 무상원조로 제공되었다지만 당시 소련의 경제상황으로 볼때 무상원조할 만한 여유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사제를 털어 구입했다는 후문이다. 짝퉁 김일성은 해방 후 귀국하여 자신이 마치 보천보 전투에서 일본군 100명을 물리친 개선장군인 양
행세하였고 이를 기념하고자 수도 평양에 개선문을 세우기도 했다. 지금은 장대현 교회가 있던 자리에 금수산 궁전이 들어섰고 그곳에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되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5년만에 700만 동족을 죽이고 1천만 이산가족을
남기고 국토는 물론 한민족을 분열시킨 인류역사상 전후무후한 행적을 남긴, 지금도 남기고 있는 김일성이 기독교집안이었다는 사실에대해도 개신교가
비난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이것은 가정교육에서부터 제대로 되어야한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건장한 체격때문에 아이들로부터
늘 주인행세를 하였다. 식사때도 그는 어른보다 먼저 수저를 드는 것이 습관화되었는데 물론 이것은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자식부터 먼저 먹였던
부모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긴하다. 그럼에도 그의 자녀(김창일,김경희)가 진짜 기독신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조부인 김형직-강반석의
신앙심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김형직
부부는 다소 기복신앙적인 행보가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영광에 앞서 오로지 자식의 영광을 위한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했었던 사실도 묵과할
수는 없다. 물론 자식 위하지않는 부모가 어디있겠냐마는 지나침은 아니함 만 못하다는 말이 있듯이 그에게 최소한의 겸손함과 조연의식을
가르쳐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그는 시기, 질투, 불협, 아집, 독선으로 뭉친 바리새인과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한국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듯이 당시의 눈높이로 볼 때 그는 상당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상기한다. 이것은 망국병의 일환으로
이러한 악습은 지나친 과열로 상대를 존중하는 미풍양속이 아닌 상대를 밟고 올라야만 승리하고 성공 할 수 있는식의 병폐로 현대사회에도 이것은
만연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사랑이라는 헌신과 예수님의 진리에 위배되는 행위로 우리는 이러한 구습의 정신을 버리지 못하면 도태되고 말
것이다.내가 에스더 기도운동본부에서 선교학교과정을 수료했을때의 일이다. 이
단체는 원래 하나의 사회단체로 풀타임이나 파트타임에(아니면 자원봉사라도) 신청하려 했으나 부름받지않아 온라인상에서만 활동하고 있다. 북한선교에
대한 강의를 들었을때 황장엽 前 노동당 비서가 초청된 바 있다. 주체사상의 근간을 놓은 분으로 알고있는데 그것을 탄생시킨것이 아니고 주체 철학을
만들었을 뿐이라고 하셨다. 즉 주체사상은 이미 일제시대때 김일성과 박성식에 의해 기반이 마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픈도어 선교회에서는
북한은 8년 연속 기독교 탄압국 1위라는 불명예를 기록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아니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 복음과 사상이 전파된 북한의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그곳은 이제 고대 로마를 능가하는 기독교 박해의 땅이 된 지 60년이 흘렀다.
필자의 외조모님이
청년시절 인천으로 돌아오면서 그를 꿈에서 다시 볼까 두려웠다고 했을 만큼 그의 망나니같은 행동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에게 애정을 가졌던 외조부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계시를 들먹여 어린시절은 다 그렇다며 그를 두둔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김형직 부부 가족들의
장례식때마다 성주는 너무도 이상하리만큼 태연했다. 남도 아닌 핏줄의 죽음을 보면서 꿋꿋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어느정도 이해가 갔어도 최소한의
격식은 차리는 것이 상주의 예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자신을 보는 눈빛이 싸늘하다 못해 음흉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차가웠다고 하셨다. 당시
성주의 부모와 철주의 입관,발인예배를 모두 참석하고 부모님과 함께 빈소를 지켰다. 물론 성주도 빈소를 지켰으나 표정만은 내심 표독스러웠다며
몸서리를 치신 바 있다.
해마다 6.25가 되면 너무 오랜세월이 흘렀기에
잊혀져가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아픈기억이기에 직접 경험을 하던 당사자들 조차 그때의 기억을 지우고싶어 한다. 하지만 그때의
참전용사들과 증언자이신 원로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이같은 참상이 후손들에게도 일깨워주기 전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시대의 상처로 남아있을
것이다.